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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수상록, 여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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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남자, 심지어 젊은 남자까지도 여성의 본성을 배워야 하는 이유느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거짓말을 믿으며 자랐습니다. 여성에 대해서, 매력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들이 남자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결코 말하지 않은 잔혹한 진실이 있습니다. 

 

1. 세상은 남자들에게 리더가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2. 여성의 본성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전략적일 뿐입니다. 

3. 그녀는 감정이 먼저고, 논리적인 것은 나중입니다. 

4. 과잉혼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익숙해질 것입니다. 

5. 여성의 본성을 배우는 것은 당신을 위험하게 만듭니다. 차분하고, 냉정하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여성에 대하여

 

1

 

쉴러의 시 <여성의 품위>는, 교묘히 사용한 대구법과 대조법에 의해서 많은 감명을 주지만, 그보다도 더 여성을 찬미하고 있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주이(프랑스의 극작가, 시인)의 다음 몇 마디 말에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여성이 없다면 우리 인생의 초년에는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중년에는 쾌락이 없을 것이고, 만년에는 위안이 없을 것이다." 바이런(영국의 시인)도 이와 같은 것을 희곡 《사르다나팔루스》 제1막 제2장에서 좀 더 감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여인의 가슴에서 비롯되며

 

그대가 처음으로 더듬거리는 말은 그녀가 가르쳤다.

 

그대가 처음으로 흘린 눈물도 그녀가 닦았으며

 

그대의 맨 나중 숨결 또한 여인 곁에서 거두지만

 

이전에 자기를 인도해 준 자의 임종을 지키는 일을

 

남자가 꺼리며 하지 않을 때에는....

 

이 두 편의 시는 모두 여성의 가치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2

 

여성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중노동을 감당할 수 없음은 그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여성은 인생에 대한 빚을 행동이 아니라 고통으로 갚는다. 즉 해산의 고통, 아기의 시중, 남편에 대한 복종으로 갚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 대해 항상 참을성 있고 쾌활한 반려자가 되어야 한다. 지독한 고통과 희열, 그리고 힘쓰는 일 따위는 여성에게 맞지 않다. 오히려 남성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게 평온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남자의 생활보다 더 행복하다든가 불행하다든가 한 것은 아니다.

 

3

 

여성이 우리들 최초의 유년기에 없어서는 안 될 유모나 교사로 적합하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유치하고 어리석고 근시안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큰 아이들이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인 남자와 어린이 사이의 중간 단계이기 때문이다. 소녀가 하루 종일 어린이를 귀여워하며, 어린이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라. 그리고 다음에 한 남자가 그 소녀의 일을 대신한다면 아무리 정성껏 한다고 해도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4

 

자연은 연극 용어로 말하면 이른바 극적 효과라는 면에서 젊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은 그들에게 몇 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한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매력, 풍만의 전부를 아낌없이 부여하여, 그동안에 여자들이 어떤 남자의 환상을 완전히 사로잡아 남자로 하여금 어떤 형태로든지 성실하게 여자의 일생을 돌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남자로 하여금 이런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단지 이성만으로는 충분한 보장을 얻지 못한다. 이리하여 자연은 자기의 모든 창조물들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에게는 그들의 생존을 확보하기에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도 그들이 그러한 장비를 갖출 필요가 있는 동안에 한해서이다. 이 경우에도 자연은 보통 사용자로서의 계산을 잊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암거미가 교미를 한 후에는 이제 쓸모없게 된, 아니 실제로 장차 새끼들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그의 날개를 잃어버리는 것과 똑같이, 여자도 대개는 아이를 하나 둘 낳은 뒤에는 자기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마는데, 아마도 이것은 암거미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따라서 젊은 여자들은 가사나 직업적인 일은 한갓 난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들의 진지한 관심을 끄는 일은 사랑과 정복과 이에 관련된 모든 것, 예를 들면 화장이나 춤 따위이다.

