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행

카르투시오 수도회 회헌 4권

지구빵집 2022. 8. 19.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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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수도회의 통치(De regimine Ordinis)

 

1. 카르투시오회의 이상을 확고히 하고 지속시키기 위하여 우리 수도회의 초기 원장들은 우리들보다 먼저 공동 동의로써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정했다. 즉 총회는 그렁 샤르트르즈에서 열려야 하며, 각 공동체들은 그들 공동체들에서 수정되고 보존되어야 할 모든 사항을 총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과 그들 공동체들 모두를 위해 총회에 순명을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동체들 간에, 그리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함께 진보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수도회의 모든 회원들 간에 존재하는 항구한 사랑의 유대가 강화된다.

 

2. 총회는 2년에 한번씩 개최되며, 원장들과 장상들(the Rectors), 그리고 총당가와 수녀들의 대리자들이 모두 여기에 참석한다. 어떤 공동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거기에 갈 수 없을 경우, 그는 종신서원자 한 사람을 위임해야 한다. 만일 원장이 없는 어떤 공동체가 있다면, 총원장은 그 공동체의 종신서원자 한 사람을 총회에 초대할 수 있다. 총회에 참석한 모든 수도승은 당연히 원장들과 동일한 권리와 직무를 지닌다.

 

3. 원장의 권한을 행사하는 모든 이들과 또한 결정권자들(the Definitors)에 해당하는 수도승들의 모임을 총회(General Assembly)라고 칭하는데, 총원장이 이 회의를 주재한다. 이 회의는 의결위원회(the Definitory)에 유보된 것들은 별도로 하고 수도회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규정권을 지닌다. 총회는 또한 결정권자들이 총회에 제출한 문제들에 관해 자문 투표를 한다. 이 경우 결정권자들 자신들은 투표하지 않는다.

 

4. 총원장이 주재하는 의결위원회는 총원장과 다른 곳에서 논의된 방식으로 선출된 8명의 결정권자들로 구성된다. 총원장을 제외하고, 이전 총회에서 결정권자였던 사람은 아무도 결정권자로 선출될 수 없다. 의결위원회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 매 총회에서 모든 장상들은 총회에 약속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공동 순명에 따라 의결위원회가 자신들의 해임이나 확증에 관해 고려해 주도록 자비를 청한다. 우리의 전통에 따라 원장은 총회가 공동체의 선을 위해 그가 원장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한, 그의 직무를 이행해야 한다. 또한 결정권자들은 교황청에 수도회를 대표하는 총당가를 임명한다.

 

5. 의결위원회는 어떤 규율을 헌장에 첨가하거나 혹은 그로부터 삭제할 수 없다. 또한 수도회에 새로운 전례 본문들을 부과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의결위원회는 어떤 특별한 상황들에서 우리의 회원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칙령들(ordinaces)이나 권고들(admonitions)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만드는데 있어 의결위원회는 총회에 참석한 다른 구성원들의 자문투표를 요청할 수 있다.

 

6. 수도회 전체에 해당하는 다른 모든 문제들을 위해서 의결위원회는 전체 모임에서 토의된 문제들을 제출하고, 이 문제들에 관해 그 모임에서 투표한다. 만일 적합하다고 여겨지면, 의결위원회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재고하여 그에 대해 재차 마지막으로 투표해 주도록 그 모임에 요청할 수 있다.

 

7. 전체 모임(General Assembly)에서나 혹은 의결위원회에서 나온 모든 칙령들(ordinaces)은 만일 차기 총회의 전체 모임에서 확증되지 않는다면 무효화된다.

 

8. 이 헌장의 내용에 반대되거나 또는 카르투시오회의 전통적인 엄격함을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떤 것도 만일 연속되는 두 번의 총회를 통해 승인되지 않는다면 규정되거나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 승인을 위해서는 각 총회에서 적어도 투표자의 2/3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9. 우리 규율의 어떤 사항에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어떤 칙령은 비록 그것이 수도회의 엄격함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투표자의 2/3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공포될 수 없다. 그것은 차기 총회에서 동일한 투표를 통해 추인되어야 한다.

