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bAnarchist

울화병 쌓이는 가난한 진보정당의 활동가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

반응형



울화병 쌓이는 가난한 진보정당의 활동가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

- 최혜영 사무처장 -


가슴 아픈 박은지 부대표의 죽음을 보며 그 안에 투영시켜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몇일의 시간이 지났다. 마치 전업주부의 그림자 노동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우울증이 찾아오듯이 이 시대 활동가들의 부단한 노동 또한 운동사회 내외적으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가운데 스스로 위축되고 우울하기 쉽상인 시절이다. 


진보정당의 당직자들 그리고 활동가 후배들에게 그래도 용기를 내자며 위로의 글을 쓰고 싶었는데 제대로 쓸 시간이 없어 허둥대다가 이제서야 조금이라도 이 죽음을 직면하고 우리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 이야기를 꺼내 본다.





50이 넘도록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 인생에 커다란 두 번의 우울증을 기억하고 있다.


첫번째는 19살 때 그러니까 8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온 우울증이었다. 


당시 상고를 나와 대학을 가려고 재수를 막 시작하려던 내게 엄마의 병환이 갑자기 닥쳐왔다. 만성 심장질환 등 복합적인 질병으로 복수가 차 거동이 불편하던 환자, 누군가 돌봐야 했다. 맏딸이던 나는 집안일과 엄마의 병수발을 도맡아야 했다. 가스렌지도 없던 시절, 새벽부터 일어나 석유곤로와 연탄 아궁이에 밥을 해서 학교 다니던 동생 둘과 방위 다니는 오빠 의 도시락 3개를 싸놓고 하루를 시작했다. 


늘 신경증적인 엄마의 병수발에 전국민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병원은 꿈도 못꾼채 온갖 민간요법만 쫒아다니며 1년을 보냈다. 재수, 대학입시 준비는 당연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날마다 하고 싶지 않은 가사노동을 반복적으로 해야 했고 지지리도 극심했던 집안의 가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해 겨울 우울증이 깊게 찾아왔다. 급기야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가족 누구와도 말 한마디 섞지 않았고 밤마다 자살하는 방법을 구상했으며 책에만 파묻혀서 살았다. 누구와도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내 문제에 너무 빠져서 당시 똑같이 힘들었던 가족들의 삶, 사춘기 동생들의 번민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두 번째 우울증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쯤이었던 듯 싶다. 


겨울이었던 듯. 한 달 정도를 극심한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경제적 어려움의 반복, 아이 둘을 키우는 양육의 힘겨움, 내 활동전망의 불투명, 남편과의 소통부재가 커다란 이유였다. 혼자 생각에 빠져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집안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돌보지 않았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남편에 대한 불만은 매우 컸다. 남편에게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어마 어마한 원망과 불만을 켜켜히 쌓아 나갔다.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번 박은지 부대표의 죽음을 보며 ‘어떻게 아이를 두고?’ 라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하지만 나는 박부대표의 당시 심정이 어땠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나도 우울증이 극심했을때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가 너무나 큰데 어찌 주변을 돌아 볼 수 있을까? 이미 아픈 사람이다.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힘겨웠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하루 종일 잠만 잤고 밤엔 티브이를 혼자 보며 매일 매일을 보냈다. 시시때때로 울컥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주루룩 흘리기도 했다.


그런 두 번의 큰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우울증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리곤 나름의 극복방법을 스스로 체득했다. 그래서 우울증의 근본원인에 대해 우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우울증의 1차적 원인은 뭐니뭐니 해도 빈곤이다. 


특히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빈곤은 활동을 선택한 이상 지속적이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덮쳐온다. 그리고 활동을 지속하는 한 가난이 개선될 희망이 없기에 가난을 수용하며 가난에 적응하고 부분적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살 수 밖에 없다. 거기엔 노하우가 없다. 개인적 해결책이라고 해봤자 한 축으론 세상사에 달관도 해야 하고 한 축으론 근검한 생활로 버틸 수 밖에 없다. 대책없고 기약없는 인생에 적응해야 될 뿐이다. 그런데 자본이 첨단을 걷고 돈이 전부인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가치있는 삶에 대한 소신이 강하더라도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디 그 뿐인가? 과거에는 활동가들의 생계를 주변에서 지원도 많이 했지만 요즈음은 ‘아직도 정신 못차린, 혹은 게으른, 혹은 무능력한 사람. 혹은 남의 도움을 바라는 뻔뻔스런 사람 등등..’의 시선으로 보기 일쑤이다. 그런 시선 자체도 폭력인데 거기에 개인적 생활고 까지 겹치면 활동을 지속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자신감은 바닥이고 우울증의 늪으로 빠져든다. 