 

5

 

어떤 사물이 고상하고 완전한 것일수록 성숙은 늦고 더디다. 남성은 스물여덟 살 이전에 이성과 정신력이 완전히 성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은 열여덟 살만 되면 완전히 성숙해버린다. 여성의 이성이 극히 협애(狹隘, 좁고 막히다, 또는 생각이나 시야가 좁다) 한 것을 면치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여성은 한평생 어린이로 머물러 언제나 눈앞의 것만을 보고 현재에 집착하여 피상적인 현상을 실제로 여기며, 가장 중요한 일보다 하찮은 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단지 현재 속에서만 사는 짐승과는 달리 과거와 미래를 전망하고 숙고할 줄 아는 것은 그의 이성 능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 특유의 근심 걱정이 일어나고 가끔 번민마저 생기는 것이다. 여성은 이성이 빈약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한 이해관계는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적다. 오히려 여성은 정신적 근시이기 때문에 직관적 오성(悟性)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날카롭게 보지만 시야가 좁은 탓으로 먼 곳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따라서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남성의 경우보다 훨씬 약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여성이 훨씬 낭비벽이 심하며 가끔 미친 듯이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은 돈을 버는 것은 남성이 할 일이요, 될 수 있다면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렇지 않으면 죽은 후에 이것을 탕진해 버리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남편이 살림을 위하여 그가 번 것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것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한다. 이 모든 것이 비록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현재에 몰두하는 정도가 남자보다 크며, 만약 현재가 허락만 되면 여성은 그것을 훨씬 멋지게 즐길 줄 안다. 이것으로 하여 여성 특유의 명랑성이 생기고 이것이 고생하는 남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필요에 따라서는 때때로 유력한 위로자가 되기도 한다.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고대 게르만인의 풍습에 따라 부인에게 상의하는 것은 조금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을 보는 여성의 눈은 우리 남자의 눈과는 전혀 다르며 그들은 자기의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을 취하기 좋아하고 대체로 자기들의 몸 가까이에 있는 것에 눈길을 고정시키는 데 능숙한 반면, 우리는 그것이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보지 못하며 그것을 넘어서 멀리 내다보는 게 보통이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 남성들은 가깝고 단순한 견해를 다시 얻기 위하여 올바른 데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성은 무엇을 판단할 때 우리보다는 결정적으로 냉정하기 때문에, 실제로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사물을 관찰하는 일이 없다. 이에 반해서 우리 남성은 정열이 고조되면 사물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공상적인 것을 덧붙이는 일이 흔히 있다.

 

여성의 분별력이 약하다는 것은 여자는 불행한 자에게 동정을 표시하며 그들을 인간적인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대한다는 것, 반대로 그들은 남자에 비해서 정의, 정직, 성실 면세서 열등하다는 것에 잘 나타나있다.

 

