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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민주화: 왜? 그리고 어떻게?" - 김환석(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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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민주화: 왜? 그리고 어떻게?" - 김환석(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2002/05/13


1. 과학기술과 위험사회



과학기술의 시대라고들 말을 한다.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둘러보면 과학기술의 산물 아닌 것이 거의 없고 어느덧 우리의 삶은 과학기술과 얽혀서 혹은 그것에 중독되어서 살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전기와 수도, 가스 없는 도시생활은 이제 생각하기도 힘들다. 버스나 지하철, 자동차가 없이 일터나 학교로 갈 수 있는가? 사무를 보려면 전화, 팩스와 컴퓨터 등은 필수품이 되었다. 또 여가생활 역시 TV와 비디오, 카세트, 영화 등에 지배되고 있다. 국제화에 따라 비행기가 업무와 여가의 핵심적 수단이 된 지 이미 오래다. 한마디로 우리의 의 식 주 모두가 과학기술로 구성되거나 매개되고 있고, 21세기가 되면 이런 추세는 아마 더욱 가속화되면 되었지 약화되지는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그런데 이렇듯 기술문명이 발전할수록 물질적인 풍요는 늘어날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점점 불안하고 위태롭고 피폐해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해 일어났던 괌 비행기사고가 그 단적인 예다. 무심코 떠난 해외여행에서 226명이 예기치 못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뿐인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과 대구 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 등 믿었던 공학적 시설에서의 대형 사고는 이미 많은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이와 더불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교통사고와 환경오염, 지하철 안전사고, 식품 및 약품의 위해성, 핵발전소 누출과 화학공장의 폭발 위험, 유전공학에 의한 생명조작 등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먼 과거에는 자연환경이 우리 삶에 불안과 위험을 주는 원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느덧 기술환경이 이를 대체하였다. 생태위기, 안전위기, 윤리위기 등 기술문명이 수반하는 희생은 이제 그것이 가져온 풍요의 가치를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대화가 초래한 이러한 사회구조의 딜레마에 대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위험사회>라는 저서에서 잘 밝혀주고 있다. 


문제는 사회의 다수 구성원인 시민들은 이러한 사회구조가 과연 '정당성'을 갖는 것인지, 그것을 수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번도 의사결정을 내릴 기회를 못가졌다는 사실이다. 현재와 같은 모습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해서는 정부 기업 과학기술 부문의 이른바 엘리트와 전문가들만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선택할 기회가 부여되어 왔다. 시민은 단지 이들이 결정한 정책의 홍보 대상이거나 과학기술 산물의 수동적 소비자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핵에너지정책, 정보화정책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핵에너지에의 의존과 정보기술의 범람이 가져올 환경적, 사회정치적, 윤리적 결과들에 대한 깊은 인식과 사회적 토론은 결여된 채, 효율성을 앞세운 기술관료적 의사결정만이 선진국이 되는 지름길인 것처럼 언론 등을 통해 홍보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위배되는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우리는 삶을 지배하는 다른 힘들(법, 정치, 언론 등등)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자각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려고 하는데 반해, 어느덧 그런 지배력이 된 과학기술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자각조차 못하거나 그게 우리의 통제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렇다면 사실상 우리는 지구환경 위기에서 보듯 인류와 자연을 절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기술문명의 형성에 아무런 의사표현도 영향력 행사도 못한 채 그냥 엘리트에게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맡기는 객체에 불과한 처지가 아닌가? 


