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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섬, 일본을 흔들어 깨운다!"
노 대통령의 3.1절 연설문을 교재로 썼다가 해고된 마스다 선생을 만나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3.1절 연설문을 학교 수업 토론 시간에 교재로 썼다는 이유로 면직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면직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국분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성원을 받아 힘이 났습니다."

마스다 미야코 전 구단중학교 교사(60)가 지난 1월 말 '한국 강제 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결성 모임에서 연단으로 나와 특별보고를 하면서 한 말이다. 
 
일본도 아닌 한국의 대통령이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던 3.1절을 기념해 발표한 연설문의 어떤 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직접 일본국민의 양심에 호소한 것이 처음이었고, 그 내용 또한 솔직했기 때문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3.1절 연설문의 진정성은 마스다 교사가 진행한 지상토론(紙上討論) 수업시간에 답장 형식으로 쓴 중학교 3학년의 글을 보면 보다 생생하게 느껴진다.
 
"대단히 훌륭한 연설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진실과 성의로써 양국 국민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이웃으로 거듭나야 합니다.'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연설문을 읽고 저는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진정한 우호관계를 깊게 하고 싶습니다."(구단중학교 3학년 학생 G.S)  
 
"우선, 무엇보다도 '국민을 소중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노 대통령은 상냥한 분이구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해서 혐오감을 내지 않고 상냥하게 대해 주시는 것에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앞으로도 일본과 한국이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천천히 사이가 좋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구단중학교 3학년 학생 J.S)  

그러나 마스다 교사는 이웃나라 대통령의 연설문을 학교 수업교재로 썼다는 이유로 지난 2006년 3월 면직이 됐다. 연설문을 수업교재로 쓴 지 1년만이다. 해직이 된지 4년이 다 되가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이 아주 근사하다(とても素晴らしい)고 말한다.
 
마스다 교사는 면직 후 도교육위원회의 처분이 부당하다며, 면직 무효 소송을  도쿄지법에 냈으나 지난해 6월에 패소했다. 그러나 곧바로 항소를 제기,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굽히지 않고 싸움을 진행 중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한 올해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JPNew는 도쿄 인근 지바현 아비코에 있는 자택에서 마스다 교사를 만나 그의 '힘겹지만 당당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일본 역사를 제대로 알려고 하다 보니
 
마스다 교사와 1973년부터 도쿄에서 중학교 사회과를 맡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도 처음부터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교사는 아니었다. 평범한 교사 중 한 명이던 그는 아이들에게 근현대사를 가르치기 위해 역사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침략사, 그리고 덴노(天皇)의 전쟁책임과 범죄성에 대해서 알게 됐다. 혼자서 공부하게 되면 일본의 보수세력이 말하는 논리에 빠져들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보통 역사학자는 성실한 사람들이라서 일본의 과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책을 보고 제대로 공부를 하면 진실을 알게 되고 식민지 문제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죠."
 
즉, 7-80년대만 해도 일본 역사학계에서 우익적인 흐름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95년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부터다. 무라야마 담화란 사회당 출신의 총리가 전후 50년을 결산하면서 발표한 내용으로 과거사에 대해 일본의 침략을 인정하는 사죄가 담겨있었다. 일본총리가 공식적인 사과를 발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후 일본 우익은 위기감을 갖게 됐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되는 등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된다. 새역모는 일본의 침략 등의 과거를 가르치는 것을 자학사관이라고 명명하고, 애국심을 갖게 하는 역사관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침략전쟁을 미화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 식민지배를 함으로써 상대국에 좋은 일도 했다는 식의 내용을 우익학자를 동원해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마스다 교사가 본격적으로 한국과의 문제를 인식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역시,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종군위안부였다고 밝히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아 이건 정말 과거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문제구나라고. 그전까지는 한국에 군사정권이 계속되고 있었고 김대중 납치 사건 등으로 조금 무서운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종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 1월 한겨레 신문에 '정신대 취재기'가 발표된 이후 일본사회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김학순 할머니는 직접 일본에 와서도 증언했다.
 
마스다 교사는 나중에 이 문제를 가지고 학생들과 지상토론(紙上討論)을 진행했다.
 