 

10. 총회에서 총원장과 총평의회 구성원들은 새로운 칙령들이 수도회의 엄격함을 거스르는지, 혹은 우리 규율의 어떤 사항에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하는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은 회기 중에 총회에 관하여, 그리고 헌장의 현재 이 장(제31장)과 총회의 거행에 관한 제39장, 그리고 그 모임과 의결위원회에서 따라야 하는 절차들에 대한 해설에 관하여 일어날 수도 있는 어떤 사실 혹은 법률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권한을 지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총평의회의 구성원은 그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11. 공경하올 그렁 샤르트르즈의 원장 신부는 수도회 전체의 총원장이다. 그는 그렁 샤르트르즈 공동체로부터 선출된다. 그러나 이 선출은 아래에 언급된 절차에 따라 남녀 원장들과 장상들(Rectors)의 모임에서 받아들일 때까지 법적인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

 

12. 총원장 선출이 행해질 때, 추인을 위한 법률고문들인 수도회의 남녀 원장들과 책임자들은 선출된 사람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 위해 그렁 샤르트르즈에 모인다. 만일 거부된다면, 그렁 샤르트르즈 공동체는 원할 경우 또다시 선거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위에 언급된 수도회의 남녀 원장들과 장상들의 단체가 두 번째로 선출된 사람을 거부하거나 혹은 그렁 샤르트르즈 공동체가 두 번째 선거에서 그 권리를 포기한다면, 위의 단체가 다른 세 명의 수도승들을 제안하여 그 공동체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총원장으로 선출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선출된 사람은 위의 단체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총원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그 직무를 거절할 수 없다.

 

13. 그렁 샤르트르즈의 원장은 임기 중에 수도회의 선을 위하여 어떤 행위가 요구될 때마다 차기 총회를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면 총회의 권위로 그것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경우들을 위해 총원장은 총평회의로서 알려진 평의회를 갖는다. 이 평의회는 총당가와 총회에서 선출된 종신서원자들로 구성된다. 총평의회를 구성하는 이 수도승들은 그들 자신의 공동체에 거주하며, 그들이 가장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총원장을 통해 조언을 주어야 한다. 만일 사안이 그렇게 요구할 경우에, 그리고 법률상 평의회의 동의가 요구될 때마다 그 구성원들은 그렁 샤르트르즈에 소집된다.

 

14. 총원장의 권위는 모든 결정권자들과 총원장 자신의 동의 하에서가 아니라면 그 외 다른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다. 만일 총회나 총원장에 의해서 그 목적으로 특별히 위임받지 않았다면, 그렁 샤르트르즈의 어떤 수도승도 비록 그들로부터 서한들을 받았다 하더라도 수도회의 일들, 혹은 같은 수도회의 각 개인들이나 공동체들의 일들에 스스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

 

15. 총사목자로서 수도회의 일치를 유지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총원장은 수녀승들에 대해서 통상권을 행사한다.

 

16. 수녀승 공동체들의 영적 진보에 관심을 갖는 총회는 그들에게 수도승들을 시찰관들로 파견한다(제32장 2항). 수녀승들을 위한 신부들을 임명하는 것 또한 총회나 총원장에게 속한다. 그 신부들은 수녀승들의 헌장 제25장에 묘사된 사목적 임무들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대리자(the Vicar)라고 부르는 그들 중 한 사람은 수녀승들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수도승들 공동체의 장상이다.

 

수도회에서 종신서원한지 적어도 5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수녀승들의 대리자가 될 수 없다. 그 대리자는 차기 총회 때까지 임명된다. 그의 직무는 갱신될 수 있지만, 동일한 공동체에서 연속적으로 10년 이상 수행되지 않는다. 대리자직의 구성원들과 관련하여 수녀승들의 헌장 제25장에서 나타나는 규정들은 수도승들의 총회의 사전 승인 없이 변경될 수 없다.

 

17. 의결위원회는 총원장이나 의결위원회 자체를 통해 여자 원장들과의 사전 협의 없이 수녀승들의 시찰관과 그들의 대리자들에 관해 아무것도 결정해서는 안 된다.

 

18. 총원장, 수녀승들의 시찰관, 그리고 각 관구의 주시찰관들은 수녀승들의 총회에 참석한다. 그럼으로써 수녀승들은 그들의 조언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만일 그들 모임에서의 투표가 수도회의 일치나 혹은 기본 규율들을 위태롭게 한다면, 이 모임을 주재하는 총원장이 그 투표를 무효화 할 수 있다.

 

19. 수도회 안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모든 사람은 언제나 교회의 정신과 법을 그에 따라 수도회의 전통들이 이해되어야 하는 최상의 규범으로 간주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수하 사람들이 그들에게 지체 없는 순명을 드러내야 하듯이, 원장들도 총원장과 총회의 칙령들에 겸손하게 복종함으로써, 또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 대한 비판을 피함으로써 자기 수하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황과 우리 수도회의 일치를 보다 잘 촉진하기 위하여 총원장은 6년마다 교황청에 수도회의 삶과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를 보낸다.