왜냐하면 여성은 분별력이 약하기 때문에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것, 구체적인 사물에 좌우되지만, 반대로 사고의 추상적 원리나 확고부동한 행동법칙, 굳은 결의에 의하여 움직이는 일이 없고 일반적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해 고려한다든지 눈앞에 없는 먼 곳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덕성을 기르는 데 제1차적인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이것에 필요한 수단인 제2차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수가 많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여성은 간장은 있지만 쓸개가 없는 생물에 비할 수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의 논문 <도덕의 근거>를 참조해 주기 바란다. 따라서 여성의 성격이 갖는 근본적인 결함은 '부정(不正)'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결함은 우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성(분별)과 숙고의 부족에서 생기며 게다가 여자가 보다 약한 자로서 힘 대신에 무엇보다도 술책에 의지하도록 규정되어 있음으로써 더욱 심하다. 여성이 본능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고칠 수 없을 만큼 거짓말을 잘하는 점도 여기에 기인한다. 즉 자연은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을, 코끼리와 멧돼지에게 앞니를, 황소에게 뿔을, 오징어에게 먹물을 무었듯이, 여성에게는 자기 방어를 위한 위장술을 주었다. 자연은 남성에게 체력과 이성이라는 형태로 모든 힘을 주었고, 여성에게는 천부적으로 이런 기만술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속인다는 것은 여성의 천성이며, 우둔한 여성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영리한 여성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이 기회 있는 대로 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동물들이 공격할 때 즉시 그 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의 권리 행사하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허위를 일삼지 않는 여성이란 아마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은 다른 사람의 거짓을 쉽사리 간파한다. 여성 앞에서는 거짓말을 해도 별로 효과가 없다. 위에서 열거한 근본적 결함과 그것에 붙어 다니는 결점에서 거짓, 부정(不貞), 배신, 배은(背恩) 등이 생기는 것이다. 법정에서 위증을 하는 것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다. 여성에게 증언을 하게 한다는 것부터가 생각해 볼 문제다. 가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숙녀들이 상점에서 남몰래 물건을 훔쳐 가지고 도망가는 것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6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남성은 인류의 번식을 위해 진력하도록 자연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다. 이래서 종족은 퇴화하는 것을 면한다. 이것은 자연의 뇌고(牢固 의지나 요새 따위가 튼튼하고 굳세다)한 의지이며, 이 의지의 표현이 여성의 정열이다. 이 법칙은 강력하고 옛날부터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법칙에 우선한다. 이 법칙에 도전하는 주장이나 관심을 표하는 자에게는 재난이 있을 뿐이다. 그가 떠들고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시로 무자비하게 분쇄되고 만다. 왜냐하면 여성의 선천적인 윤리는 그것이 비록 공식화되지 않았을지라도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체인 우리들에게 얼마 안 되는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것으로, 종족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신할 권리를 갖고 있다. 종족의 성격과 행복도 우리로부터 나오는 다음 세대를 매개로 하여 우리 수중에 놓여 있다. 우리들은 그것을 양심적으로 관리해 가도록 하자."

 

그러나 여성은 이 최고의 원칙을 추상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기회가 왔을 때 이 원칙에 따라 스스로 행동함으로써 표현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표현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들의 양심은 그런 일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태연스럽게 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 개인에 대한 의무에 손상을 끼쳤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기들은 개인의 권리보다는 무한히 위대한 종족에 대한 의무에 그만큼 더 충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각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제44절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궁극적으로 여성은 오직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여성의 천분(天分 하늘이 나누어 준 것 또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품이나 재능)은 이 속에서만 전개되므로 여성은 대체로 개인보다는 종족을 위하여 살고 있으며, 마음속으로는 개인적인 사건보다는 종족에 관한 사건을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그들이 존재한 모든 행동에 경박함 및 일반적인 남성의 방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침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박함과 방침의 차이로 해서 결혼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화가 예사롭게 일어나는 것이다.

 

7

 

남성들은 날 때부터 서로 무관심하게 지낼 수 있지만, 여성은 날 때부터 적의를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이른바 동업자 간의 시샘이 각기 그들이 소속한 동업조합에 한정되어 있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전 여성이 오직 한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시샘은 전 여성을 포괄한다. 길가에서 만났을 때도 남자들은 마치 겔프 당과 기벨린 당처럼 서로 적대시한다. 역시 두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도 두 남자의 경우보다는 훨씬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두 여자 사이에 나누는 인사는 두 남자 간의 인사보다도 훨씬 우스꽝스럽다. 또 남성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대할 때라도 항상 어느 정도의 겸손과 인정미를 갖고 이야기하지만, 귀부인이 보통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그렇다고 자기의 하녀도 아닌) 여자에게 거만하고 매정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꼴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여자에게 있어서 계급의 차이는 남자들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훨씬 변하거나 소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들의 운명에는 수없이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데 반해서 여자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즉 어떤 남자의 마음에 드느냐 하는 것만으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모두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어, 남자들보다는 여성끼리 훨씬 많이 접촉하기 때문에 오직 지위에 의한 차별만이라도 두려고 하는 것이 또한 이유가 될 것이다.

 

겔프(Guelphs) 당과 기벨린(Ghibelines) 당 중세 이탈리아 있었던 2대 정당으로 전자는 교황을, 후자는 황제를 옹호하였고, 서로 적대시했기 때문에 각 도시를 전란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다. 단테는 이 정쟁(政爭)에 휘말려 피렌체 시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런 역경 속에서 《신곡》을 지었다.

