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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약진 시대의 과학대중화 운동 - 이 정 모 / 서울시립과학관장

지구빵집 2016. 12. 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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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약진 시대의 과학대중화 운동 - 이정모 / 서울시립과학관장


퍼온곳 : 물리학과 첨단기술 OCTOBER 2016  http://old.kps.or.kr/storage/webzine_uploadfiles/2708_article.pdf


‘물리학의 약진’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물리학자들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머리를 갸웃거릴지 모르겠다. 스스로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 또는 물포자(물리를 포기한 사람)라고 말하는 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닌 세상에서 물리학의 약진이라니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출판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 한국출판기획연구소가 2016년 출판계 키워드 30개 가운데 하나로 ‘물리학의 약진’을 선정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들이 갑자기 물리학 책을 찾고 있는 것이다. 진화를 대표적인 소재로 삼고 있는 교양과학서적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물리학 책을 나열하는 일은 이제 아주 쉽다.


『김상욱의 과학 공부』, 김범준의 『세상물정의 물리학』, 『이종필의 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안상현의 『뉴턴의 프린키피아』, 오정근의 『중력파,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선물』, 이강영의 『보이지 않는 세계』, 『과학하고 앉아있네‒ 김상욱의 양자역학 꼭 찔러보기』 같은 ‘어려운(!)’ 물리학 책을 대중들이 찾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젊은 물리학자들이 한몫하고 있다. 시민들은 ‘나를 작동시키는 시스템’과 ‘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시스템’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이 세상의 부조리를 교정하고 싶다. 김상욱과 김범준, 이종필 같은 뛰어난 물리학 저술가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탑재하고 나타났다. 대중들은 물리학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예전에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의 조상호 명예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감탄한 적이 있다. 조상호 교수에 따르면 조선말엽에는 『격물입문(格物入門)』이란 책으로 《격치(格致)》라는 과목을 가르쳤다고 한다. 『격물입문』에는 오늘날 물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이 담겨져 있으니 《격치》는 곧 물리학 강좌를 말한다.


이 책과 과목의 이름은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에서 왔다. ‘격물’이란 사물의 이치를 살핀다는 뜻이고 ‘치지’란 ‘격물’의 과정을 통하여 지식을 계발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의 약진’을 가져온 대중들이 생각하는 물리학이다.


이제 ‘과학대중화’ 운동을 진지하게 점검할 때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과학 대중화 운동이란 과학을 쉽고 재밌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런 운동을 수십 년간 해왔지만 우리나라 대중의 과학 수준은 전혀 높아지지 않았다. 어릴 때 생겨난 과학에 대한 관심은 열세 살이 되면 사라지기 시작하고 비전공자가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과학을 공부하면 ‘덕후’라는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대중들은 더 수준 높은 과학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지난 4월 5일까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일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박물관이다. 이렇게 말하면 잘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은데, 사실 런던 자연사박물관보다 더 나은 곳이다. 크기가 전부가 아니라면 말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강연이 열린다. 구(區)라는 작은 단위에서 운영하는 작은 박물관이 ‘대한민국 박물관의 꽃’으로 자리잡는 데는 성인을 대상으로하는 수준 높은 과학강연이 큰 역할을 했다. 자연사박물관이라고 해서 자연사에 관한 강연만 여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자연사박물관을 드나들기 시작하니까 박물관이 변했다. 자연학자들 은 정보와 함께 감동을 준다. 물리학자들은 여기에 엄격한 논리와 단순함이라는 요소를 더한다. 여기에 대중들이 감동을 받는다.


나는 4월 6일부터 서울시립과학관에서 일하고 있다. 내게서 명함을 받은 선생님들은 “아! 서울시립과학관에 근무하시는군요. 저, 여기 많이 갔어요. 전시가 아주 좋더군요.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칭찬도 자자하던데요. 어쩐지…. 관장님이 계셨기 때문이군요.”라며 칭찬하신다. 고맙지만 다 거짓말이다. 서울시립과학관은 2017년 4월에야 개관하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관도 변해야 한다. 멋진 전시물을 보고 사진을 찍고 과학자들의 연구에 감탄하는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과학관은 과학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과학이란 실패의 연속이다. 가설을 세우고 관찰과 실험을 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문을 쓰는 모든 과정에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우리는 한 번 성공한다. 


과학관은 대중들이 그 실패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게 물리학의 약진 시대에 과학대중화 운동의 모습이 아닐까? 더 많은 물리학자들이 책을 펴내고 대중강연을 하고 과학관에서 시민과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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