 

제32장

 

교회법적 시찰(De Visitationibus)

 

1. 수도회의 공동체들 안에서, 평화와 사랑, 그리고 충실한 규율준수에 대한 절박한 우려를 느낀 총회는 2년마다 각 공동체에 시찰관들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 시찰관들은 이에 대한 수도회의 우려를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일어날 수도 있는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권한들을 부여받아야 한다.

 

2. 매 총회에서, 이 임무에 적합한 원장들이 임명되고 그들의 이름이 문서에 기입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통상적인 권한으로 그들 공동체가 속해 있는 관구내의 수도원들을 방문할 수 있다. 수녀승들을 위한 시찰관 또한 임명되어야 하는데, 그는 그 관구의 주시찰관과 함께 수녀승들의 공동체를 방문할 것이다.

 

3. 그렁 샤르트르즈와 시찰관들의 공동체들은 총회가 위임한 사람들을 통해 통상적인 법규로 시찰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같은 관구의 다른 시찰관의 공동체나 최근에 그 자신의 공동체를 방문했던 어떤 사람의 공동체, 혹은 적어도 10년 동안은 그가 떠나 있던 자신의 서원 공동체를 시찰해서는 안 된다. 총회에서 임명된 시찰관들이 그들에게 위임된 공동체들을 시찰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면, 총원장은 위원들(comminssioners)로 불리는 다른 사람들을 임명한다. 총원장은 또한 그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방법으로 아직 교회법적으로 설립되지 않은 공동체들에 대한 시찰을 준비할 것이다.

 

4. 시찰을 위한 절차는 다른 데서, 즉 제40장에서 언급된다. 공동체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때 시찰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공동체는 총회나 총원장의 권위로 그 권한을 부여받은 시찰관들과 위원들을 신앙의 정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이 직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시찰관들과 수도승들은 상호 신뢰의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능력껏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5. 시찰관들의 주된 임무는 모든 사람을 형제적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가 하느님과 그의 형제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6. 그들은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형제로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유혹 받는 이들과 좌절한 이들이 자유롭게, 그리고 비밀 누설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자기 영혼을 그들에게 개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서 경거망동을 피하고 오히려 조용하게 처리해야 한다.

 

7. 모든 사람은 시찰관들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들 자신의 걱정들이건 공동체의 문제들이건 결정과 조언을 요구하는 문제들은 무엇이든 시찰관들 앞에서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공동선을 위해 건설적인 제안들을 할 수도 있다.

 

8. 어떤 수도승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 대한 우리의 유순함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평화 중에 있는 그는 아무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워하지 않는다. 때때로 입증될 수 없거나 사소한 문제들, 혹은 이미 개선되고 있는 결함들에 관해 논하기보다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9. 개별적으로 각 수도승들과 이야기하는 것 외에, 시찰관들은 또한 공동체 자체를 만나는데, 특별히 시찰의 처음과 마지막 모임에서 만난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시찰이 항구한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 공동체가 영적인 쇄신을 자기 자신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할 것이다.

 

10. 시찰관들은 그 공동체의 정신과 지난 시찰 이래로 이루어진 진전에 대해, 그리고 그 공동체가 직면한 어떤 어려움들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헌장에 설명된 바와 같이, 정규 규율의 문자와 그 정신에 대한 그 공동체 자신의 충실성을 스스로 질문하도록 그 공동체를 격려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 공동체의 계정을 조사할 것이며, 또한 복음적인 가난이 준수되고 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어떤 결함들이나 과도함들에 대한 적합한 개선책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들은 그 공동체가 자신의 소명에 더욱 충실히 응답하도록 돕기 위해 취해질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인지 수도승들과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원장과 함께 주의 깊게 숙고할 것이다.

 

11. 시찰관들은 공동체를 떠나기 전에, 그들이 준 지침들과 그들이 행한 결정들을 문서로 작성할 것이다. 그들은 단순하고 사람들에게 적합한 언어로 그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들은 공동체의 지속적인 진보를 염두에 두고 만일 필요하다며 앞선 시찰 문서에서 이미 지적된 사항들을 상기할 것이다.

 

그들이 취하고자 하는 그 방법들을 먼저 원장에게 알리고 그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종종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찰관들이 그들의 효력을 확증하기 위하여 원장이 자기 공동체에 대한 원장의 사목적인 지향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12. 어떤 사람에 관하여 결정을 하거나 그에게 권고를 주기 전에, 시찰관들은 먼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어떤 수도승에게 충고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할 경우, 면전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중재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 공동체가 문서의 규정들과 그 지향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확신하기 전에 그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 된다.