과학기술에 대한 의사결정에 시민의 참여기회가 박탈되면 복지, 환경, 안전, 윤리 등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민의 가치관과 이해는 반영되지 못하고, 이윤과 군사력에 봉사하는 과학기술이 기존 사회구조에 의해 확대재생산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최근 서구에서는 점점 기술화되어가는 사회의 이런 위험과 문제점을 자각하고 기존의 시민권 개념을 과학기술 영역에 확대한 '기술적 시민권'(technological citizenship)에 대하여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시민권의 확보는 엘리트에 의한 통제로부터 시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과정을 변화시켜, 결국 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기술의 발전경로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과학기술에서의 참여민주주의 확보는 또한 정책의 투명성과 정당성을 높여 잘못된 과학기술투자로 인한 엄청난 환경적 비용 및 사회적 갈등의 최소화를 기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위험사회'의 내부에서 과학기술과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성을 제도화하여 보다 안전하고 인간적인 미래를 열어가게 하는 토대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2.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과학기술




시민참여를 통한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와 재구성 혹은 한마디로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과 초사회적 자율성을 신봉하는 기존의 지배적 과학기술관, 즉 과학주의(scientism) 및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은 보편합리적이라기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참여민주주의가 과학기술의 내용에 특정한 연관을 갖거나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기존의 지배적 과학기술관을 거부하는 새로운 관점과 이론들이 다양하게 나타나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한 이론적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네오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의 급진적 정치이론들과 더불어 과학지식사회학, 기술철학, 기술사, 기술정치학, 기술사회학, 그리고 최근의 과학기술인류학까지 다양한 학문적 접근들이 과학기술 민주화의 이론적 자양이 되고 있다. 이들 각각은 지배적 과학기술관을 거부하고 과학기술의 사회성을 주장한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그 기원이나 특징, 지향점 등에서는 쉽게 합치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즉 과학기술의 민주화로 들어가는 이론적 창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열려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중 주로 사회학적 이론에 초점을 두어 과학기술 민주화의 이론적 논거를 구하고자 한다. 


1930년대부터 과학 발전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개척하여 1960년대에 이르러 과학사회학을 최초로 학문적·제도적으로 정립한 이는 미국의 기능주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 K. Merton)이었다. 그는 과학을 합리적인 규범이 지배하는 과학자공동체의 산물로 파악하였다. 과학자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네 가지 기본규범으로서 그는 보편주의, 공유주의, 조직적 회의주의, 무사무욕을 들고 이러한 규범의 준수가 사회적 이해관계의 개입을 차단하여 객관적인 과학지식의 생산을 보장해 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과학지식의 내용 자체는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이 안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머튼의 과학사회학은 엄밀히 말해서 '과학자'의 사회학이었지 '과학지식'의 사회학은 아니었다고 종종 지적된다.). 


사실 지식이나 사상 일반이 그렇듯이 이러한 과학사회학 이론이 호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2차대전 후 1960년대초까지는 서구가 장기호황을 누리면서 과학과 사회진보에 대해 낙관론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2차대전중 맨해턴프로젝트의 성공은 전후 서구 과학정책의 모태가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이는 미국의 과학자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가 제안한 국가와 과학자공동체간의 일종의 사회계약과 그 결실인 미 국립과학재단(NSF)이 모델이 되었다. 이 사회계약에 의하면 국가는 과학에 대해 지원하고 과학은 당연히 기술진보로서 국가에 기여(보건, 복지, 국방 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렇게 될 수 있으려면 과학에 대한 관리는 철저히 과학자공동체의 자율적 내부통제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낙관론이 지배하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러한 모델은 국가와 과학자공동체 그리고 일반사회에 의해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과학과 과학정책은 이후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과학에 대한 낙관론은 서구사회에서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산업화과정에서 누적된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한 우려,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저항운동과 거기서 사용된 대량 살상무기에 대한 반대 등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과학기술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대중과 지식인, 학생 사이에 팽배해 갔다. 이들에게 과학기술은 합리적인 것이기는 커녕 억압적인 국가권력과 자본의 손에 쥐어진 지배수단으로 인식되었다. 현대 과학기술의 근본적 가치를 문제삼는 '반과학기술운동'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분석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학계로부터도 생겨났다.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서 60년대 말부터 대학의 학제적인 새로운 교과과정으로서 다양한 '과학기술과 사회'(STS) 프로그램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속속 생겨났던 것이다. 이같은 대학의 제도적 변화는 과학기술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점들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었다. 