과거 개인들의 희생으로 활동이 유지되던 시기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이제는 그것을 우리 모두 인정할 시대가 되었다. 단체나 조직이 이것을 해결해 나가고 그렇지 못하다면 조금 긴 호흡으로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것을 수용하기 어려운 정도라면 나는 오히려 활동을 잠시 쉴 것을 권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긴 인생으로 보면 나의 잠깐의 쉼이 이후 더욱 큰 활력을 줄 수 있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강제된 억압처럼 가난을 감내하며 활동을 지속하게 되면 자칫 자신의 멘탈이 무너진다.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고 점차 우울증의 도가니로 빠지기 쉽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지속되는 빈곤 속에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스스로 자신이 우울상태가 아닌지 자가진단까지 하고 처방도 해결책도 스스로 찾아가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큰 원인은 최근 몇년 동안의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진보정당운동의 전망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의 활동 전망과도 깊이 연동되어 있다. 최근의 당 상황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당직자들의 임금 및 근로조건은 최악의 상황이다. 박은지 부대표가 받았던 몇십만원도 안돼는 활동비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당이 원외정당이 되면서 그 혹독함은 점점 가중되어지고 많은 당 활동가들이 생계와 전망부재의 이유로 진보정당운동 혹운 사회운동 전선을 떠나고 있다. 단지 임금이나 근로조건의 문제라면 일시적으로라도 참고 견딜수 있겠다. 혹은 기약이 있다면 버틸수 있다. 그러나 당이 이후 그런 전망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보다 많은 활동가들이 떠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 개인적으로는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2%돌파가 엄청나게 중요하단 생각을 갖고 있는 편이다. 정말 당의 생존을 위해서...


그러나 또 하나 놓칠수 없는 것은 이제 활동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환경에 우리들이 전면적으로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한때 최고 지지율이 15% 정도까지 치솟았던 정당의 지지율이 지금 바닥이다. 15% 이상의 지지율은 주변 가족과 친구, 친지들 로부터 기꺼이 진보정당 활동가로 사는것 혹은 출마하는것은 지지받고 환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나나 남편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던 전형적인 보수층이었던 시아버님 조차 구 민노당이 15% 지지에 육박했을땐 우리 활동에 대해 격려와 지지, 응원을 보냈었다. 


그러니 지금 현재 지지율이 1% 혹은 2%인 정당에서 진보정당의 활동가로 일한다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 100명중 99명이 나의 활동에 대해 뭔가 긍정적인 것과는 정 반대의 메시지를 던지는 현실에 바로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은 연신 길거리에서 ‘이석기 정당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래 가지고서야 대중적인 정당이 대중적인 활동을 펼치기는커녕 대중과 만나면 만날수록 위축되고 무너지고 말게 된다. 그렇게 되니까 점점 고립되고 점점 우리끼리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게 된다. 딜레마다.


민주노총 활동가를 비롯한 노동운동가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한때는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민주노총에서 일하던 노동운동가들이 이제는 마치 정규직 노동귀족처럼 멸시당하는 시선과 관료의 대명사처럼 보여지는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세상이다. 물론 근로조건이 다소 낫다면 그것도 감내할 수 는 있겠으나 민중운동 사회운동 진영의 환경 역시 녹녹치 않다.


우리 스스로의 전망과 내 안의 상처는 또 어떤가?


구 민노동에서는 극심한 정파갈등으로 상처받고 피폐해진 경험들이 많은 진보정당 활동가들에게 채곡히 쌓여있다. 2008년 분당의 과정에서 활동가들 상호간에 주고 받은 상처 또한 만만치 않은데 진보신당에서 당 진로를 갖고 겪어야 했던 극심한 내홍의 상처 역시 크다. 한 때 동지라고 의지했고 하늘처럼 믿었던 지도자들의 배신을 몸소 겪어야 했던 그 심정이야 어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당시 당 활동전망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 심리적 정서적 감정을 이야기 하자면 그렇다.


그 과정의 상흔도 처참할 지경인데 몸담고 있던 둥지였던 당들도 급기야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십수년 뼈빠지게 대중운동의 성장과 진보정당운동의 성장을 위해 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길래 당 안에 남은 사람들도 그렇고 당을 박차고 나간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잘된 꼴 없이 모조리 망해먹고 말았을까? 개인적인 자괴감들도 심하다. 수십년 동안 돈도 못벌고 열심히 살아온 것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운동판이 다 무너진거지? 자책도 하고 남 탓도 하고 수없이 갈등하며 지난 1~2년을 보내왔으리라. 그 와중에 새록새록 나만 미친짓 한건 아닌가? 진보정당 운동 자체에 대한 환멸도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엎친데 덮친다고 활동가층 전반이. 중 장년층이 되면서 존재조건이 보수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 사회보장 없는 한국사회에서 가진 돈 한 푼없이 노인세대로 진입한다는 것은 거의 죽음의 공포에 가깝다. 게다가 중 장년층이 되면서 감수해야할 사교육비와 부모세대 봉양등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활동가들이 자신의 가족 문제에 마냥 눈감고 살 수는 없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 심리적 불안감과 조바심까지 겹쳐 오랫동안 함께 해 온 동지들 상호간에 상처주는것도 다반사다. 무엇이든 잘될땐 다 넘어가지만 안됄 땐 사람들의 심리가 꼭 책임을 따지고 싶어하고 추궁을 하게 된다. 그간 진보정당운동 혹은 대중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책임을 지고 희생을 했던 사람들에게 비판의 화살이 돌아온다. 