 

8

 

키가 작고 어깨가 좁고 엉덩이가 넓고 다리가 짧은, 이 여자라는 족속을 아름다운 성이라고 일컫는 것은 성욕으로 말미암아 지성이 흐려진 남자뿐이다. 왜냐하면 여성의 아름다움은 모두 이러한 성욕 충동으로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아름다운 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비미학적'인 성이라 부르는 편이 훨씬 적당할 것이다. 음악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조형 미술에 대해서도 여자는 어떤 감각이나 감수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설령 그들이 아는 척하는 태도를 보일 때도 그것은 남성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함이며, 단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순 객관적인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데서 기인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남성은 모든 경우에 사물을 직접 ㅡ 이해하거나 극복함으로써 ㅡ 지배하려고 하지만, 여성은 언제 어디서나 단지 간접적으로, 즉 남자를 통하여 지배하도록 되어 있다. 단지 아내는 남편만을 직접 지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만 남자를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여자의 천성이며,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여자의 관심은 한갓 가장(假裝)이요, 농간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미태(媚態 아름다운 자태, 아양을 부리는 태도)와 모방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루소도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어떠한 예술에 대해서도 사랑과 이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게다가 그들은 어떤 천재성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 p. 20

 

이 말을 피상적으로 보아 넘기지 않고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면 의미를 알아차릴 것이다. 음악회나 오페라 극장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위대한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전개되고 있는 중인데도 여자들이 어린애처럼 재잘재잘 지껄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인은 여자를 극장에 입장시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옳은 일을 한 셈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극장에서 적어도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여자들은 교회에서 침묵을 지키라"(《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4장 34절)는 구절에다 "여자들은 극장에서 침묵을 지키라"는 구절을 덧붙이든가, 아니면 바꾸든가 하여 이것을 큰 글씨로 무대의 막에다 붙여두는 것이 지당한 처사일 것이다.

 

그리고 전체 여성 가운데서 아무리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도 미술에 관해서는 참으로 위대하고 순수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었거나, 일반적으로 불멸의 가치를 지닌 어떤 작품도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여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은 회화(繪畵)이며, 이 회화의 기술은 여성이 적어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여성들도 열심히 그림 공부를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점의 명화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그림 그리는 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정신의 객관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경우에 여자들은 주관적인 것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여자들에게는 전혀 회화에 대한 감수성마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비약하지 않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아르테(스페인의 의사, 저술가)도 유명한 그의 저서 《학문을 하기 위한 독창적 시도(Examen de ingenios para las scienzias)》에서 여자들에게 고도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개개의 부분적인 몇 가지 예외가 있다고 해서 결코 변할 수는 없다. 전반적으로 여자들은 철두철미하게 구제하기 어려운 속물들이요, 또한 언제까지나 속물에 머무른다. 따라서 여자들이 남편의 신분과 명예를 공유한다는 극히 불합리한 사회기구하에서 여자들은 그들 남편의 야비한 명예욕에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 나아가서 여자들이 이러한 특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여자들이 지휘하고 조종하는 곳에 현대 사회의 부패가 생긴다. "여자에게는 계급이 없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은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 정당한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그들의 다른 성질의 관해서는 샹포르(프랑스의 작가, 모럴리스트)의 다음과 같은 적절한 표현이 있다.

 

여성은 우리 자신의 약점과 우리의 어리석음과 거래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우리의 이성과 거래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단독 표면적인 공감이 존재할 뿐이며, 정신, 영혼, 성격에 대한 공감은 극히 드물다.

