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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생각 바른 글

이상하게도 봄에 꽃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봄에 여자뿐만 아니라 꽃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사계절을 담담하게 보내는 사람이다. 반드시 제철 음식을 먹어야 계절을 보내는 사람처럼, 계절마다 꼭 필요한 일들을 빠뜨리지 않고 잘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한 번은 좋아하는 계절이 없다고, 봄보다는 가을이 그나마 좋다고 말했다. 늘 주어진 휴식 시간을 즐겁게 지내는 그를 보고있다. 그는 하루를 오감을 통해 섬세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이른 새벽 굳은살처럼 굳은 세상, 이른 아침의 청명한 공기, 자욱한 안개를 지우며 밝아오는 빛의 기운을 알아채는 사람이다. 계절이 바로 그였고, 그가 계절이었다. 

봄 꽃이 아직은 아닌데 동네마다 호들갑을 떤다. 아니면 공기도 좋지 않았고, 비도 자주 내렸던 지루한 겨울을 보내니 기쁜 마음이 들어서 일 수도 있다. 지나고 보니 봄에 꽃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잠깐 시간이 있는 금요일 오후 꽃이 활짝 핀 뚝방이 보이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영동 1교 주위에는 서초구에서 여는 등꽃 축제가 한창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나 숏컷으로 단정한 머리와 하얀 청바지, 길게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가볍고 따뜻하게 보이는 감색 외투를 입고 나왔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그는 유난히 깨끗한 흰색 청바지가 날씬한 다리와 잘 어울린다. 아마도 다리가 예뻐서 그렇게 보일 것이다. 안부를 묻지만 사실 관심사는 아니다. 할 말이 많아 순번을 정해도 다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아무리 편하게 이야기를 해도 생각한 이야기를 다 하는 법은 없다. 일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끔 머리가 하얘지는 이야기라도 하면 모든 이야기를 뛰어 넘는다. 길을 걷다 보이는 특이한 건물 형태와 아름다운 구조를 잘 알아보는 남자는 정작 사람을 읽을 줄을 모른다. 심지어 외면한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없다. 길에는 꽃 구경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다닌다. 꽤 오랜만이다. 봄 햇살이 너무 좋은 날이다. 책 이야기를 하고 가족 이야기를 하고, 부상 이야기와 달리기 이야기를 한다. 둘 만 알아야 하는 비밀처럼 다른 동료들의 험담을 한다. 밖에 나가서 걷자고 한다. 뚝방길을 따라 내려가자 우리가 아는 손님이 걸어온다.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여자 친구도 없이 지내는 그는 혼자다. 봄이 온다고 여러 곳에서 꽃 축제가 열리니 이런 주말에 그 외로움이 끝까지 다다라 낮술을 마시고 취했나보다. 다리 아래로 차가 다니는 도로를 애처롭게 걸어 비틀 거리며 우리가 내려가는 계단을 올라온다. 봄을 즐기는 사람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크리에이터와 오래간만에 모든 짐을 벗어버린 사람과 양재천 꽃길을 걸었다. 양재천은 막 피기 시작한 하얀 벚꽃으로 눈이 부시다.

사람은 즐겁고 아름다운 때에 함께 있던 사람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자기가 존중받고, 사랑받고, 각별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생각하던 그 느낌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있기 불편한 사람하고는 두 번 다시 합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어려운 이유다. 우리는 올바른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말을 듣는다. 우리는 웃기는 사람이 말해서 웃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이 웃겨서 웃는다. 좋은 사람의 배려는 언제나 감사하지만, 모든 호의가 좋지는 않다. 주위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는 말을 듣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 

"와~ 너, 왜 이렇게 예쁜데?" 남자가 말했다.

"그래? 쉿! 나 원래 예뻐, 너만 알고 있어. 소문 내지 말고." 여자가 말했다.

"하하하, 알았어. 늘 발전하네." 남자가 말했다.

"진부하지 않으면 좋을 나이야." 여자가 말했다.

"알아. 굳이 진부하려고 하지는 마. 애 쓰는 모습은 동정심이라도 받지만, 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 내가 싫지?" 여자가 말했다.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싫고 좋고의 이유가 아닌데 왜 이런 말을 할까. 그냥 잘 알고 지내는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부상은 잘 회복되고 있니? 맘이 아픈거지? 다리가 아픈게 아니라. 니가 털고 나와야 나도 씽씽 달리지." 여자가 말했다.

사실 부상으로 지내는 시간은 우울한 시간이 다. 무엇보다 좋은 계절이 시작하는데 인내하며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은 좋지 않다. 양재천 둑은 벚꽃, 개나리, 조팝나무, 생강나무 등 봄을 알리는 꽃이 지천으로 눈부시게 피고 있다. 사람들은 꽃놀이에 정신 없다. 핀 꽃은 진다. 피지 않은 꽃은 지는 순간을 갖지도 못한다. 지금 우리가 올해 보는 꽃은 작년에 핀 꽃도 아니고 내년에 필 꽃도 아니다. 우리가 엄청나게 열심히 살아도 인생에서 꽃을 피우기는 어렵다. 싯다르타가 죽음에 직면해 제자들에게 "얘들아, 고개를 돌리지 말고 무상에 직면하라."라고 말했다. 무상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죽음과도 같다. 무상을 직면하라고, 고개를 돌리거나, 얼핏 보지말고 눈을 부릅뜨고 무상을 똑바로 보라고 말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무상을 볼 수 있을 때 쉽게 헤어질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하얀 벚꽃에서 무상을 본다면 우리가 떠나기라도 하면 곧 꽃이 질까봐 떠나지 못한다. 꽃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다. 핀 꽃이 지는 것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런 자세로 살면 삶의 많은 부분들이 원만하게 잘 해결될 것이다.

그는 나와 비슷하다. 따뜻한 블랙 커피를 좋아하고, 캔맥주를 앞에 두고 오래 이야기 하고, 독한 술이나 소주 맥주를 섞어서 잘 마시고, 열리는 모든 축제를 좋아하고, 색다르고 특이한 것들을 좋아한다. 오래 묵은 것들을 주로 옆에 두고 지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여자에 대해 마음을 품는 일하고는 다르다. 현명하고 단호한 말투와 언제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집중해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지적인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를 보고 욕정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정욕은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일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있고, 서로를 잘 안다고 해도 한계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심장이 덜컥하고 제자리를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손가락 끝까지 피가 통해 퍼덕이며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터널을 막 빠져나오는 시원한 해방감이 든다. 꼭 이런 환한 봄날을 느끼게 한다. -견하-

*참고: 강신주-죽음보다 두려워해야 할 것 https://youtu.be/4y0g3Eo3O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