 

13. 시찰관들로부터 권고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 불평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것이 사랑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믿고, 그들은 모든 것을 사랑과 겸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점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고쳐야 하며, 장차 더 현명해져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탄핵했던 그들이 아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말이나 행동으로 어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원장은 특히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 대해 앙갚음을 하거나 스스로 불쾌함을 보이지 않도록 지극히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다른 이들에게 겸손과 자아쇄신의 모범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14. 매우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 시찰관들은 원장을 직무에서 해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들은 먼저 총원장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들에 의해 해임된 어떤 임원은 총회나 총원장의 허락 없이 같은 직책에 복직될 수 없다.

 

15. 그들의 지시들이 시찰 이후에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시찰관들의 임무의 일부이다. 이 시찰 활동 밖에서, 시찰관들은 그들이 임원들을 해임시킬 수 없고, 긴급한 이유들이 아니라면 그들이 방문했던 공동체들을 방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그들이 시찰 활동 중에 가졌던 것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

 

16. 시찰관들은 또한 총회의 지시들이 그들이 방문했던 공동체들에서 이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책임이 있다. 더욱이 그들은 총원장과 상의할 수 없는 어떤 긴급한 경우에 총회의 권 위를 갖는다.

 

17. 시찰관들은 함께 그들의 결정들을 내린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장애를 받을 경우, 만일 편의상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이 그의 동료와 상의하여 결정할 수 있다.

 

18. 우리 공동체들의 진보는 시찰 결과들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시찰관들은 철저하고 열성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결코 그들 직무의 피상적이고 외적인 수행에 만족하거나 혹은 그것을 단순히 형식의 문제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오직 영혼들의 선익을 추구해야 하며, 시찰이 그들 모두의 마음 안에 평화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라게 하도록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제33장

 

삶의 전향(De conversione vitae)

 

1. 우리 교부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거룩한 삶의 양식이 우리를 보다 높은 길에 들어서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분명한 일탈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장애물과 같은 습관을 통해서 그 길에서 보다 쉽게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이에게 당신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분께 의지해야 하며, 선택된 포도밭이 황폐화되지 않도록 언제나 영적 투쟁에 항구해야 한다.

 

2. 우리 삶의 지속은 법규의 증가나 관례의 수정, 혹은 원장들의 열정에 달려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각 개인의 충실성에 더 달려 있다. 만일 성령에 의해 인도된 우리가 성령의 것들을 맛보지 않는다면, 실제로 장상들의 명령에 순명하고 헌장의 내용을 충실히 준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각 수도승은 새로운 형태의 삶의 시작부터 고독 속에 놓여지고 자기 자신의 계획을 포기한다.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인이다. 그는 온갖 바람에 흔들리며 방황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것을 자발적으로 행해야 한다. 그는 또한 신중하고 지혜롭게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를 누려야 하며, 그에 대해 하느님 면전에서 헴 바쳐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지혜로운 분의 안내에 자기 마음을 개방하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분별력을 상실하거나 혹은 필요한 것보다도 더 느리게 걸어가거나 너무 빨리 지루해지거나 도중에 멈추어 아주 잠에 떨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3. 만일 우리가 생명 자체이시며 동시에 최상의 제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다면, 그리고 삶의 이완과 안락함, 정신산란과 무익한 대화, 헛된 근심들과 하찮은 일들을 허용한다면, 혹은 만일 독방에 있는 수도승이 자기애로부터 일어나는 괴로운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다면, 하느님께 기꺼운 산 재물들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 백성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단순한 마음과 맑은 정신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끊임없이 하느님께 고정하고 힘껏 노력해야 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과 그가 뒤에 남겨 놓은 것들 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천상적 삶에로의 부르심인 그 상급을 얻고자하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4. “그러나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상호 존중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사람들간의 형제적 유대는 결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집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사는 형제들을 사랑으로 환대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다른 그들의 성격들과 기질들을 마음과 정신으로 이해하고자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적개심과 다툼,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에서 유래한다.

 

5. 우리는 평화의 선을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 형제에 관해 악담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공동체 안에서 수도승들 사이에 또는 그들과 원장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그 문제를 시찰관들이나 총원장 혹은 총회에 보고하기 전에 우리는 사랑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인내롭고 겸손하게 찾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도승 공동체 자체 안에 모두의 노력과 동의를 통하여 평화를 보존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원장의 임무는 그 자신을 지배자가 아닌 한 형제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잘못하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고쳐야 한다.