 

-샹포르, 《잠언과 사색》 제2장

 

여자들은 이른바 열등한 성(Sexus Sequior)이며 모든 점에서 남성에 뒤떨어지는 제2의 성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약점은 관대하게 봐주어야 하지만, 그들에게 지나친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눈앞에서 자신을 비굴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연이 인간을 둘로 나누었을 때 그는 한가운데에다 선을 긋지는 않았다. 이렇게 갈라진 양극의 한쪽은 적극적이고 또 한쪽은 부정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들 간의 차이는 질에 있어서뿐 아니라 양에 있어서도 존재한다. 이것이 고대인들의 여성관이요, 동양인의 여성관이기도 한데, 여자의 특수한 지위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우리 전성기의 여자에게 친절히 해야 한다는 낡아빠진 프랑스적인 관념과, 게르만적 그리스도교의 우둔이 빚어낸 최고의 산물인 어리석은 여성 숭배 관념에 대한 우리의 판단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관념들은 여성들을 더욱 안하무인으로 만들어주고 거만하게 할 뿐이어서, 자기들이야말로 신성불가침이라는 의식하에서 자기들 멋대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베나레스(인도에 있는 힌두교의 성스러운 도시)의 성스러운 원숭이를 연상케 한다.

 

서양 여자, 특히 이른바 '숙녀'는 자기들의 지위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에 의하여 '열등한 성'이라고 옳게 불려진 여자는 남성의 외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남성보다 우쭐하고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잘못 부여한 지위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싫도록 보아왔다. 따라서 유럽에도 인간이 사용하는 이 제2라는 숫자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지금 전 아시아인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조롱을 받아왔을, 당치 않은 여성 숭배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하여 우리의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인 제 관점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점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리족의 법전도 자명한 이치로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 숙녀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의 주부든가 아니면 주부를 희망하는 처녀들이어야만 하며, 그들이 결코 오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알뜰하고 순종하도록 길러야 한다. 이런 귀부인들 때문에 유럽에서는 여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낮은 계급의 여성들이 동양에서보다도 훨씬 불행한 것이다. 바이런 경(卿)까지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생각은 매우 적절하다. 기사도와 봉건 시대의 야만적 유물인 현재의 상태는 인위적이고 비자연적이다. 여자들은 가정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입을 필요는 있으나, 역시 결코 사교계에 나가서는 안 된다. 역시 종교 교육을 잘 받아야 하지만, 시나 정치서적을 읽을 필요는 없고 오직 믿음과 요리에 관한 책을 읽고 있으면 된다. 음악, 회화, 무용, 그리고 이따금 약간의 정원 가꾸기와 밭갈이 정도면 족하다. 나는 그리스의 에피루스에서 여자들이 훌륭하게 길을 고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래서 건초를 만들거나 젖을 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일을 시켜서 안 될 이유가 과연 있는가?"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장 우아테르는 그의 저서 《제과학을 배우는 능력에 관한 연구》(1603년) 서론 p.6에서 "여자가 두뇌 속에 갖고 있는 자연적인 기능은 모든 정신적 작업에 적합하지 않고 많은 과학적 연구에도 적합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또 제15장 p.383에서는 "여자가 자연적 소질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떤 종류의 문학이나 과학도 그 정신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라고 했고 제15장 pp.397~398에서는 "저자는 ㅡ 그 본성의 고유한 냉담과 습도 때문에 ㅡ 심오한 정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겉으로만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 알고 있는 하찮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라고 썼다.

 

열등한 성(Sexus Sequior) 라틴 문학의 대표 작가인 아풀레이우스의 《메타모르포세스》 제7권 제8장에 나오는 말.

 

살리(Salii)족 프랑켄족의 한 지족(支族)이며, 고대 로마 마르스 신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그들의 법은 여자의 토지 상속권,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있다. 이 법은 프랑스 및 스페인에서 행해졌다.