마침내 70년대 중반에 이르자 머튼의 기능주의적 과학사회학은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의 과학사회학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론이 대두되었다. 영국 에딘버러대학의 반스(B. Barnes)와 블로어(D. Bloor) 등은 토마스 쿤의 저서 セ과학혁명의 구조ソ로 대표되는 과학철학의 상대주의에 영향을 받아, 기존의 사회학적 전통과는 달리 과학지식의 형성도 사회적 요인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지식사회학의 '강한 프로그램'을 제창하였다. 자연법칙의 충실한 재현을 보증해주는 합리성의 보편적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지식의 선택은 과학자들이 지닌 사회적·정치적·전문적 혹은 개인적 이해관계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고 이들은 보았다. 따라서 사회로부터 자율적인 순수한 과학이란 허구이며 모든 과학지식은 그 진·위 평가와 무관하게 동등한 사회학적 설명이 가해져야 한다고 보는 이른바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약칭 SSK)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후 과학지식사회학은 기타 유럽 국가와 미국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분파로 발전되어 나갔다. 과학논쟁의 종결을 과학자간의 사회적 협상의 결과로 파악하는 콜린스(H. Collins) 등의 이른바 '상대주의의 경험적 프로그램', 실험실의 일상생활 연구를 통해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 과정을 보여주려는 라투어와 울가(Latour & Woolgar)의 민속지적 접근, 그리고 자연과학에서 설정하는 실재가 사실은 담론에 의해 구성되는 언어적 허구임을 밝히는 길버트와 멀케이(Gilbert & Mulkay)의 담론분석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1970년대 이후 전개되어 온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의 합리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초기의 기능주의 접근에서 벗어나 과학지식의 구성에 사회적 요인이 어떻게 개입되는가를 밝히려는 여러가지 시도들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과학지식사회학의 접근들이 1980년대 중반부터는 기술 발전을 설명하는 데까지 응용되기 시작함으로써 기술사회학이 새로운 분야로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과거 사회학에서는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관하여, 기술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며 이러한 기술의 논리와 속성이 사회변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보는 기술결정론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 대표적인 흐름이 1960년대의 수렴이론, 1970년대의 탈산업사회론,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정보화사회론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지식사회학에 영향을 받은 최근의 기술사회학 이론들은 한결같이 기술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그들의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다. 기술의 속성이 결정되는 과정은 사회적 요인들이 깊게 개입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며, 따라서 기술에 수반되는 사회적 결과 역시 이러한 사회적 과정을 이해함으로써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들의 과학지식사회학적 기초가 다양하기 때문에 기술사회학 이론들 역시 다양한 분파들로 나뉘어져 있다. 


어떤 기술적 인공물의 발달사를 그와 관련된 사회집단들의 상이한 이해관계 간의 협상 결과로 설명하는 핀치(T. Pinch)와 바이커(W. Bijker)의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 특정한 기술-사회의 형태가 구축되는 과정을 인간/비인간을 포함하는 행위자들간의 전략적 동맹의 산물로 보는 깔롱(M. Callon), 라투어(B. Latour), 로(J. Law)의 '행위자-연결망 이론', 그리고 기술이 창출되고 실행되는 과정에 개입되는 거시적인 사회적 맥락(계급관계, 권력관계 등)을 중시하는 맥켄지(D. MacKenzie), 윌리암스(R. Williams) 등의 '기술의 사회적 형성론' 등이 전개되고 있다. 서로 강조점의 차이는 있으나 이들이 공통되는 점은 기술이 사회와 무관한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한다는 기존의 기술결정론을 부정하고, 기술은 사회적 이해관계의 산물이며 따라서 기술과 사회간에는 명확한 경계나 일방적 인과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위에서 보듯 70년대 이후 전개된 새로운 과학기술사회학의 특징은 비전문가는 이해할 수 없는 '암흑상자'(black box)로 표현되어온 과학기술의 내용을 해체해서 그 사회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이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행위자들에 의해 하나하나 지식 혹은 인공물로 실제로 구성되는지를 밝힘으로써, 절대적 권위처럼 간주되는 근대 과학기술의 탈신비화가 가능해진다고 이들은 본다. 총괄하여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vism)이라고도 불리우는 새로운 과학기술사회학의 여러 이론들은, 과학기술 활동에 대한 풍부하고 세밀한 경험적 분석을 통하여 기존의 과학기술관을 비판하고 나아가 대체할 수 있는 유력한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초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가부장제, 민족국가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사회의 맥락 속에서 구성된 것이며, 따라서 과학기술이 오늘날 위험사회를 초래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구성이 수반한 결과라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과학기술이 유일한 발전경로가 아니며 대안적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이 가능하다는 시사를 얻을 수도 있다. 





