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누군가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이 무작정 제 길을 찾아오기를 바라서만은 안 된다.

지구빵집 2017. 10. 3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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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 Prove it.>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당사자조차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깊고 광활한 세계를, 혼돈으로 어지러운 벌판을 한 줄기 좁은 희망으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 때로는 적절한 안내 표지가 없다면 길을 잃고 주저앉아 버리거나 겁 먹고 돌아나서는 절망밖에 없어 보인다. 사랑하는 자에게 증거가 필요한 이유다. 증거란 자신의 세계로 들여놓기 위한 자릿세가 아니다. 자신의 세계로 스스로 길을 내고 그 길을 함께 가기 위한 어둠 속 하얀 조약돌과 같다.


길은 원래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증거를 주고 받는 건 그래서 사랑을 창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둘만의 길을 내고 걸어가는 일이다. 주고 받는 힌트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만의 보물을 찾기 위해 제련하기 위해 긴 여정을 나선 이들이므로 지도가 필요하다. 표지판이 필요하다. 허술한 지침서라도 있으면 좋다. 깊고 은밀한 지름길을 알려주는 힌트가 있다면 더 좋다.


때로 사랑은 눈을 감고 길을 걷는 일이기도 하기에, 잡은 손이 없다면 너무나도 무모하다. 믿고 의지하고 온통 내맡기는 일이기에 허공을 휘휘 젓는 일은 존재를 나락으로 밀어넣는 공포이기도 하다. 사랑은 끊임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선언하고 설득하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설득할 수 있음을 믿는 것, 설득 당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언가 내게 요구할 때면 대답한다. 그래, 네가 그걸 원한다면 나를 설득해 줘. 나는 네게 설득 당하기를 원해. 상대방이 무조건 네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리라 믿는 건 오해이고 폭력이야. 바라면 제시하고 제시하면 설득하고자 해야 해. 그리고 너희들 역시, 사랑한다면 설득 당하고픈 자세를 견지해야 하고.
누군가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이 무작정 제 길을 찾아오기를 바라서만은 안 된다. 함께 길을 찾아 주거나, 적어도 원하는 길로 찾아올 만한 표지판을, 머물 만한 잠자리를, 여행을 지속할 식량을 제공해야 한다. 누구도 나를, 당신을 그저 나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사랑하지 못한다. 이건 부모 자식간에도 마찬가지다.


친구에게 말했다.
- 그렇지만 말이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이 명확해졌을 때에는 그걸 증거로 깨닫게 해서는 안 돼. 그때가 둘 중 누군가에게라도 확연해졌다면 증거로 깨닫게 하지 말고 정직하게 이야기하자. 혼자 헤매다가 돌아갈 길을 찾게 하는 건 너무 깊고 어둡고 사무치게 외로운 일일 테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Love me, Prove it and follow it.


*글 - 이서희.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영화학교 ESEC 졸업 후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관능적인 삶》이라는 책을 냈고, 현재 미국 할리우드에 거주하며 신문과 잡지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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