 

6. 우리 수도회의 공동체들 안에서 그 정신은 대부분 원장들을 통해서 쇠퇴하거나 번성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바를 먼저 모범과 실천으로써 선행을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을 통하여 말하기를 원하시지 않는 어떤 것도 감히 말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기도와 침묵, 그리고 독방에 바쳐진 그들은 자기 수도승들을 신뢰하고 그들과 참된 형제적 사랑의 친교를 가져야 한다. 그들은 초기 단계에서 자기 수도승들이 유혹들을 잘 견뎌 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적어도 이 유혹들이 강해져서 후에 그 치료제가 너무 늦게 적용되는 일이 없도록, 독방에서의 형제들의 삶과 그들 영혼의 상태를 친절하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7. 마지막으로, 우리는 오늘날 이 세상의 행위를 본받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 생활의 안락함들을 너무 열심히 추구하고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우리 삶의 조건에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언제나 더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신적 섭리에 의해 우리에게 양도된 자산은 우리가 삶의 쾌락을 추구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만일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쉽다면, 그것은 짐을 지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여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조차 잊으면서 우리의 초기 교부들의 삶의 양식을 함께 나눈다는 점에서 소유물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제34장

 

교회 안에서 우리 수도회의 역할(De Ordinis munere in Ecclesia)

 

1. 은수처의 고독과 침묵이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유익과 신적 환희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오직 그것들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최상의 몫을 선택한 것은 오로지 우리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추어진 삶을 포용하는 우리는 인류 가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전념함으로써 가시적인 것이 불가시적인 것에로, 활동이 관상에로 질서 지워지는 교회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살고있다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그것들 자체 안에 갇히지 않고 전 우주와 그것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포용하기 위하여 개방된다. 모두로부터 떨어져 있는 우리는 모두와 일치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 모두의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연약함이 허락하는 한, 언제나 하느님께 매우 가까이 있고자 하는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은 우리가 특별히 모든 카르투시오회원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친숙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와 우리를 특별한 방법으로 일치시킨다.

 

3. 우리의 서원을 통해 ‘있는 자’이신 그분만을 오롯이 향하면서 우리는 지상적인 것들에 과도하게 빠져버린 세상에 그분만이 유일하신 하느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의 삶은 천상적 기쁨들 가운데 어떤 것이 이미 지상에 현존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장차 우리의 부활의 상태를 미리 보여주며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세상에 대한 마지막 쇄신을 촉구하는 것이다.

 

4. 더 나아가 참회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참여한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부께 기도하시면서, 그리고 그분께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드림으로써 죄의 가혹한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외적인 활동을 삼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매우 높은 단계의 사도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이 가장 깊은 심장부에서 그분을 따르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카르투시오의 은수자회가 그것을 위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설립된 ‘하느님께 대한 찬양’ 안에서 우리는 독방의 평화와 침묵에 전념하고 하느님을 끊임없이 경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 안에 성화된 우리는 성부께서 찾으시는 참된 경배자들이 될 것이다.

 

제35장

 

헌장 자체에 대해서(De ipsis Statutis)

 

1. 이 헌장은 쇄신되고 적용된 형태로 우리 교부들의 삶의 규칙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규칙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계속해서 묵상해야 한다. 그것을 저버리지 말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그것을 사랑하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거기에로 예정하신 성화의 성사이자 동시에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문자에 만족해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헌장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성서의 인도함을 따라 하느님의 길로 나아가고 그분 사랑의 광대함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바로 이 한 가지 만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총원장이나 혹은 다른 어떤 누구라 할지라도 총회와 협의 없이 이 헌장에 표현된 관습들 중 어떤 것이나 성무일도와 관계되는 모든 것에 대해 거기에 어떤 것을 첨가하거나 혹은 그로부터 제거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게다가 회헌(Constitutions)이나 혹은 이 헌장의 제1-4권은 오로지 사도좌의 동의 하에서만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의문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해명이 요구될 경우, 총회나 총원장은 조언을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리고 정규 규율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주어진 그의 해명에 모두가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회헌(Constitutions)에 대한 최종적이고 권위 있는 해석은 사도좌에 유보된다.

 

게다가 총회나 총원장의 허락과 승인 없이 헌장이나 수도회의 전례서들은 어떠한 언어로도 출판되어서는 안 된다.

 

3. 헌장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들은 원장의 결정에 유보된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원장이 결정하는 바가 그들과의 조화를 벗어나지 않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경우이든지 혹은 어떤 다른 경우이든지 간에, 우리는 원장들이 우리 공동체들의 고귀하고 경건한 관습들을 - 비록 이러한 관습들이 결코 헌장에 우세할 수 없다 하더라도 - 너무 쉽게 바꾸기를 바라지 않는다.

 

4. 이 헌장이 잊혀지지 않도록 헌장은 매년 수도승들의 모임에서 읽혀져야 한다. 헌장을 읽는 중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어떤 것이 언급될 경우, 각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시정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시정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만일 잘못을 범한 사람이 원장이라면, 대리자나 혹은 보다 연로하고 현명한 신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공손하고 은밀하게 그를 충고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시정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을 원장에게 알려 그가 그들을 교정하게 할 것이다. 만일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없고 그 문제가 보다 큰 중요성을 지닌 것이라면, 시찰관들이나 혹은 만일 필요하다면, 총원장이나 총회가 개입해야 한다.