어렵고 힘든시기에 상호간에 소통과 공감, 격려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정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한다. 서로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시기. 자신의 상처가 가장 크게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동지들에게 공격을 해댄다. 늘 강인한 활동가, 사이보그로 살아와야 했던 그러나 이제는 지친 활동가들은 억울한 심경이 이루 말할수 없다. 그동안 죽도록 일하고 희생한 댓가에 대한 보상은 커녕 이렇게 된 모든 잘못된 책임까지 지라고 추궁당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활동가들의 처지는 이런 비판을 감내할 여유가 없어진지 오래다. 책임을 내려놓고 싶어진지 오래다. 활동가들도 인간인지라 섭섭한 마음이 쌓이고 결국 운동 풍토에 환멸을 느끼고 운동판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아니면 오기로 버티거나...그도 아니면 관계를 단절하거나..


이런 이중 삼중의 어려운 환경에 우리는 둘러 쌓여있다.


거기서 제대로 된 멘탈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기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린 모두 우울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울화병이 생겨 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우선은 그걸 인정하자. 나부터..


그렇다면 그 다음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노력과 조직의 노력, 공동체의 노력과 개인적 노력이 모두 필요하겠다. 사회적 노력은 이 썩은 자본주의 세상을 뒤집어 엎고 빈곤문제를 해결해야 가능하겠지만..


우선 자신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살아오면서 스스로에게 수없이 자문해 보았다. 내가 활동을 위해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인지, 가난으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활동을 쳇바퀴처럼 지속하고 있는 것인지, 물론 지금같이 사회적 양극화가 심하고 실업난이 심각한 시대에는 그 차이가 별로 크진 않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가끔씩 묻고 있다. 자신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늘 나의 선택이었으므로..


조직의 노력에 대해서는 지방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 당분간 우리 진보정당운동은 어려운 시기를 경과할 것이다. 지방선거가 지나고 다음 총선이 지날 때까지 진보정당의 생존 혹은 진보진영 재편등이 어떤 양상으로 펼쳐나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당은 생존을 위한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주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야 조직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진보정당 운동의 1세대의 자산들도 살아서 남길 수 있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공동체의 노력과 개인의 노력에 대해서 한마디


우선 시급히 당에서 당직자들부터 심리진단 검사와 치료등을 했으면 좋겠다. 전문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원들의 도움과 후원을 받아 일하는 사람들 심리상담부터 했으면 좋겠다. 쌍용차노동자 노동자들 심리치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 구석구석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본다. 


여기저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공동체의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어찌보면 그간 활동가들에게 희생과 무한책임만 강요한 문화는 지극히 폭력적인 문화였다. 그리고 지속가능하지 못한 문화였다. 이제 공동체가 그런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동의 책임과 실천이 가능한 풍토를 만드는 것도 절실하다. 그래서 진보정당의 과거 운영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활동가 혹은 대중정치인을 통해 당내 대리정치를 하는것에 머물렀던 당원들의 삶이 실천의 장으로 나올수 있게 해야 한다. 

단지 당원들의 형식적 권리만을 민주주의라는 틀로 무한 보장하는 시스템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구성원들이 자기자리에서 실천하는 책임지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공동체는 조직을 결사하고 운영하는 것을 공동으로 책임질 때 지속할 이유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운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덧붙인다면 즐겁게 일하는 환경으로 조직문화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구성원들의 심경이 그러할 때 가능하다. 그래야 서로 둘러보고 소통할수도 있다. 패배감과 우울증이 심한 사람들이 다수인 조직은 지속가능하기 어렵다. 

다양한 도움을 받아 공동체의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노력을 기울이자.


끝으로 개인적 노력에 대해서 몇가지 조언을 해본다. 그간 내가 해왔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서..


일이든 뭐든 욕심부리지 말기, 집착에서 벗어나기, 과로하지 말기, 가끔씩 놀러가기, 햇빛보며 살기, 겨울에 특히 조심하기, 1주일에 한번은 자연을 벗삼기, 땀 빼는 운동하기, 가끔씩 맛있는 것 먹기, 사랑하는 사람 만들기, 수다떨기, 화내기, 이야기하기, 앉아서 머리굴리지 말고 나가서 부딪치기, 생각의 늪으로 빠지지 말기 등등등.


----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정책통으로 활동해오던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국장이 2012년 12월 12일 암 투병 중 사망했다. 지난 1월 19일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이 세상을 등졌으며, 35세 싱글맘이었던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가 지난 8일 마찬가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거듭되는 진보정당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죽음의 원인은 무엇일가.


관련 기사 보기 

진보정당인으로서의 고통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동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글이 올라왔다. 최혜영 사무처장(51)이 15일 온라인 당원게시판에 올린 이 글은 페이스북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당 안팎으로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다음은 최 사무처장이 올린 글 전문. 


기사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3162152191&code=940100




반응형

더욱 좋은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