 

9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는 혼인법에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다. 즉 이 법은 어떤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하는 우리 유럽 지구에서 결혼한다는 것은 결국 한 남성의 권리는 줄고, 그의 의무는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법률이 여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었을 때, 마땅히 여자에게 남자의 이성(理性)도 동시에 부여했어야 할 덧이다. 그러나 법률이 여자에게 인정한 권리와 명예가 자연적 상태를 초과하면 초과할수록 실제로 이 특전을 누리게 되는 여자의 수는 그만큼 줄어든다. 그리하여 모든 다른 여자들은 자기 몫을 초과하는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만큼 그들의 자연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부일처제와 이에 따르는 혼인법은 여자를 철두철미하게 남자와 동등하게 생각함으로써 여자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부당한 것이어서 현명하고 신중한 남자들이 그처럼 큰 희생을 치르면서 그와 같이 부당한 계약을 망설이는 현상이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모든 여자가 하나도 빠짐없이 부양받고 있는 데 반하여,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결혼한 여자의 수가 제한되어 있어 부양자가 없는 무수한 여자가 남게 되는데, 그들 중 상류계급에 속하는 여자들은 아무 쓸모없는 노처녀로 무위도식하게 되고 하층계급에 속하는 여자들은 적당치 못한 중노동을 하거나 매춘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들 매춘부는 전혀 기쁨도 명예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남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은 이미 남편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가질 희망이 있는 팔자 좋은 여자들을 남자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특수한 목적을 지닌 공인된 계급으로 등장한다. 런던에만도 이런 여자들이 8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여자들은 일부일처제하에서 가장 무서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며, 실제로 이 여자들이야말로 일부일처제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서 말한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여자들은 허식과 거만에 찬 유럽에 숙녀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상쇄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일부일처제 쪽이 실제로 여자에게는 유익하다. 다른 면에서 볼 때도, 고질병으로 고생하든가 아이를 낳지 못하든가 자기에 비해서 점점 늙어가소 있는 아내를 가진 남자가 두 번째 아내를 얻어서는 안 된다는 정당한 이유도 없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몬교로 개종하게 된 동기는 바로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부일처제를 폐지한 데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여자에게 부자연스러운 권리를 부여한 것은 결국 그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의무를 부과하게 되었고, 이 의무를 이행치 않는 일이 반대로 여자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남자는 자기의 지위나 재산을 고려하여 결혼을 ㅡ 어떤 좋은 조건이 따르지 않는 한 ㅡ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자기 자신이 선택한 여자와 곧이어 태어날 아이들의 운명을 확보하기 위하여 결혼 이외의 조건하에서 여자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합리적이며, 적합하고 사태에 맞는 것일지라도 일단 여자가 적당한 혼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분에 넘치는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남자의 내연 관계의 조건에 동의한다면 정신적인 부부관계란 어디까지나 시민 사회의 기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은 남들의 모순된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는 이상, 그 여자는 평생을 그늘에서 불행하게 살아야만 할 것이다. 반대로 그 여자가 남자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자기가 싫어하는 남자와 결혼하든가 아니면 노처녀로서 멋없는 일생을 보내든가 하는 모험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여자의 결혼 적령기는 극히 짧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일처제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서는 토마지우스(독일의 법학자, 철학자)의 심오한 연구 논문 <첩을 얻는 데 대하여>가 읽을 만하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에는 어느 문화, 어느 족,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축첩이 허용되었다는 것, 아니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법적으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불명예로 취급되지 은 제도였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축첩을 이 단계에서 끌어내린 것은 오직 루터의 종교개혁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축첩 금지는 성직자의 결혼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종교개혁은 내연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가톨릭 교회도 이 문제에 대해서 루터 교회에 뒤떨어진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부다처제의 시비에 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지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있다. 그러면 도대체 진정한 일부일처주의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적어도 어느 기간은 일부다처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느 남자든 많은 여자를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많은 여자를 돌보는 것은 남자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이 이상 더 올바른 이론은 없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종속적 존재로서의 본래의 자연적인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유럽 문명과 게르만적 그리스도교의 우둔이 낳은 괴물이며, 우습게도 존경과 숭배를 요구하는 숙녀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며, 오직 본래 의미의 여자를 만나게 된다. 게다가 오늘날 유럽에 충만하고 있는 불행한 여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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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는 모든 경우에 여자의 독립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누 법전》 제5장 제148절에 따라 여자는 아버지나 남편이나 오빠나 아들의 감독을 받고 있다. 물론 과부를 망부(亡父)의 시체와 함께 분사(焚死 불에 타서 죽는 것 )하는 것은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지만, 남편이 자식들을 위해서 한평생 애써 모은 재산을 남편이 죽은 뒤 과부가 정부(情夫)와 더불어 탕진하는 것도 역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다. 따라서 "중용(中庸)을 지키는 자는 행복하다(medium tenuere beati)"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식에 대한 원시적인 모성애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있어서도 순전히 본능적인 것이며, 따라서 자식들을 육체적으로 원조할 필요가 없을 때 모성애는 소멸한다. 그 후로는 원시적인 모성애를 대신하여 습관과 이성에 바탕을 둔 어머니의 사랑이 나타나야 하는데, 특히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에는 종종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는 종류가 다른 것으로 훨씬 지구적(持久的 오래 지탱함)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식 속에 자신의 내적 자아를 재인식하므로 부성애는 그 근원을 형이상학적인 데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현대를 막론한 거의 모든 민족, 심지어는 호텐토트인들 사이에서까지도 재산은 남계(男系) 자손에게만 상속되며, 오직 유럽에서만 예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귀족은 별도이다.

