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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 1789, 프랑스 대혁명 1부, 2부 - 프랑스 역사에 대한 설명 - Hardcoded Subtitles 영상에 자막이 입혀진 파일

지구빵집 2016. 5. 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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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알아봅니다.
귀한 다큐멘터리 자료입니다.










< 프랑스 역사 > 

< 삼부회의에서 국민회의로 > 

프랑스의 전국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회되었다. 
의원 총수는 약 600명으로 특권 2신분의 300명에 대하여 평민대표도 동수였다. 
혁신을 갈망하는 자유주의 귀족이나 평민의원은 모든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사안(事案)을 머릿수 투표로써 결정하자고 주장하여 부별투표(部別投票)를 고집하는 특권층 보수파 의원과 대립하였다. 
6월 13일 평민의원은 그들만으로 삼부회를 영국식 의회로 개조하는 결의를 하고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왕권은 이에 대해 위협과 방해를 가했으나, 미라보를 중심으로 한 평민의원의 과감한 용기에 눌려 6월 말에는 전대표가 합류, 국민의회가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국민의회는 7월 초에 ‘헌법 제정의회’로 명칭을 바꾸고, 마침내 국민이 바라던 헌법과 의회정치 개설에 착수하였다. 
그때 왕권이 군대를 국경지대에서 불러들여 베르사유 주변에 집결시켰으므로 파리시민에게 극도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공포를 야기시킨 형세가 되었다. 

< 바스티유감옥 습격 > 

프랑스 왕권은 1789년 7월 11일 삼부회의 최고책임자인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자 혼란이 발생하여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성문을 굳게 닫고 각 가로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여 경계하였다. 
7월 14일 약 1만 명의 시민이 시의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진압차 달려온 군대도 시민의 열렬한 열기에 위압되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성(城)은 함락되고 성내의 장병은 무참하게 살육당하였다 

< 바렌 도피사건 > 

1791년 4월 초기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인 미라보가 급사하였다. 
미라보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파리에 갇혀서 불안했던 왕가 일족에게 더욱더 초조감을 안겨주었다. 
미라보는 혁명의 추진력이긴 하였어도 입헌왕정을 신조로 삼았고, 그 뛰어난 역량과 안목에 의해서 왕가에게는 더없는 지주(支柱)로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더욱이 그는 왕비에게 매수되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그의 사망 후 도피계획이 급속히 구체화되어 국왕 일가는 6월 20일 새벽에 튈르리 궁전을 탈출하여 비밀리에 마차로 동부 국경으로 향했으나, 불운하게도 국경 근방의 바렌에서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당하였다. 
의회는 왕을 처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였으나 민중은 간단히 납득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파와 왕정파 간의 대립이 격화하였고, 파리에서는 왕정폐지론이 급격히 대두하여 자코뱅당과 코르들리에 클럽의 시민은 7월 17일 마르스 광장에서 공화정체 수립의 서명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에게 짓밟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 루이 16세의 처형 > 

프랑스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은 특히 국왕의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파는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투표에서 패하여 마침내 산악파의 주도하에 국왕은 1793년 1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의 죽음은 지롱드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하의 프랑스에도 용이치 않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나폴리 ·로마교황 등이 왕의 처형 사실을 알고 잇따라 참전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대(對)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방데현(縣) 등 서부 후진지대에서는 왕당파의 반란까지 발발하였다. 

< 마리 앙뜨와네뜨 >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빈에서 출생하였다. 
1770년 14세 때 정략결혼으로 1774년 왕비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트리아농관(館)에서 살았으며, 사교·관극(觀劇)·수렵·미술·음악 등의 모임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어 작은 요정(妖精)이라고 불렸다. 
검소한 국왕 루이 16세와는 대조를 이루어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으며, 1785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그녀의 명성에 상처를 입혔다. 또, 그녀는 스웨덴의 미남 무관 페르센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연인이 있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그녀의 일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왕과 그 일족은 1789년 10월 6일 파리의 왕궁으로 연행되어 1792년 8월 10일까지 시민의 감시 아래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 사이 그녀는 퇴영적(退的)이며 선량한 루이 16세를 격려하기도 하고, 왕가의 안녕을 위해 미라보 매수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1792년 8월 10일의 시민봉기로 그녀는 탕플탑(塔)에 유폐되고,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에게는 왕과의 사이에 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장녀 마리 테레즈만이 성인이 되어 훗날 당글렘 공비(公妃)가 되었으며, 차남 루이 17세는 1795년 이후 생사 불명이 되었다. 

프랑스 역사 공부 하시길 바래요 ^^ 

- 샛별리아의 일본 만화 영화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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