 

5. 주님께서는 “만약 네 형제가 너를 거슬러 죄를 짓는다면, 가서 오직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서 그를 꾸짖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매우 큰 겸손과 현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그 자체의 선을 찾지 않는 순수한 사랑에 기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해를 끼치기까지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교정해 주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러나 대부분 원장이나 그 대리자, 혹은 당가에게 우리의 충고들을 맡기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양심과 지각에 따라 우리의 충고들을 전해줄 것이다.

 

6. 원장은 공동체 안에서 헌장이 충실하게 준수되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의 정신은 그들의 가장 깊은 골수까지 스며들어 그가 형제들의 멸망이 아닌 유익함을 위해 이 헌장의 봉사자로 임명받았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문제에 있어 헌장의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알게 해야 한다.

 

7. 수도승들은 마치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처럼 단지 외관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의 단순성 안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책임 있는 사람들로서 헌장에 순종해야 한다. 그들은 합당한 이유 없이 얻은 관면은 무효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원로들과 특별히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행동하는 원장의 권고와 가르침들을 유순하게 듣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때때로 실수하는 인간 존재라면, 그들은 악마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교정하는 데 있어 완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불순종의 나태로 멀어졌던 그분께 순종의 노고로 되돌아가야 한다.

 

8. 우리가 하느님께서 사막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신 모든 은혜들을 관상할 때, 우리는 감추어진 항구의 평화로운 정박지에 도달한 것을 우리의 복된 사부 성 브루노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 그 정박지에서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선의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체험하도록 초대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인 지복과 우리 안에 부어지는 풍부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빛 안에서 성인들의 유산을 함께 나눌 자격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드려야 한다. 아멘.

 

 

[부록]

 

어원적으로 ‘관상’이란 단어는 라틴어 templum(tempus의 축소형)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시간’으로 번역되는 tempus는 “시간의 구분 또는 부분”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갖는다. 로마인들 가운데 templum은 점쟁이들이 하늘이나 땅의 징조를 파악하기 위해서 구별된 별도의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공간에서 구분되어 점쟁이들이 새들의 내장을 조사하는 축성된 공간을 언급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전은 어떤 축성된 사람들이 신적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기 위하여 “사물들(동물들)의 내부를” 보았던 장소였다.

 

관상은 실재의 내면을 실제로 “바라봄”외에 장소를 그렇게 많이 나타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실재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만일 우리가 충분히 깊이 나아간다면 그것들 자체가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들은 오로지 우리가 그것들의 허무를 발견하는 수준에서 우리는 동시에 하나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것들의 기원이자 그들이 거기서 자신들의 신원을 발견하는 토대이다. 그 원천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본다.

 

라틴어 comtemplatio에 부합하는 희랍어는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희랍어 동사 ‘테오레인’(theōrein)에서 파생한 ‘테오리아’(theōria)이다. 어떤 희랍 교부들은 후에 “자연에 대한” 관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theōria를 사용한다. 그들은 가장 높은 형태의 관상,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이고 완전한 인식을 나타내기 위하여 ‘테올로지아’(theologia)란 말을 사용한다. 여기에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일치 체험이 있다.

 

 

[관상기도 역사]

 

