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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러너스

작정하고 달린 2025 춘천마라톤 완주 3시간 55분 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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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서브 4 페이스메이커를 따라서 달리면 3시간 59분 50초에 들어오는데, 35km 지점에서 달리기 시작해서 결승점까지 날고 헤엄쳐 3시간 55분에 들어왔다. 사자들이 잠시 없는 정글에서 영양 사냥에 성공한 하이에나가 된 기분이다. 아침 일찍 전세 버스를 타고 짧은 하루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다. 춘천에 들어서면 전국에서 모여든 차로 대회장까지 가는 길이 밀린다. 버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도 되는데 번거롭게 늘 대회장의 탈의실을 이용하고, 짐을 맡기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 출발 전 대회에서 볼 수 있는 어수선한 풍경을 눈에 담고,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와 짐을 찾고 사진을 찍고 하는 여정이 주는 느낌을 빠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오늘 경주는 최고로 좋은 날씨였다. 아침에는 장갑이 필요 없을 만큼 춥지 않아 좋았고, 달릴 때는 뜨겁지 않아 좋았다. 오늘 대회를 준비한 회사 대표의 말이다.

 

"춘천에서는 새벽 4시 반부터 약 40대 의 주로 차량이 각급 학교로 배차되어 자원봉사자들을 태우고 주로의 급수대에 인원 배치를 합니다. 서울에서는 5시 반부터 시청, 잠실, 사당 그리고 신도림에서 참가자 수송 셔틀버스만 89대가 움직여요. 주로 버스까지 총 127댑니다. 대회를 마친 후 모두가 안전하게 서울로 올라오는 것까지 확인되어야 업무가 종료되죠. 1호차부터 127호차 까지 모두 관리합니다. 트로피와 메달, 완주자 간식 준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닫힌 구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스스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이 치른 대가와 희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늘 잊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짧게 기도한다.

 

가장 젊고, 아름다운 때에 오늘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무엇보다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오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두 가지 일을 잘 마무리짓기를 기도한다. 소심한 기도는 즉시는 아니더라도 우여곡절을 거쳐 응답한다. 

 

하이에나는 종종 청소부로 조롱받지만 하이에나는 모든 것을 견뎌낸다. 언젠가 사자도 힘이 빠지고, 하이에나는 영양의 다리 하나를 물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이에나는 생각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쫓는 것, 견디는 것, 그리고 집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얻는다. 달리기는 러너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먼 거리와 마음에 드는 기록, 혹은 인내와 투지를 주지 않는다. 오직 러너의 노력과 회복력, 훈련 과정에 보답할 뿐이다. 오늘은 사자가 득실대는 정글에서 이긴 기분이다.

 

풀코스를 달리면 매 경주마다 4시간 이내 달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들었다. 2023년부터 겨우 2년 지났다.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일단 마음부터 굳게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러너는 마음이 지면 육체는 100% 진다. 서브 4 주자라서 출발 그룹 B조에 배정을 받았다. 바로 앞에 4시간 페이스메이커 '박수철' 이름이 선명했다. 등에 단 하얀 풍선이 오늘의 식량이자, 제단에 바치는 작고 귀여운 하얀 양으로 보였다. 춘마 대회에 6번째 출전으로 인해 달리는 코스는 익숙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마라톤 풀코스 42.195km의 반은 하프 21km가 아니라 30km 지점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마라톤의 진정한 경주는 10km를 남겨둔 32km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때부터가 오늘 마라톤 레이스가 어떻게 끝날 지를 결정한다. 마라톤이 인생과 닮은 게 아니라 우리 인생 자체가 마라톤이다.

