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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모음

십년 뒤에도 호수에 가을비 - 이면우 십년 뒤에도 호수에 가을비 - 이면우 가을비 소소한 수면 위로 쪽배 밀고 나가며 산중턱 단풍을 보네 저기 굽은 길 따라 자동차 단풍에 취해 숨었다 나왔다 하네 여기서 차 보이니 거기서도 쪽배 보일 터 물길과 찻길로 나뉜 삶이 단풍과 가을비에 함께 젖네 지금 저 자동차,단풍길 차마 못 빠져나가겠는가 가다서다 나는 노 놓고 물살에 배 맡긴 채, 붉은빛 번진 호수에서 십년이 눈 깜짝 새 지나갔다고 섬뜩 무언가 베고 지나가는 아픔을 가슴 위로 만져보네. 시집.창작과비평사.2001
가을이 때로는 가을에게 - 김계수 시인 가을이 때로는 가을에게 거짓말을 하는 법이라서 어떤 남자가 울고갔는지 가을이 다 알기 어렵다 폭풍과 비바람을 이겨낸 남겨진 풀잎들이 아슴아슴 지는 해에 마음을 아끼는 때 순간 찾아오기도 하는 가을은 말라가는 풀잎에 몸을 걸친 늙은 여치의 울음, 일생을 울고도 함께 돌아갈 짝을 이루지 못하는 귀머거리 귀뚜라미의 하얀 고막 같은 것, 가을이 때로는 가을에게 거짓말을 하는 법이라서 어떤 인연이 다녀갔는지 가을이 다 알기는 어려워도 밤이슬 툭, 떨어지는 가는 풀잎에 제 얼굴을 비쳐 본 사람이라면 가을이 언제 지나가는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남자를 발견한 가을은 언제나 굳게 다문 입이다 - 김계수 님
고독(Solitude) -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고독(Solitude) -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Laugh, and the world laughs with you;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Weep, and you weep alone.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For the sad old earth must borrow it's mirth, 낡고 슬픈 이 땅에선 환희는 빌려야만 하고, But has trouble enough of it's own.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득하니까. Sing, and the hills will answer; 노래하라, 언덕들이 응답하리라 Sigh, it is lost on the air. 탄식하라, 허공에 흩어지고 말리라 The echoes bound to a..
시골 창녀 -김이듬 시인, 히스테리아 시집 수록 -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아이들에게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어린애 같은 건 어린애들만이 아니다. 어린애 같은 건 어린애들만이 아니다. 어른들 역시 허세의 이면에는 장난스럽고, 어리석고, 엉뚱하고, 상처를 잘 받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겁에 질리고, 가엾고, 위로와 용서를 찾는 면이 있다. 우리는 아이에게서 사랑스러움과 여림을 보고 그에 따라 도움과 위안을 주는 데 능통하다. 우리는 아이들 곁에서 내면에 존재하는 최악의 충동, 복수심과 분노를 밀쳐놓을 줄 안다. 기대와 요구를 평상시보다 약간 낮게 재조정할 수도 있다. 화를 늦추고, 발견되지 않은 잠재성을 더 많이 의식하는 것이다. 이상하고 애석하게도 동료들에게는 보여주기 꺼려지는 과도한 친절함을 아이들에게는 쉽게 베푼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
노년을 아프게 하는 것은, 제페토의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 댓글 시인 제페토의 시집 에는 노년의 아픔을 들려주는 시가 있다. 노년을 아프게 하는 것은새벽 뜬눈으로 지새우게 하는관절염이 아니라어쩌면,미처 늙지 못한 마음 이리라.  2010년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용광로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망한 기사에 제페토는〈그 쇳물 쓰지 마라〉는 추모시를 남겼다. 그 시는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청년의 추모동상을 세우자는 움직임과 함께 이런 억울한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쇳물 쓰지 마라.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것이며철근도 만들지 말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것이며못을 만들지도 말것이며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그 쇳물 쓰지 말고맘씨 좋..
오래된 연애 - 장석주 시인 오래된 연애 - 장석주 시인 가을은 끝장이다. 여러 개의 파탄이 한꺼번에 지나간다. 양파를 썰자 눈물이 난다. 개수대 아래로 물이 흘러들어간다. 당신이 떠난 뒤 종달새는 울지 않는다. 장롱 밑에서 죽은 거북이 나오고 우리는 잦은 불행에 대해 무뎌진다. 접시를 깬다, 실수였다, 앞니마저 깨진다. 분별이 무서워서 분별을 멀리했다. 짧은 황혼 속에서 빛이 희박해지면 나무는 어둠 속에서 목발을 짚고 일어선다. 누군가 허둥거리고 물이 얼자 인도네시아에서 온 원숭이들이 웅크린 채 잠든다. 우리가 하지 않은 연애는 슬프거나 치졸했다. 이별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여름과 겨울이 열 번씩 지나갔다. 날씨는 늘 나쁘거나 좋았다. 영혼은 무른 부분에서 부패를 시작한다. 나는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
모든 게 네 탓 세상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번번이 우리에게 혼란과 실망, 좌절과 상처를 안긴다. 세상은 우리를 지체시키고, 창의적인 시도에 퇴짜를 놓고, 우리를 승진에서 제외시키고, 얼간이들에게 보상을 주고, 우리의 포부는 그 암울하고 무자비함에 산산이 부서진다. 그래도 우리는 거의 언제나 불평하지 못한다. 진정으로 책임 있는 사람을 알아내기가 너무 어렵고, 누구 책임인지를 확실히 알 때에도 항의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해고를 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