동서방 그리스도교에서 관상기도의 역사는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여 짧은 지면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는 단지 몇 가지 주요점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이 말했던 내용의 중요성 때문에 또 관상을 이해하기 위한 본보기들로서 동방 교부들 가운데 중요한 두 인물, 즉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오를 언급할 것이다. 그들은 두 주류를 형성하여 이후 영성사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후대 작가들에게 준 그들의 영향을 보고 관상에 대한 중세와 개혁 이후의 생각을 제시한 다음, 우리 시대의 논의로 맺고자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185-255)는 빛의 신학자이다. 그에 의하면, 모두가 하느님의 형상과 유사성으로 존재했던 애정 어린 관상의 원시 상태가 있었다. 타락은 비록 형상의 상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유사성의 상실이었다. 구속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유사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관상의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되돌아감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각 단계는 점증하는 조명의 운동이다. 이 단계들은 하느님께 그리고 낙원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으로 간주된다. 오리게네스는 이것을 이집트에서 약속된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여정에 비유한다. 첫째, 거기에는 ‘윤리적인 조명’이 있는데, 이는 죄로부터 멀어져 덕들로 돌아서는 운동이다(praxis). 그런 다음 ‘자연에 대한 관상’의 단계(theōria)가 있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창조된 세계를 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자신에 대한 관상’(theologia)이 있는데, 이는 그 기원으로 되돌아감이며 하느님과의 유사성의 회복이다. 이것은 점점 더 큰 빛을 향한 점진적인 운동이다. 오리게네스는 영혼의 어두운 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거나 적어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까빠도치아 교부들 가운데 하나인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는 관상적인 이해에 대한 다른 주류를 대표한다. 그것은 특별히 그의 작품「모세의 생애」에서 잘 나타난다. 거기서 그는 오리게네스가 했던 것처럼 세 가지 단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단계들은 역순으로 되어있다. 즉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모세의 생애」는 이 운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출애굽기 3장의 불타는 덤불 이야기에서 모세의 빛 체험(phōs)이 있다. 그 다음 그의 두 번의 등정이 있는데, 매번 보다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첫 번째는 출애굽기 19장에서 구름의 어둠(nephelē)속으로 나아가는 등정이며, 두 번째는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느님이 미지의 분으로서 체험되는 짙은 어둠(gnophos)속으로의 등정이다.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오에 의해서 대표되는 관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법은 ‘긍정의 길’(kataphatic way)과 ‘부정의 길’(apophatic way)로 알려져 왔다. 전자는 오리게네스에게서 본 바와 같이 ‘빛의 길’이다. 인간은 피조물들 안에서 보이는 모든 완전한 것들을 하느님의 것으로 긍정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모성, 부성, 정의, 진실, 동정에 대한 인간의 체험들은 인간이 창조된 세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실재를 응시할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창문들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들은 제한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결코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실제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니사의 그레고리오가 주장한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또 다른 길, 즉 부정의 길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어떤 개념들이나 생각들, 혹은 어떤 단어들이나 상징들도 하느님의 실재 자체에는 이를 수 없다. 그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혼자 힘으로’ 가야한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모든 개념상의 껍데기를 제거하고 어둠 속으로 혼자서 가야한다. 인간은 정신의 빛을 밝히고 사랑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비록 부정의 길이 어둠의 길이라 할지라도, 관상가들은 때때로 ‘부정의 빛’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전통은 ‘어두운 빛’과 ‘눈부신 어둠’과 같은 역설적인 표현들로 그득하다. 왜냐하면 부정의 길로 이룩한 참된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인식이다. 결과적으로 부정의 길은 종종 ‘알지 못함으로써 아는 것’으로서 언급된다.

 

영성생활의 흥미로운 ‘규칙’가운데 하나는 교부학자 쟝 다니엘루 (Jean Daniélou)가 ‘에펙타시스’(epektasis, 진보)라고 부른 것으로서 이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에 의해서 발전되었지만, 거기에는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실제로 계속되지는 않지만, 결코 노력을 중단하지 않고 완전해지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완전을 향한 부단한 진보는 플라톤적인 ‘정적(靜的) 일치’를 대체한다.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오가 말하는 영적 진보의 세 단계, 곧 정화의 길, 조명의 길, 그리고 일치의 길은 영성 전통 안에서 계속해서 그 고유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게다가 그들이 이 세 단계들에 포함된 등정의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두 가지 상징들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그것들은 곧 ‘산’과 ‘사다리’의 상징들이다. 전자는 후에 단테, 십자가의 성 요한, 토머스 머튼이 사용하였고, 후자는 베텔에서의 야곱의 꿈에 바탕을 두고 있다(창세 28,10-15). 12세기 카르투시오회 원장 귀고 2세(+1188)는 사다리의 상징을 사용했던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귀고는「관상생활에 관한 서한」에서 관상생활을 위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방법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요약하고 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세기를 통해서 무수한 익명의 수도승들의 영성을 살찌워왔다. 귀고의 사다리에는 단지 4개의 계단이 있지만, 그것은 지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구름을 관통하여 천국의 비밀들을 향해 나아가는 놀라운 사다리이다. 귀고는 사다리의 단계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독서(lectio)는 성서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로서 여기서 우리의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 묵상(meditatio)은 성서를 음미하고 이성의 도움으로 거기에 감추어진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기도(oratio)는 우리를 악에서 구하고 우리가 좋은 것을 얻도록 하느님께 청하면서 그분께 마음을 돌리는 의향이다. 관상(comtemplatio)은 그것 자체를 뛰어넘어 영원한 감미로움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식으로 하느님께 마을을 경건하게 들어올리는 것이다.”(PL 40,998)

 

오리게네스와 그리고리오 외에도 중세 영성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약 6세기에 쓰인 익명의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아레오파고의 디오니시오는 이 작품들을 바울로의 아테네에서의 개종 당시의 것으로 돌렸다. 그의 작품「하느님의 이름들」은 하느님의 선으로 시작하여 그분의 불변성으로 끝나면서 하느님의 속성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것은, 비록 우리의 모든 단언들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께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에 대해서 단언하면서 긍정의 접근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교 기도에 대한 그의 마지막 말마디는 부정의 전통을 지지하는 또 다른 작품「신비 신학」에서 나타나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기도와 권고의 말로 시작한다.

