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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생각 바른 글

강해지려면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남자는 많이 달렸지만 하나도 안 달린 사람처럼 굴었다. 원래 그런지, 아니면 깨닫는 과정인지 모르겠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살기 위해 '투덜대면서 살아간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여전히 투덜대고 궁시렁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는다. 달릴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 달리고 나서 약간은 뻑뻑한 몸의 느낌으로만 '아, 많이 달렸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처음으로 과천 관문 체육공원에 나가 달린 날이 벌써 1년 반이 약간 넘었다. 13년 만에 일어나는 우주쇼로 달·화성·금성이 일렬로 선다는 날이다. 싸늘한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하늘이 아름답구나. 막혀서 늦어. 하늘 보고 있어. 금방 도착해." 여자가 문자를 보냈다.


무작정 멋도 모르고 달렸다. 이후로 오랫동안 먼 거리를 달렸다. 시간은 많이 흘렀고 변한 일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좋았다는 이야기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한다. 자칫 좋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날은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영원히 존재한다. 남자는 아름답고 좋은 시간을 잡으려고 애쓰지 말고, 좀 더 함께 하고 싶다고 연연해 하지 않고 일찍 보내 버릴 생각을 한다. 머문 생각들을 자꾸 보내야 새로 아름다운 일들이 또 들어올 수 있다. 그래야 오래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태생적으로 오류가 많고 온순하면서 나약한 남자는 달리면 달릴수록 자꾸만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고, 스스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성격이나 내면, 밖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기질들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강해지려면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되려면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남자는 집중하기로 했다. 달리는 일에 집중해야 다른 일에도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말을 덜 하기로 했다. 모임에 나가서도 말을 아끼는 중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웃기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내가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 되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말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달릴 때는 심하게 한눈을 판다고 여자는 자꾸만 잔소리해댔다. 양재천 주로를 달릴 때나 운동장 트랙을 돌 때도 남자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머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니? 볼 게 그렇게 많아? 잠시도 눈을 한 곳으로 두지 않네. 떠들지 말고 달려!" 여자가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도 많고, 자세 하나 바로잡기에 바쁜 초심자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나는 그저 달리는 길에 놓인 풍경과 멀고 가까운 구조물과 지형, 매 순간 달라지는 구름과 하늘, 공기의 냄새를 매번 새롭게 보고 싶었다. 지나고 보니 그것들은 내가 보고 싶다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아니었다. 저절로 익숙하게 두 눈에 맺히는 상을 또렷하게 보고 싶다는 나의 욕심이었다. 욕심을 버릴 때가 되었다. 말을 줄여가며 집중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요즘 달릴 때는 최대한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필요한 말도 하지 않으면서 달리고 있다. 내가 집중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현상이다. 


"애들, 장난이 아니야. 네 몸에 집중하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달리는 일만 생각해." 여자가 말했다.


"넌 좀 차분해질 필요가 있어. 말도 너무 많아." 여자가 말했다.


몇 달간 춘천마라톤을 앞두고 많이 달리고 있다. 훈련도 즐겁게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조금은 완벽하게 달리고 있다. 화요일과 목요일 관문 체육공원에서 트랙 달리기를 10km 정도 달린다. 주말 정기모임에서 10km를 달리고, 일요일 오전에 장거리 훈련으로 22~32km를 달린다. 적어도 10월 말 큰 대회전에는 한 달에 250km 이상은 달려야 한다. 오늘은 남산 순환 산책로 일부를 달렸다. 왕복 4회를 달리니 총 24km를 달렸다. 산책로 6.3km 거리를 왕복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길고 짧은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네 군데 있는데 이때 집중하지 않으면 페이스가 엉망이 되어 금방 지친다. 언덕에서는 특히 주의한다. 무릎에 강한 압박이 걸리지 않도록 내려갈 때는 천천히 달린다. 달리는 일이 조금씩 재미가 생긴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도 좋고, 잘 가르치는 선배 러너들과 비슷하게 달려주는 동료와 새로 달리기에 합류한 신입 회원을 만나는 일도 즐겁다. 


"뭘 보니?" 여자가 물었다.


"네가 달리는 모습을 봐. 위로, 아래로, 뒤에서 사방으로 보고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늘 여자가 달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정면을 응시하고 옆에 함께 달리며, 때로는 바닥의 그림자를 통해서도 본다.


"이런 싱거운 자식, 이리와. 나랑 같이 달려." 여자가 말했다. 


천천히 달리면서 균일하고 촘촘한 대화를 나눈다.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쥐어지고도 남는 손목과 신발을 신었을 때 도드라진 발목이 유난히 가는 여자는 무릎이 좋아진 이후로 잘 달리고 있다. 아직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모르겠지만, 몸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자신을 추스르는 연습은 좀 더 해야겠지만 언제 그런 일이 필요한지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남자는 늘 여자가 한 말을 곱씹어 본다. 


모든 일에 대한 선택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런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언제고 떠날 수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고, 떠나지 않아야 할 날은 없다. 그냥 멈추지 않고 달릴 뿐이다. -見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