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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생각 바른 글

여자는 한참을 뛰지 못하고 있다. 자꾸 말이 끊어진다.




여자는 한참을 뛰지 못하고 있다. 자꾸 말이 끊어진다. 


여름이 참 길고 지루하고 또 지루하다. 작년은 수월하게 지냈는데 올해는 111년 만에 찾아 온 폭염으로 푸욱 익어간다. 세상이 생긴 이후로 한 번도 같은 날씨라거나 같은 기후, 같은 아침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다. 모든 날씨는 우주와 자연과 사람 마음이 만들어 내는 유기적 조합이기에 같은 날이 있지 않은 게 당연한 일이다. 여자는 한참을 뛰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말했다. 연골이 닳았는지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여러날이 기약없이 흐르고 있다. 여름을 여름처럼 보내야 가을 겨울에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건 진이 빠져서 버티기도 힘든 날이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좋을텐데 여름 참 치열하네. 안그래?" 여자가 말했다. 말 하고 나면 꼭 확인 받으려는 말을 덧붙이는 게 여자의 말버릇이다. '그렇지?' 라고 물어서 남자가 자기의 생각에 동감함을 표시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아니면 '왜 동의 안하는 표정이니?' 하고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뜨거워서 그런지 데일까봐 움직이는 걸 최소한으로 하면서 지내. 동작도 작게하고 이동도 안하는 편이야.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 버티는 거지. 여러가지 생각도 바닥에 바싹 붙이고 마음도 가능하면 안 움직이게 하면서 말야. 해보니 별로 도움은 안되더라고." 남자는 말했다. 


"무엇이든 아끼면서 지내야 한단 생각이 들었어. 말도 아끼고 생각도 아끼고 바램도 아끼고, 무엇이든 쏟아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오래 갈 거라고, 쉽게 증발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마찬가지로 아낀다고 오래가는 게 아니었나봐. 사실 내 것도 아닌데 말이지." 남자는 말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알지? 옥중에서 여름은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고 신영복 선생님이  말했는데, 여름은 모든 것을 갈라놓는 거 같애. 알아?" 햇살이 사물과 거리를 가르고, 사람들을 가르고, 사람의 마음도 갈라. 몹시 걱정은 되는데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은 안드니까 말야." 남자는 말했다.


"네 말대로 한 여름에 무슨 전쟁이라도 터진 느낌이야. 전쟁!" 여자는 말했다. 


"무릎이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아, 통증도 있고 많이 불편해. 맘도 불편하다. 여러가지 일이 생겨서. 생각이 많아졌어. 일단 잘 뛰려고 하는 욕심은 내려놓고, 조금 편해지면 달릴거야. 떠나고 싶어. 어딘가 아주 외진 곳에서 1년 쯤 있다 오고 싶어." 여자가 말했다. 


요즘들어 내가 하는 예상들이나, 결과적으로 알게 되는 일들은 이상하게도 잘 맞아 들어간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가장 정점에서 하강이 시작되고, 제일 뜨거울 때 식는 일만 남고, 모든 큰 상처가 생기면 낫는 일만 남은 거라는 단순한 생각만 한다. 똑같이 나의 일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잘 살피는 일이다. 여자는 자주 남자에게 말했다. 잘 살피고, 잘 거르고, 두루 생각해서 하나씩 헤쳐 나가는 혜안을 갖으라고. 재미는 없었다. 일종의 놀이라고 하면 놀이겠지만 별로 재미는 없다.


생각보다 부상, 목표달성, 도전, 항해와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일일찍 찾아왔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왜 지금인지는 알 수 없었다. 틀림없이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다. 남자는 걱정이 되었지만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을 바라 볼 용기가 없었다. 남자는 늘 그렇듯 잠시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거의 상처가 아물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늘 고통에서, 미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체념하는 법을 익힌다. 어떤 물건에도, 어떤 대상에도 마음이 묶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일상은 늘 무언가를 버리고 가는 훈련이 되어버린다. 자꾸만 지난 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록 버리지 못하게 된다. 지난 날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 수록 자꾸 기억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생각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러기 위해선 사진부터 모조리 지워야 한다. 아름답든 쓸쓸하든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지난 사진이다. 사진은 지나가버릴 어떤 순간을 영원으로 잡아두는 순수한 기능이 있다. 사진을 버리면 지난 기억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해 본다. 어떤 일들은 짧을 수록 더 좋을 수 도 있다. 특히 이별같은 일들은.


남자는 생각했다. '이런 일도 지나가는 거지?' 하고 속으로 말했다. 건성건성 듣고, 깊게 생각하는 게 남자가 잘 하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남들 놀 때 공부하고, 우선 놀고나서 남는 시간에 공부하는 게 특기인지도 모른다. 말투가 그랬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오해한다. 인간미가 없고 무심하다는 등 매사 심드렁하고 염세적이며 비관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듯 말하는 버릇을 이해하지 못한다. 말투는 남자가 버티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과정이다. 호들갑 떨지 않고 가만히 힘을 빼고 생각하는 중이라는 것을 남들은 알지 못한다. 드러내고 싶지 않는 생각이 남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감추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 들키길 싫어한다. 여자의 사진이 바닥나고 있다. -見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