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에 대한 가톨릭 대학교 교수들의 성명
2014년 5월 20일 오후 2:16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느끼는 심회는 더 할 나위 없이 복잡하다. 경악과 공포가 밀려오고, 분노와 좌절이 교차하며, 탄식과 절망이 뒤섞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은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와 하나가 되어 몰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탄식을 쏟아내며 언제까지나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음을 알고 있다. 이제는 따져보아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이다.
참사는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임을 직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근본에서부터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번 참사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터전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이다. 또한 이번 참사는 그동안 소위 산업화라는 명분 하에 앞만 쳐다보고 달려온 한국사회의 감추어진 모든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그 현장의 저변에 첩첩히 누적된 탐욕과 부패의 구도를 직시하고자 한다. 오늘 한국 사회에 떠도는 수많은 편법과 변칙들은 탐욕과 부패의 두 축에서 잉태된 산물들이다. 배금주의와 금권 만능주의, 무자비한 경쟁의 원리와 결과 지상주의, 연고주의와 먹이사슬 커넥션구도, 극단적 이념대립과 파벌주의, 성공신화로 무장된 한탕주의와 싹쓸이 승자 독식주의. 이들 모두는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우리는 이번 세월호 참사가 이와 같은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난 한국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주었음을 직시하고자 한다.
한국사회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미래가 없다. 이대로라면 후손들에게 우리는 사회를 망가트려 놓은 선조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이제는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바뀌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갈등을 부추겨 표를 탐하는 정치가 하루속히 개혁되어야 한다. 관료주의의 병폐에 허우적거리는 무능한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
생산성과 이윤의 극대화라는 명목 하에 인간을 도구화하는 기업경영의 야만성이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교육적 가치를 망각한 채 적자생존의 원리를 내세우기만 하는 작금의 교육이 거듭나야 한다. 진실을 외면한 채 권력과 손을 잡고 자본과 결탁하여 오염된 정보를 양산하는 언론이 바뀌어야 한다. 국정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이념적 대결구도로 몰아가는 국가의 권력기관들이 탈바꿈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참사가 한국 사회의 향후 진로에 대한 준엄한 심판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성하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대책을 요구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이번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심경은 더 없이 착잡하기만 하다. 그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교육자로서 우리 스스로의 소임과 책무에 대한 자성과 성찰이 요구됨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온갖 변칙과 야만이 공존하는 사회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적 안락과 번영에 눈을 돌리고 자기만족에 탐닉해 온 변방의 지식인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학생들에게 진리와 공동의 선을 강조하기보다는 자본과 시장을 위한 유능한 인적 자원이 되도록 종용해오지 않았는지 자성하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준엄하게 요구한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유족들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낱낱이 밝히고 관련자들에게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또한 대통령을 비롯한 국정 최고 책임자들은 본인들의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정으로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한다.
5월 19일 발표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는 뒤늦게라도 책임을 인정하여 다행이지만 원인 규명과 대책에서 근본적인 성찰이 부족하다. 책임을 면하기 위한 졸속대책이 아니라 국민적 공감과 공론화의 토대 위에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공존보다 경쟁을 강조하고 생명과 삶의 질을 가볍게 여기면서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인식과 제도가 참사의 바탕이라는 점을 직시하여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이 희생자와 유족들의 피눈물을 닦아주는 길이며,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귀한 생명들의 죽음을 결코 헛된 죽음이 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가톨릭대학교 교수일동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발표한다.
2014년 5월 20일
가톨릭대학교 교수 일동
강석우, 강정수, 강행봉, 고경희, 김병조, 김석신, 김수경, 김영준, 김용석, 김의진, 김재철, 김종일, 김종해, 김지연, 김진나, 김태선, 김혜영, 남재환, 노연희, 류양선, 박경모, 박기환, 박덕준, 박소령, 박수찬, 박승찬, 박일영, 박정만, 박정호, 박정흠, 박종한, 박주식, 박태근, 박희찬, 방미경, 배주채, 백민정, 백승호, 서병진, 서성기, 서재홍, 서채환, 서효중, 송윤주, 신승환, 심영숙, 안보옥, 안성윤, 양길석, 오재원, 유금란, 유희주, 윤석원, 이두진, 이민영, 이상훈, 이세주, 이순근, 이영자, 이영종, 이영호, 이영희, 이지양, 이창봉, 이창우, 이춘혜, 이택동, 이홍민, 전남일, 전종일, 정남운, 정연태, 정윤경, 정종원, 조돈문, 조병남, 조성호, 조현연, 채웅석, 최동신, 최명걸, 최상호, 최선경, 최선형, 하병학, 한기봉, 한혜경, 홍기돈, 황병연 (8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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