 

출발할 때부터 4시간 페이스메이커와 꼭 붙었다. 2km를 지나자 페이스와 거리를 알려주는 마라톤 시계가 거추장스러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한결 팔이 가벼워지고 마치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굳은 결심이 느껴지고, 어떤 굴레에서 해방되는 착각이 들어 좋았다. 하얀 풍선을 따라 35km까지 옆으로는 10미터를 벗어난 적은 있지만 앞뒤 간격으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악착같이 페이스를 맞추고, 달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초반에 페이스 메이커 주변에 있던 러너들이 결승선까지 함께 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뒤로 처지거나 마지막에는 속도를 내 흰 풍선을 추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러너가 따라붙다가, 앞서 나가기도 하며 주변의 러너들은 계속 바뀐다. 흰 풍선에 새겨진 "C Full 4:00"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5km마다 있는 급수대에서는 물을 계속해서 머리에 쏟아부었다. 탈모 방지를 위해서, 물이 온몸에 확 쏟아질 때만큼은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기분이다. 12.5km부터 매 5km마다 있는 물에 적신 스펀지를 받아 머리를 흠뻑 적신다.

 

5km 갔을까?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걸을 때마다 민망한 소리, 수치스러워"… 집단소송 터진 운동화) 앞에 달리는 러너의 신발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이 새끼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 삑삑 소리가 보통 소음이 아니다. 아직은 영혼이 도망가지 않아서 풍경과 주변 상황이 눈에 잘 보이는 구간이다. 달리기는 계속 움직이지만 의외로 정적인 고요한 운동이다. 삶에서 받은 온갖 쓰레기더미를 내려놓고,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갑자끼 삑삑삑 정확한 간격으로 울려대는 소리는 참을 수가 없었지만 참고 달렸다. 삑삑이가 왼쪽으로 오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내 앞에 오면 앞쪽으로 옮겼다. 평화를 깨는 삑삑이 소음과 실랑이를 벌이며 25km를 넘어가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개노무시키, 진짜 주옥같은 일이다. 

 

달릴 때 러너마다 가지고 있는 습성 같은 것들에 방해받을 때가 있다. 과도하게 흔들리는 팔과 상체의 흔들림, 숨을 내 쉴 때마다 물에서 올라오는 하마처럼 푸루루르 하면서 입술을 떤다든가, 틱인지 모를 헛기침과 신음소리를 주기적으로 외치는 러너들은 참을 수 없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페이스를 늦추든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페이스를 높여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무엇이든 배울 때는 정식으로 배워야 한다. 요즘은 유료로 달리기를 배우는 크루도 많고 달리기 교육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달리기를 돈 주고 배우는 시대라니 참 끔찍하다.

 

7km 부근에는 봄봄, 동백꽃 작품으로 유명한 김유정 선생의 문인비가 있다. 의암댐을 지나면서 아래로 굽어 보이는 의암호의 물안개가 보인다. 붕어섬의 단풍은 온통 주황과 빨강으로 물들었다. 20km 신매대교 중간에서 돌아 나오면 가을 풍경을 보는 좋은 시간은 다 가버렸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춘천댐으로 가는 주로 에 들어선다. 여전히 4시간 페이스메이커 옆에 꼭 붙어간다. 힘들다는 생각이나 언제부터 걸을까 하는 주저함이 조금이라도 들어올라 치면 시작부터 꽁꽁 막아버렸다. 지금부턴 춘천댐을 넘기까지 긴 언덕을 올라야 한다. 댐에 올라 평지가 시작하는 순간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으로 함성을 지른다. 

 

 페이스를 정확히 유지하고 목표한 기록을 가늠하려면 러너는 산수를 잘해야 한다. 절반쯤 왔을까 하는데 E조의 3시간 40분 흰 풍선과 러너들이 무리 지어 추월해 간다. A조가 출발하면서 순수한 러닝 기산을 재는 절대적인 시계가 동작하고, F조까지 각 5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이쯤에서 우리를 앞질러 갔으니 그들은 아마 3시간 40분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가 4시간 걸리니 그들보다는 30분 늦게 도착한다. C조는 10분 늦게 출발했으니 말이다. 모든 상황과 다른 주자들, 흰 풍선을 보면 시간이나 기록을 가늠할 수 있으니 시계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앞지르는 "E Full 3:40" 그룹의 흰 풍선에게 페이스가 어떻게 되나고 물어보니 5분 15초란다. 갑자기 여기 하얀 풍선을 쫓아갈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사실 달리는 과정에 있어서는 예측을 해도 문제고, 그렇다고 안 해도 문제다. 달리는 내내 이러한 예측과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은 계속된다. 하지만 오늘 목표는 서브 4 달성이라 끝까지 참는다. 날고 헤엄치듯 달려 나가도 피니시 라인까지 페이스를 유지하겠다는 정확한 판단이 들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그래 다음 대회에 3시간 40분을 하자고 살살 달래가면서 질주 본능을 잠재웠다. 