 

디오니시오의 작품들은 요한 스코투스(John Scotus Erigena: 810-877경)의 라틴어 번역들을 통하여 9세기에 서방에, 그리고「무지의 구름」을 쓴 익명의 저자의 번역을 통해서 14세기에 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뒤의 작품은 14세기 영국 신비주의의 한 흐름이었다.

 

14세기에는 또한 라인 지역과 네덜란드에서 번성하였던 관상기도의 삶에 관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도미니고회 설교가이자 위대한 사변 신비가였던 마이스터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것들이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어두운 길에 대한 대담한 설교는 ‘하느님의 친구들’이라고 불렸던 추종자들의 평신도 운동 안에서 열매를 맺었다. 역시 도미니꼬회원이자 존경받은 설교가였던 요한 타울러(John Tauler: 1300-1361)와 헨리 수소(Henry Suso: 1295-1365) 또한 ‘하느님의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깊고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설교를 했던 에크하르트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 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영혼 안에는 창조되지 않은 어떤 것, 신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감추어진 어둠이며 절대로 알려지지 않다. 그러나 인간 인격 안에는 그 신적 원천에로 되돌아가도록 운명지어진 신적인 ‘불꽃’이 있다. 그가 죽은 후, 비록 그의 고발자들이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할지라도, 그의 명제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단적인 것으로서 단죄되었다.

 

16세기의 스페인은 관상 기도의 삶에 인상적인 증거를 낳았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1491-1556)는 깊은 관상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영신수련은 그들을 그러한 기도로 형성했던 사람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의도되었다. 그 수련은 이후 영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냐시오의 시대 이후 영신수련의 의미가 종종 잘못 해석되었다는 점은 지적된 사실이다. 이냐시오 영성의 참된 관상적 차원들을 회복하는 일이 20세기의 과제로 주어져 왔다.

 

아빌라의 데레사 (1515-1582)와 십자가의 성 요한 (1542-1591)은 함께 카르멜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각각은 관상생활에 관하여 눈부신 글들을 썼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스콜라 신학으로 잘 훈련되었고 천부적인 서정시인이었다.「카르멜 산의 등정」과 「영혼의 어둔 밤」은 가장 영향력 있는 그의 산문 작품들이다. 이 두 작품은 영적인 등정을 하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탈의 다양한 차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확실히 관상 기도에 있어 부정의(apophatic) 전통에 서 있었다. 공식적인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던 데레사는 기도 중에 그녀가 체험한 바를 적었다. 그녀는 실천적인 여성이자 탁월한 관상가였다. 그녀의「생애」,「영혼의 성」,「완덕의 길」은 긍정의(kataphatic) 전통에 대한 제시에 있어 비할 나위 없다. 카르멜의 이 두 성인들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의 목적은 동일하였는데, 곧 하느님과의 일치였다.

 

몇 가지 예외들과 수도승생활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별개로 하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개혁 이후의 시기는 관상에 있어 불모의 시기이자 부정의 전통을 지지하는데 있어 위기의 시대로 간주되어야 한다. 정적주의(하느님과의 거짓된 신비적 일치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금욕주의와 기도를 거부하였던 한 이단으로서 이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켰다)의 망령이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에 소집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기도하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 그리고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같은 관상가들은 때때로 종교재판소의 분노를 살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수도승 전통 밖에서 관상은 20세기까지 서방 그리스도교의 삶 안에서 별로 강조되어 오지 않았다. 영적인 공허와 제2차 세계대전의 물결 속에서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관상적 삶의 양식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잃고 있다고 느꼈던 영적인 차원을 위해 동양의 종교들에 눈을 돌렸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존재하는 영적인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난 세기에 이 탐구에 있어서 유일한, 하지만 가장 영향력 있던 지도자는 미국 게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던 토머스 머튼 (1915-1968)이다.「관상의 씨」와「칠층산」과 같은 몇몇 그의 초기 작품들은 진정한 관상을 수도승생활로 제한하는 관상에 대한 엘리트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머튼은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수도승들처럼 되도록 노력하라고 초대한다. 그들은 적어도 ‘가면을 쓴 관상가들’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바를 실제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다큐 영화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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