지상토론이란 마스다 선생이 고안한 수업방식으로 미리 준비한 비디오나 자료를 보고 학생들이 다음 수업시간까지 자신들의 감상이나 생각을 적어내는 수업을 말한다. 마스다 교사의 제자들은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일본 근현대사를  이 수업을 통해 접하게 된다.

그가 이 지상토론을 진행한 것은 어느 사건 때문이었다.
 
1988년 12월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나가사키 시장은 시의회에서 "히로히토 덴노(天皇)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했다. 당시 히로히토가 위독한 상태로 일본은 덴노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자숙 모드에 휩싸였기 때문에 이 발언은 크게 언론에 클로즈업됐다. 이로 인해 우익단체들이 강력히 항의, 발언 철회를 요구했으나 모토시마 시장은 거절했다. 결국 1개월 후인 1989년 1월 시청사 현관 앞에서 우익단체 간부로부터 저격당해 전치 1개월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배우고 나면 그 근본에는 덴노의 범죄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덴노에 대해 발언하면 '안전하지 않다'는 것과 또 빨갱이(赤)라는 말을 듣고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런 내용을 가르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가사키 시장이 전쟁 책임에 관한 말을 조금 했다고 해서 피격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제 자신이 그동안 공부한 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지상토론은 1개월에 한번씩 진행했다. 지상토론은 종이에  자신의 생각을 적는 것이므로 생각을 깊게 한다고 마스다 교사는 말한다. 그러나, 유토리 교육이 시작되면서 사회과 수업이 주 4시간에서 주 3시간으로 줄어들면서 지상토론도 1학기에 한,두 번으로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꾸준히 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역사적 진실을 지상토론을 활용해 가르쳐왔다. 그러던 1997년 6월,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대한 지상토론 수업을 계기로 고통을 겪게 된다. 수업 내용을 본 학생 어머니가 '반미교육'이라며 항의를 한 것이다. 이 학부모는 미국인과 결혼한 여성으로 마스다 교사가 '잘못된 내용을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그때, 지금 정말로 현안이 되고 있는 후텐마 미군 기지 등의 문제를 다뤘어요. 물론 지상토론에서 나온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소개했어요."

도교육위원회는 어떻게 미군기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 강제연수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교육위원회는 처음부터 마스다 교사의 지상토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1997년 졸업식 기미가요 제창때 마스다 교사가 가르친 제자들이 기립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지 않은 적이 있었다. 학생들은 기미가요(君が代)가 '덴노(天皇)의 세상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졸업식 때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 교육위원회는 이것이 '마스다 교사의 편향교육의 탓'이라고 단정짓고 그후부터 제재할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마스다 교사는 '불기립문제'로 전근을 당했고, 같은해 6월 미군기지 지상토론 내용이 문제시화되면서 교육위원회가 칼을 빼든 것이다. 산케이신문 또한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불을 붙였다. 결국, 99년 7월 징계처분을 받고 9월부터 학교가 아닌 연수센터로 출근하게 되었다. 

연수센터에서는 그에게 '공무원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적으시오.' 등 과제나 작문을 시키는 것으로 2년 반의 시간을 보냈다. 그 후 그 이상의 처분할 명분이 없자 다시 교단으로 되돌려보내게 된다. 물론, 왜 다시 복귀시키는가에 대한 이유도 교육위원회로부터 들을 수 없었다.

마스다 교사가 다시 교단에 돌아온 것은  2002년 4월, 야스쿠니 신사 근처에 있는 구단 중학교였다. 물론 지상토론은 다시 재개됐다. 그리고 운명의 2005년 3월 1일.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한 연설문의 번역문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메일로 소개됐다. 이와나미 서점이 펴내는 잡지 '세카이'(世界)에도 나왔다.
 
"때마침 학교 역사수업 거의 끝나는 시점이라, 아 이 연설문은 매우 좋은 교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편지형식이라면 학생들이 쓰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에게 답장 편지를 써봅시다라고 했죠. 그런데, PTA(학무모 회의)의 부회장 아버지가, 야스쿠니 신사 관계자로 알고 있는데 도쿄 교육 위원회에 학교에서 과연 이런 수업을 해도 되는가라며 항의를 했어요." 
 