3. 시민참여를 통한 과학기술의 민주적 재구성




과학기술이 보편합리성의 화신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위와 같은 사회학적 인식은 과학기술을 구성하는 사회적 과정(혹은 좁혀서 정책결정 과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커다란 실천적 함의를 던져준다. 전후 서구 과학정책의 모델이 되어왔던 부시의 '사회계약' 모델에서는, 국가는 과학연구를 지원하되 연구에 대한 의사결정은 과학자공동체의 내부통제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과학은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과학을 변화시키려는 정책은 전문가집단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전문가주의의 논리이다. 이는 사회에 의한 과학의 민주적 통제를 과학발전을 질곡시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강력히 거부하는 주요 논거가 되어왔다. 


그러나 과학기술자의 전문지식 역시 일반시민의 지식과 마찬가지로 사회문화적으로 국지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과학기술사회학의 지적은 과학기술의 정책결정에서 부여되는 전문가의 특권적 지위가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전문가의 지식이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거나 가치중립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면 더 이상 정책결정에서 비전문가의 참여를 거부할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통상 과학기술정책이라고 부르는 문제는 좁은 의미의 과학적 혹은 기술적 판단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사회정치적 쟁점을 강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사회정치적 쟁점들은 권위있는 전문가가 미리 정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협상과 합의를 통해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결국 과학기술사회학은 전문성이 자율적이거나 중립적인 지식이 아니라 협상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일종의 사회적 과정임을 알려주며, 시민의 의견을 그러한 과정에서 감안해야 할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이 사회적 과정이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legitimacy)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현재처럼 일부 이익집단들만이 포함되는 비민주적인 사회적 맥락에 의해 구성된 전문성이 점점 더 현대사회의 관리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사익보다 공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전문성 구성의 사회적 과정을 보다 개방적으로 민주화할 필요가 제기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단순한 시민의 여론 반영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전문성 자체의 민주적 재구성이 필요하며 또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시민지식(lay knowledge)의 유용성에 대한 고려가 요청된다. 여기서 '시민지식'이란 일정한 시민적(지역적) 맥락 안에서 타당하다고 간주되는 신념들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협상적인 전문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민지식을 고려에 넣는 것은, 기술적/환경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용한 정보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전문성을 보완하거나 드높일 수 있게 만든다고 우리는 본다. 