 

35km 지점에서 이제 마지막 힘을 내기로 한다. 옆에 있는 흰 풍선을 따라 달리면 3시간 59분 30초에는 결승점에 들어갈 수 있다. 지금 몸 상태는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자 여기까지 잘 왔다. 이제부터 날고 헤엄치자고 다짐한다. 페이스 메이커는 '힘이 있는 분들은 이제부터 앞으로 나가세요.'라고 말한다. 흰 풍선에게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하고 예의를 갖추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달려 나가는데 조금도 두렵지가 않고 자신감이 넘쳤고 아주 신났다. 하이에나를 생각하고, 거울 같은 호수와, 잃어버린 것들과, 내가 얻고 싶은 것들을 생각한다. 42km 피니시 라인까지 힘껏 달렸다. 흰 풍선보다 무려 5분을 단축했다. 3시간 55분 58초 기록으로 대회가 끝났다. 아, 좀 더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회는 끝났다.

 

 

4시간을 꼬박 달려 지나온 풍경과 호수에 비친 가을 단풍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같은 주로를 달린 러너들의 모습을 생각한다. 피니시 라인에 있는 공식 시계와 라이브로 중계한 춘마 유튜브 영상에서 4시간 8분 2초에 팔을 번쩍 올리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다.

 

마라톤은 달리는 것이나 혹은 건강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까? 대회에서도 어김없이 풀코스를 달리는 중에 두 번 정도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힘을 더 내야 할 때라고 알려주는 신호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빠져나가면서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닐까? 새로운 목표를 정하지 못해 흔들리며 달릴 때에는 힘은 힘대로 들고, 걷는 것에 대한 패배감도 들고, 슬픔이나 어떤 찌꺼기가 버려진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나름대로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때에는 이런 최상의 느낌을 얻는다. 한 구간이라도 집중해 달리는 과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좋은 달리기였는지 평가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다.

 

감독이 한 말이 계속 들렸다. '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고, 더 잘 달릴 수 있는데도 왜 하지 않니? 한계를 정하고 어디까지만 달리겠다고 하면 결국 너는 그곳에 묶이는 거야. 아직 많이 남았어. 340, 330까지 할 수 있으면 해야지!' 달리면서 이 말을 몇 번이나 생각했다. 이미 접었다고, 나는 이미 내리막길이 아니겠냐고 말은 못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몸도 마음도 그 말을 사실로 만드려고 굳어갔다. 

 

참가 선수 7명과 응원 선수까지 17명이 춘천에 다녀왔다. 아침에 버스에서 자봉이 준비한 찰밥을 먹고, 대회가 끝나고 나서 어묵탕과 족발을 준비했다. 필자 선배가 없어 서운했지만 또 자원봉사를 누군가 해주는 것에 감사하다고 식자 선배가 말했다. 오늘은 새벽부터 대회 끝나고 서울로 오는 동안 여러 번 필자 선배가 그리웠다. 공연에서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도 배우고, 가만히 춤을 추지 않는 백조도 발레리나이듯, 선수와 함께 고생한 서포터도 선수 맞다. 하루 종일 온전히 고생한 분들에게 감사한다. 덕분에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현자 감독의 지독한 훈련과 지도력으로 2년 만에 다시 페이스 찾은 듯하다.

 

사자를 이긴 하이에나의 기분과 다시 찾은 기록으로 얻은 성취감도 물론 잠깐 머물다 갈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 인생은 그런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은 금방 사라지더라도 우리 기억에 남는다. 머지않아 주로에서 만나게 될 하얀 풍선과 이상한 러너 놈들을  간절히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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