도 교육위도 마침내 마스다 교사가 수업시간에 만든 '노무현 대통령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문제시 했다. 이 인쇄물에는 '일제가 주변국을 침략한 사실이 없다'는 도의회 문교위원의 망언과, 후소사판 역사교과서를 '역사위조주의'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들어 있다. 교육위는 마스다 교사가 이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교사의 신용을 떨어뜨렸다며 또 다시 징계 처분에 들어갔다. 
 
이로써 마스다 교사는 다시 2005년 9월부터 연수센터로 출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은 그가 영영 학교현장을 떠나는 날이 됐다. 연수센터에서는 보다 노골적인 징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99년에 징계처분을 받았을 때는 일반적인 공무원 자격에 대해서 지적받았으나,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이런 수업을 하지 말라'며 교육내용에 대한 반성문을 쓸 것을 요구받았다. 하루 8시간, 자리를 벗어난 시간까지 감시를 받았다. 그렇게 계속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2006년 3월에 면직 처분됐다. 
 
기자가 그렇게 계속 굴복하지 않으면 해직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두렵지 않았느냐고 묻자,
 
"무섭기는 했지만, 그것에 굴복하면 제 스스로가 자신의 교사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됩니다. 만약 굴복해 반성문을 쓰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 한들, 제가 교단에 설 수 있겠어요. 저는 그저 진실을 가르친 것 뿐입니다."
 
라며 이상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마스다 교사는 2006년 9월에 면직처분이 부당하다며 재판을 걸었으나 작년 6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패소해, 7월 고등법원에 항소한 상태다. 그의 이런 외로운 싸움에 아사히 신문 등 자칭 진보적인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고, 교원노조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기미가요, 히노마루 문제에 대해서는 언론사에서 다뤄도 특별히 우익이 쳐들어오거나 하지 않지만, 저는 우익들이나 도의회 의원들이 표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다루면 그걸 문제 삼아서 항의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국의 한 언론사 도쿄특파원은 이런 것이 바로 일본사회의 집단 괴롭힘이라고 한다. 천황제(天皇制) 등 일본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은 진보건 보수건 가차없이 선 밖에 밀어 내친다는 것이다.
 
소송 비용은 면직 후 받은 33년간 적립한 퇴직금을 깨서 댔으나, 아직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올해부터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생활은 어떻게든 꾸려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고등재판소, 최고재판소까지 갈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일본 매스컴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일본의 역사인식의 낮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우선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해 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로 현재 지바현 아비코 시,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시, 도쿄도 스기나미구에서 매월 한 번씩 '시민 강좌'를 열고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있다.
 
"일본인도 바보가 아니니까 반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니까 반성을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강좌를 들으신 분들 중에 그런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일본인이 역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학교 수업 시간에 메이지 유신 이후 역사에 대해서 거의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배워도 주마간산격으로 대충 훑고 지나간다. 시험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가르치는 선생도 모르는 게 현실이다. 마스다 교사는 일본에서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살아가기에 안전하다고 자조했다. 일본의 역사교육현장은 근현대사 부분만 놓고 보면 거대한 망각의 섬인 것이다. 그는 이것에 구멍을 내고 싶어했다.

그동안 가장 괴로웠던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괴로운 것은 별로 없었어요. 세계가 훨씬 넓어졌고, 면직이 안됐으면 그냥 평범한 교사로 끝났을 것"이라며 웃는다. 
 
그러나, 마스다 교사의 싸움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일본에서 5000여명, 한국에서 6000여명이나 면직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에 동참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사람들에게

“일본인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말 뿐아니라 정말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리는 활동을 계속하겠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진실된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일본인 이상으로 한국분들에게 감사하는 기분입니다."
 
라며 인터뷰를 끝냈다. 인터뷰 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한 마스다 교사. 그를 와세다 봉사원 스콧홀에서 처음 만난 날, 귓속에 강렬하게 꽂힌 말이 아직도 떠오른다.
 
"저는 면직된  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그에게 이런 용기를 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역사의 진실이 가리키는 무언(無言)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마스다교사의 싸움은 진정한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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