우선 시민지식은 알려진 변수들(예: 경제적, 생물적 변수들)과 이들이 사회시스템의 균형에 대해서 갖는 상대적 중요성에 관하여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 시민지식은 또한 전문지식이 이제까지 빠뜨려 왔던 차원들(예: 문화와 전통, 지역의 경제관행 등)의 유관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시각들을 부각시켜줄 수 있다. 이외에도 정책결정에 시민지식을 포함시키는 것은 적극적인 시민참여의 촉진 효과와 더불어, 여론의 정치적 조작 유혹은 물론 부정적인 시민인식과 이로부터 결과되는 사회적 저항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더 나아가서 정책결정에 시민지식을 포함시키는 것은 전문가의 비결정성과 불확실성의 성격 및 척도를 드러내 보이고, 따라서 보다 조심스럽고 유연한 의사결정 방식을 촉진한다. 이는 역으로 전문가 자문의 신뢰성을 유지시키고 정책결정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회피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민지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전문가 편향에 대한 완벽한 처방을 제공해주리라 우리가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일반적으로 수용가능한 해결방안들을 생산하고 상호 수용불가능한 해결방안을 제거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이러한 편향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지식은 확고한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것뿐 아니라, 순수하게 기술적인 기준(예컨대 산출 대 투입의 비율)의 측면에서도 전문성을 보다 효율적인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그 이유는 결코 시민지식이 더 뛰어난 지식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주어진 사회시스템의 복잡성을 줄이고 불확실성과 비결정성을 적절히 다룸으로써 기술혁신의 궁극적 결과를 효과적으로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와 판단을 그러한 지역적 지식이 전문가와 정책결정가에게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특정한 사회적 논쟁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대안적 전문성'(alternative expertise)과 시민지식과의 관계이다. 대안적 전문성(예컨대 환경운동가들의 그것)이 공공영역에서 제기하는 수많은 주장을 종종 끌어내는 풍부한 원천이 다름아닌 지역적 지식인 것이다. 언론에서 논쟁이 전개되면서 지역적 지식과 대안적 전문성간에는 대개 피드백 관계가 발전된다. 즉 지역적 지식은 대안적 전문성을 고취하고 대안적 전문성은 지역적 지식의 가치를 드높인다. 이 점이 시민참여를 통해 이러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포함시키고 제도화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이다. 


결국 복잡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정당하면서도 효율적인 해답을 구하려면 단지 시민인식이나 여론을 감안하는 방법(예: 공청회)만으로는 부족하고, 시민지식과 사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된다. '효율성'을 재는 다양한 척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점증하고 '정당성' 개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익집단들이 보다 많아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기술적 효율성과 정치적 정당성은 이제 점점 하나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도 핵폐기물처리장, 쓰레기소각장, 시화호 건설 등이 초래한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고려할 때 오히려 사전에 주민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구하고 반영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정당성을 얻는 길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소수의 전문가나 엘리트에 의한 의사결정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시민집단을 참여시켜 폭넓은 지식과 의견을 반영시키는 것이 민주적일 뿐 아니라 복잡한 기술사회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길이다. 





4. 과학기술 민주화의 제도들




앞에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한 이론적 실천적 근거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아직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 민주화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들은 그것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성이 없지 않느냐고 의문을 품는다든지, 과학기술같은 전문적 분야에 함부로 시민참여를 시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왜곡될 것이라고 심히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이미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1960년대말부터 기술사회의 위험에 대하여 진지한 사회적 고민을 해왔고 그 결과 상당한 갈등과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다양하게 제도화하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경험이 이를 입증해준다.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시민참여의 대표적인 제도들 몇가지를 예로 들면서 이들이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최근 유럽에서는 '합의회의'라는 시민참여 방식이 기술영향평가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생명공학처럼 정치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는 과학기술적 주제에 대해 비전문가인 보통사람들이 전문가와의 조직화된 공개토론을 통해 정리된 견해를 매스컴에 발표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여론 형성과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시도이다. 예컨대 노동자, 주부, 학생, 교사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시민패널로서 이러한 토론에 적극 참여한다. 1987년에 덴마크에서 시작된 이 제도에서 다룬 주제들을 살펴보면 

▷ 농업과 산업에서의 유전공학의 응용(1987), 

▷ 식료품에 대한 방사능 이용(1989), 

▷ 인간 유전자에 대한 과학지식의 응용(1989), 

▷ 동물에 대한 유전자조작 실험(1992), 

▷ 승용차이용(motorising)의 미래(1993), 

▷ 불임치료(1993), 

▷ 전자주민카드(1993), 

▷ 가상현실(virtual reality)(1993), 

▷ 교통정보기술(1994), 

▷ 식품과 환경에서의 화학물질의 위험성평가(1995), 

▷ 유전자 치료(gene therapy)(1995), 

▷ 소비와 환경의 미래(1996), 

▷ 어업의 미래(1996), 

▷ 원격노동(teleworking)(1997) 등이 있다. 