 

남자들이 오랫동안 피땀 흘려 애써 모은 재산도 여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그들의 무지로 인하여 단시일에 탕진되거나 아니면 낭비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극히 부당한 일이다. 이런 사태는 여자의 상속권을 제한함으로써 예방되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과부든 딸이든 간에 남자 후계자가 하나도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여자는 재산을 저당 잡혀 거기서 나오는 이자만을 받아 생계에 쓰게 하고, 결코 부동산 자체나 자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 것 같다. 돈을 취득하는 사람은 남자이지 결코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자가 재산을 관리할 자격은 없으며, 또한 재산을 무조건 소유할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속 재산, 즉 자본, 토지, 건물 따위를 결코 임의로 처분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후견인이 필요하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과부에게 자기 아이들의 후견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여자들의 허영심은 가령 그것이 남자들의 허영심보다 크지 않을 경우에도 전혀 물질적인 사물, 즉 자기 일신을 아름답게 꾸민 다음에는 부화(浮華 (1)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함. (2)남녀 관계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건전하지 못함), 사치, 장려와 같은 면에 열중하는 악벽(惡癖)이 있으며, 따라서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사교계이다. 이 허영심은 특히 그들의 분별력이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들을 낭비로 흐르게 한다. 어떤 고대인은 "여자는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낭비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브룬크, 《그리스 시의 격언집》 제115절)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남자들의 허영심은 대체로 지성이니 교육이니 용기니 하는 비물질적인 장점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제2권 제9절에서 스파르타인의 경우, 그들이 여자에게 상속권과 지참금 등, 지나치게 많은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여자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허용한 결과 초래된 막대한 손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또 이러한 양보가 스파르타의 몰락을 얼마나 촉진시켰는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루이 13세 이래 끊임없이 증대해 온 여자의 세력이 궁정과 정부를 서서히 부패시켰으며, 나아가서는 최초의 혁명(1789년)을 초래하였고, 그 결과 온갖 정변(政變)이 계속해서 일어난 데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간에 오늘날 여자가 차지하고 있는 이미 '숙녀'라는 존재에 의하여 가장 명백한 징조가 보이듯이 이 여자의 모순된 지위야말로 유럽 사회의 근본적인 결함의 하나로 되어 있고, 그 문제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결함이 다방면으로 불리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천성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여자라도 만약 완전한 독립을 누리는, 천성에 위배되는 지위에 있게 되면 즉시 어떤 남자와 결합하여 자기를 인도하고 지배해 주기를 스스로 허락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자명하다. 왜냐하면 여자는 언제나 주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때 여자가 젊으면 주인은 애인이 되며, 늙은 여자면 주인은 고해 신부가 되는 것이다.

 

호텐토트인 호텐토트인(남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장남에게 상속되든지 아니면 동일 가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에게 상속된다. 재산은 절대로 분할되지 않으며, 여자에게는 상속되지 않는다. ㅡ 르로와, 《인간 및 동물의 지성과 능력에 대한 철학적 문헌》(1802),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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