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지구빵집 2021. 1. 1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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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 항공사의 비행기 안에서 낭만적 운명의 징표라 믿는 천사 클로이를 만난다. 어떤 사람을 두고 필생의 사랑이든, 그와 있던 시간이 가장 무엇 무엇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야야 한다). 클로이를 만난 남자는 기다림에 끝이 났고, 서로 운명 지어졌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종교를 세운다. 1장 '낭만적 운명론'에서 남자는 사랑하게 될 운명과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운명은 다르다는 것과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깨닫는 말로 결국 헤어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목적지가 같은 비행기 안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클로이와 이별하는 순간도 휴가를 다녀오는 비행기에서 이루어진다. 

 

묘한 대비를 이루는 만남과 헤어짐이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두고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남자와 클로이가 이별하는 장면에서 둘이 어디서 만났더라? 하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돌아오니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우연이 쌓이면 운명이 된다고 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가장 근접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모든 일화를 쫓아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그녀의 모든 농담을, 실마리를 놓치곤 하는 모든 사유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감정을 이입하기 위하여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은 포기할 준비, 그녀의 모든 기억을 차곡차곡 분류 정리할 준비, 그녀의 유년의 역사가가 될 준비, 그녀의 모든 사랑과 공포를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과 몸 안에 흘렀을 모든 것이 곧 매혹으로 다가왔다. p.23

 

알랭 드 보통은 이것저것 상관없는 것들을 가져와 아주 긴밀하게 연관 짓는 일을 잘한다.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히 안배하여 웃음이 나는 곳에서 슬픔을 보여주고, 슬퍼야 할 때 미소 짓게 만든다. 더구나 그가 하는 이야기는 유머가 가득한 역설이 매혹적이다. 저자의 박학다식하다거나 잘난 체하는 문장 스타일은 간혹 비판도 받지만 나는 그가 철학과 역사, 문학을 해석하는 통찰력이 부럽다. 인용을 하든 이야기를 옮길 때 보이는 명쾌한 논리적 추론은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보통 앞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고, 해석의 방향성은 늘 사랑과 사람 관계에 한정을 짓기 때문에 그는 혁명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도 아니다. 애초 그런 걸 믿는 사람은 글을 쓰지도 않는다.

 

중국의 역사라든가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역도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절과 맞지도 않을뿐더러 방향도 맞지 않고 앞으로는 더욱 달라지는 환경에 노출된다. 주역이 추구하고자,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맥락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고정되지 않은 변화의 원리에 충실하게 해석해야 한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은 '주역'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과 부와 권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방어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적어도 자기에게 그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될 상황이 오기 전에는 그렇다. 사랑이나 행복한 가정, 평화로운 일상이라는 의미에 대해 늘 냉소적이기에 얻을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늘 우울한 것은 아니다. 자기의 감정이 드러나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지혜로운 여우의 신포도 전략은 아주 현명한 대처방법이다. 

 

사랑의 역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꿔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p.59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실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믿을 만한 어떤 사람인지도, 언제나 자기 편인 사람, 지구의 멸망이 내일이라면 일찍 퇴근해 사과나무를 같이 심을 사람 말이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해도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알베르 까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 자신이 완벽하다면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우리는 자신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므로 불쾌감을 느낀다.

 


의미론적으로 사랑과 관심은 거의 같은 말이다.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은 나비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p.144 

클로이는 남자와 만나면서 남자의 친구 윌을 만나게 되고 잠자리를 갖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이별한다. 바로 스페인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엠마뉴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적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고통이나 쾌락에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으로 행동할 때 도덕적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할 때만 도덕적이다. 클로이는 절대 비도덕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남자가 주는 위로, 격려, 지원, 애정을 거부했다고 해도 말이다. 

 

자살의 역설, 고뇌의 순기능, 고통 받는 자의 특별함을 간직한 남자는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랑하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연주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혜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지혜는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불안, 두려움. 우상 숭배, 해로운 정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첫 충동이 꼭 진실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 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꿔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은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p.260

 

책 표지에 '괴로운 마음'이라고 쓰인 책 내용은 무엇일까? 어울리지 않는 짝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상대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감정적 불만족 상태에 빠뜨리는 사람들, 술이나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불행하지만 낙관적인 이야기일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사랑은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희망 자체에 의지하고, 사람은 누가 되었든 지속적인 감정의 요구에 바뀐다는 미망에 빠져 대부분 인생을 망친다.

 

아들이 월요일 입대를 해서 집에서 같이 보내도 되지만, 집에서 늘 벌어지는, 아침부터 늘 있는, 늘 나쁜 일로 일찍 밥을 늘 혼자 차려먹고, 학교에 나와서 해야 할 일들을 늘 한 마리씩 처리한다. 서평을 쓰는 일은 읽는 것보다 더 어렵고 늦다. 교과목이 PBL 과목으로 결정이 이루어지고 즉시 작업을 해도 늦어지는 것을 보면 결정 전에 이미 실행해야 되는 것 아닐까? 과거가 메시지, SNS, 이메일을 통해 미래로 보내는 신호를 남자는 제 때 수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왜 기껏 이룬 작은 만족스러운 평화는 순식간에 전쟁으로 치닫는 것일까? 착한 사람은 늘 피해를 봐야 하는 것일까? 착한 것조차 선택적인 문제로 귀결되는 것인가? 예의는 결국 아랫것들이나 차리는 것인가? 규칙은 지켜야 하는 사람만 지키는 것인가? 

 

때론 생각이 든다. 이 엿같은 고통만 주려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건가? 겨우? 십자가에 매달 지도 않고, 100일 동안 굶지도 않고, 지하실에서 3년을 지내지도 않고, 평범하게 지내는 게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세상에 사는 게 너무나 하찮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몰라서 그렇지 실제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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