이처럼 덴마크에서 대성공을 거둔 합의회의는, 시민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의 사회적 토론을 통한 사전적 기술형성과 선택을 지향하는 네덜란드의 '구성적 기술영향평가'(constructive technology assessment)와 함께 기술영향평가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주목을 끌면서, 지금은 유럽연합 차원에서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기존의 기술영향평가(예컨대 미국의 OTA 방식)에 비해 이들이 새로운 점은 평가가 전문가 중심이 아니라 참여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덴마크에서는 지역 수준과 주제에 따라서 '시나리오 워크샵'(scenario workshop), '비젼 워크샵'(vision workshop)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시민참여를 이끌어내려 시도하고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과학기술은 시민에게 친근한 것이 되고 전문가와 비전문가간의 거리가 좁혀질 뿐 아니라, 사회적 토론의 활성화로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시민문화의 성숙이 촉진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 과학상점(science shop) 


순수학문이나 산학협동에 치우친 기존의 대학연구에 대한 대안적 모델로서는 네덜란드의 대학들에서 1970년대부터 자율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과학상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대학연구의 고객은 기업과 정부 그리고 학계 자체일 뿐이다. 일반시민이나 지역사회는 세금 부담을 통해 대학을 지원하면서도 여기서 소외되어 있다. 따라서 대학연구의 지향도 환경이나 사회복지같은 지역사회의 절실한 현실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과학상점'이란 지역사회집단, 공익단체, 지방정부, 노동자 등이 제기하는 구체적인 기술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무료로 연구와 자문을 해주는 제도로서, 현재 네덜란드에는 전국 모든 대학들(13개)에 이것이 구성되어 현재 총 35개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는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학 경제학 법학 등 사회과학 분야의 상점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각 과학상점에는 시민과 대학연구진으로 구성되는 조정위원회가 있어 신청된 과제들중 연구할 것들을 선정하게 되는데, 신청자는 연구비를 스스로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과 상업적으로 이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연구결과를 생산적으로 이용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학생과 교수는 그들의 정규활동의 일환으로서 이 일을 수행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시간과 비용을 거의 안 들이고, 대학당국도 기존의 예산과 지방정부의 일부 보조로 그 연구비를 지원하기 때문에 추가 재정부담이 없다. 이 제도를 통해 학생들은 학습에 자극을 받는 동시에 사회문제의 해결에도 기여한다는 보람을 얻게 되고, 대학과 지역사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대학연구의 새로운 모델로서 부상된 과학상점은 지금은 독일 프랑스 이태리 벨기에 등 여러 유럽국가로 확산되고 있고, 미국에서도 로카연구소(Loka Institute)라는 비영리시민단체가 주도하여 이를 모델로 한 전국적인 지역사회연구센터망을 구축하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과학상점이 전세계로 알려져, 체코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이스라엘, 멕시코, 남아공, 탄자니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 제3세계 국가들에까지 확산이 되고 있는 중이다. 




