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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생각 바른 글

그가 호를 받았다. 그를 다른 이름으로 얼마나 부를 수 있을까?

 

그가 호를 받았다. 그를 다른 이름으로 얼마나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은 허구를 잘 믿고, 또 허상을 키우기 좋아한다. 늘 무엇인가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뇌가 좋아하는 방식이다. 마치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면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는 일을 인간의 뇌는 잘한다. 호모데우스(유발하라리 저)에 보면 역사적으로 화폐, 상징, 자본주의, 경제 구조, 지식 등 정교하게 쌓아 올린 허구들(동시에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사피엔스가 살아남아 역사를 이어가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아프리카 지도에 그려진 상상의 국가 분할 선과 농지 하나 없이 만들어진 곡식 생산량 서류는 실제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화폐를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학위 증서나 성적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혹은 성경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잘 살기 어려울 것이다. 허구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실제를 고집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따르지 않는다.   

 

  남자가 살아가는 방식이 늘 그렇다. 언뜻 보면 꿈을 꾸고, 허구와 허상을 실제가 아닌 듯이 부정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치 일어난 일처럼 받아들이고 산다. 어떻게 한 인간이 여러 순간을 나누어 살고,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동시에 겪고, 시간의 여러 차원을 한번에 살아가는 사람일 수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게 남자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한 순간이 좋으면 그 좋은 감정을 계속 가져가고 싶어한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인간은 늘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인간이 나오기 전에는 말이다. 누가 뇌에서 분비되는 엔돌핀(고통스러울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나 도파민(사랑할 때 나온다)을 스스로 그만 나오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여자는 나에게 잘 어울리는 호를 주었다. 그때가 더위가 한창이던 2017년 여름이었다.(호를 얻다. 여름이 가기 전에 지어주었다. https://fishpoint.tistory.com/2378). 그가 지어준 호로 나를 부르거나, 무엇인가 따지는 투로 이야기 할 때 먼저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할 수 도 있다. 이름 붙여주고 우리는 피하기도 하고, 지켜보고, 달려들고, 보다 친숙하게 지낼 수 있다. 모든 것에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그가 내게 붙여준 호를 잘 쓰고 있다. 많이 알리지는 않지만 글을 쓰거나, 나를 소개하거나 할 때면 꼭 같이 쓰곤 한다.  

 

  남자는 그를 편하게 부를 다른 이름을 원했다. 남자에게 호를 지어주고 항상 원하고 있었다. 그냥 이름을 불러도 되는데 남자는 다른 호칭에 집착하기도 했다. 마음을 드러내기 싫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름도 알아보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이름을 이름 그대로 소리 내어 부르기는 어려웠다. 이름은 개인적으로 존재보다 앞선 관계에 의해 받은 이름이다. 즉,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받은 이름일 수 있다는 말이다.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누구의 조카이면서 누구의 언니가 되기도 한다. 비록 알고 지낸 지 오래 되었지만 새로운 관계에선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잠이 들 때, 가끔 보고 싶을 때, 그리고 언제나 항상 부를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쨌든 남자는 여러 번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남자가 나에게 호를 지어줄 형편은 되지 않았다. 동기부여, 양재천, 명상가, 스승님 등과 같은 이름으로 남자의 스마트폰에서 그의 이름이 변하면서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새해가 시작되고 둘째 날, 그가 호를 받았다며 들뜬 목소리로 연락이 왔다. 

 

"네가 나를 부를 이름을 받았어." 그가 말했다. 

 

"얘, 어느 것이 좋은지 물어보고 싶은데?" 그는 물었다. 

 

"하나는 미원(米院)이야. 내가 자라고 살아 온 고향에서 따 온 이름이지, 이정(二程)은 북송의 '정호'와 '정이' 학자에서 따온 이름인데 학문의 깊이를 더하라고 붙이면 좋을듯한 이름이야. 마지막 '이정' 이란 단어는 한자가 없어. 새로 만든 말인지 모르겠지만 지어주신 분 말로는 '아름다운 표준'이란 뜻이라고 알려줬어." 그가 말했다. 

 

"다 좋은데? 네 맘에 드는 건 어떤 거니?" 남자가 물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남자의 버릇이다. 애초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중요한 것은 남자의 생각이었다. 

 

"음~가족 이야기 쓴 글 참 아름답구나. 읽는 내내 아련해지는 게 정말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감동 받았네." 남자가 말했다.

 

"이 사람아!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나는 처음 받았을 때는 이정(二程), 좀 더 보니 이정, 답장을 보낼 때는 미원이 마음에 든다고 보냈어. 내가 이러고 살아요. 하하." 그가 말했다.

 

"너는 어떤 게 좋은지 묻고 싶어. 견하, 네가 부르고 싶은 이름은 어떤 이름이니?" 그가 말했다.

 

"상투적이지 않아야 해, 그리고 의미는 소용이 없어. 정작 중요한 의미는 나중에 만들어지거든. 난 이미 정했어. 부를 때 아름다운 마음이 생기는 소리야.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 그래야 후회하지 않아. 무엇이 되든 난 좋으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네게 물어보는 거야. 세 번째는 내 사주에 없는 기운을 보강했고, 두 번째는 학문의 깊이를 더해가라고, 첫 번째는 나의 탯줄에서. 네가 보기엔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싶은데?" 그가 말했다.

 

"아, 난 '이정'이 마음에 들어. ㅇ하고 ㅈ이 붙어 있어서 부르기도 편하네. 하하. 이름이 많이 부드러운데 호를 지어준 분이 너를 잘 알고 지은 느낌이 들어. 모든 일을 깊게 생각하고, 참으면서 지내지 말고 좀 데면데면 살아가란 뜻인가 보다. 맞아? 하하." 

 

남자는 그를 부를 다른 이름을 알게 되어 좋은 건지, 그가 이름을 갖게 된 게 좋은 건지 모르지만 마냥 신이 났다. 자기가 오랫동안 기다린 일처럼 좋아한다. 사실 이름이 중요하거나 예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이름으로 그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고, 사실 중요한 일이었다. 어떤 이름은 자주 부를 것 같지만 전혀 부르지 못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전혀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자꾸만 입 속에 맴도는 이름이 있기도 하다. 우선은 그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선을 긋기로 한다.

 

"이정 의미가 '아름다운 표준'이라고 말했지? 처음부터 맘에 들었어. 너도 좋다면 나도 좋아 보여." 그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가끔은 의지하지만, 그는 나에게 한 번도 의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의지하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갖게 된 다른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동안의 관계에 없던 이름이고, 그를 알고 지내면서 부르던 이름은 아니다. 새로운 관계에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그저 그런 상태로 이어지는, 못 미덥지만 끊어지지 않으면서 이어지는, 자기 연민과 같은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가 있을 지 그건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순환하는 계절이면서 해가 바뀌는 겨울에 이름을 받았으니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見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