3) 참여설계(participatory design)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중에 아마 가장 직접적인 방식은 아예 연구개발과 설계의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여 자신의 필요와 창의적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전문지식과 시민지식이 서로 창조적으로 결합되어 새로운 혁신을 낳는 것으로서, 전문가/비전문가 혹은 과학기술의 생산자/소비자간의 엄격한 구분이 사라지는 진정한 민주화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속하는 가장 획기적인 시도는 60년대말 영국의 루카스항공회사(Lucas Aerospace)의 노동조합에 의해 시도되었다. 당시 회사가 비용감축을 위해 일부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려 했을 때, 노조에 속한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은 지역사회의 주민 및 대학과 협력하여 사회에 유용한 제품들(기존의 전투기엔진이 아닌)을 공동으로 설계하고 생산하고자 하는 대안적 계획으로 맞섰다. 그래서 150개의 혁신적 제품이 설계되었고 그중 일부는 시제품으로도 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저렴한 의료기구, 태양집열장비, 저연료 엔진, 다연료/다용도 발전기, 노동자조정 로봇, 도로 철도 겸용버스 등이 포함되었다. 비록 이 계획은 회사에 의해 거부되었고 대처정부가 들어서면서 노조 지도자들을 해고하여 종결되었지만, 그 아이디어는 후에 런던광역시기업국(Greater London Enterprise Board)의 '기술네트워크' 설립으로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80년대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시도된 것이 '유토피아'(UTOPIA)라는 프로젝트이다. 북유럽 그래픽노조는 스웨덴노동생활연구소 및 대학연구자, 한 국영인쇄회사와 협력하여 그래픽 및 인쇄 노동자들이 쉽고 창조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발명하였다. 이는 시제품 수준을 넘어서 상품화가 시도되었는데, 비록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하였지만 노동자와 기술전문가의 대표적인 협력 성공사례로서 평가되었다. 이후 노동자에 의한 참여설계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일종의 사회운동으로서 점점 확산되어갔다. 이러한 참여설계 사례들이 시사하는 점은 적절한 환경이 주어질 경우 노동자들이 작업장기술의 설계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적절한 환경'은 단지 기업내의 조건만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국가의 사회민주주의처럼 유리한 사회정치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거시적 조건이 불리한 현재 미국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위한 컴퓨터전문가'(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참여설계는 조심스럽게 시도되고 있다. 




4) 과학기술과 사회(STS) 교육




마지막으로 위와 같이 활발한 시민참여를 위한 토대로서 이미 서구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된 STS교육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사회화과정을 보면 이공계/인문사회계, 전문가/비전문가간의 '두 문화' 현상이 고착되고 확대재생산이 되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인문사회 전공자는 과학기술에 무관심하고 과학기술 전공자는 인문사회 지식에 어둡도록 이분화된 교육체계 속에서 길러졌고, 비전문가는 자율적 판단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전문가에게 철저히 의존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 결과 과학기술은 일반시민에게서 먼 세계에 있는 '암흑상자'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서구에서는 60년대말 환경위기와 반전운동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양되는 가운데 그동안 편협했던 과학기술교육에 대한 반성으로서 학계에서 다양한 STS프로그램들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들에서는 과학기술의 철학,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윤리 등에 관하여 학제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그 결과를 교육내용에 담아 널리 보급함으로써 이공계와 인문사회계간의 높은 장벽을 허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만도 이런 프로그램을 설치한 대학이 약 30개가 되며, 80년대부터는 초 중등 교육현장에서도 이런 교육이 확산되어 다양한 STS교재가 개발 활용되고 있다. 아울러 생명공학과 의학의 윤리 문제를 특별히 다루는 생명윤리센터도 10여개나 생겨났다. 이런 교육이 활성화되면 과학기술자가 풍부한 사회적 안목과 책임의식을 갖추게 될 뿐 아니라 정책결정가, 경영자, 노동조합, 언론인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시민이 합리적으로 과학기술을 통제하고 이용할 줄 아는 능력이 향상될 것이다. 



퍼온곳 : 한국과학기술인 연합 http://www.scieng.net/zero/view.php?id=freeboard&no=1222


참고사이트  : http://cafe.naver.com/radicaldemocracy


http://www.scieng.net/v2/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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