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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이상하게도 봄에 꽃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봄에 여자뿐만 아니라 꽃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사계절을 담담하게 보내는 사람이다. 반드시 제철 음식을 먹어야 계절을 보내는 사람처럼, 계절마다 꼭 필요한 일들을 빠뜨리지 않고 잘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한 번은 좋아하는 계절이 없다고, 봄보다는 가을이 그나마 좋다고 말했다. 늘 주어진 휴식 시간을 즐겁게 지내는 그를 보고있다. 그는 하루를 오감을 통해 섬세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이른 새벽 굳은살처럼 굳은 세상, 이른 아침의 청명한 공기, 자욱한 안개를 지우며 밝아오는 빛의 기운을 알아채는 사람이다. 계절이 바로 그였고, 그가 계절이었다. 봄 꽃이 아직은 아닌데 동네마다 호들갑을 떤다. 아니면 공기도 좋지 않았고, 비도 자주 내렸던 지루한 겨울을 보내니 기쁜 마음이 들어서 일 수도 ..
4킬로미터를 아주 느린 속도로 달렸다. 조짐이 좋다. 인내란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 반드시 겪는 과정이다. 아침 일찍 영동1교로 간다. 자봉이 준비한 음식을 올려놓는 작은 테이블과 가방과 옷들을 두는 돗자리를 동료와 함께 챙긴다. 아직도 조금은 찬바람이 분다. 허벅지 부상을 회복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통증도 없고 걷는 모습도 아프기 전과 다름없지만 나아지는 속도는 정말 더디다. 모여서 인사를 하고, 준비 체조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각자의 페이스에 맞는 속도로, 서로 다른 거리를 달린다. 천천히 달려본다. 달리는 일은 걷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아무리 천천히 달려도 걷는 것보다는 빠르다. 땅에 닿는 발바닥의 형태가 틀리고, 허리와 무릎과 발목에 전해지는 충격의 양이 틀리고, 일단 전신의 자세가 다르다. 그래서 걷는 일은 아무리 빨리 걸어도 달리는..
한 번에 하나씩, 한 마리 한 마리씩이라고 말했다. 한 번에 하나씩, 한 마리 한 마리씩이라고 말했다. 그와 이야기를 해야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는 남자의 행동은 여전했다. 남자에게 달라진 게 있다면 자기가 느끼는 행복은 다른 사람이나 주위 환경에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남자가 화났을 때는 늘 침묵하듯이 살아가고, 남자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 남자는 너무나 조용했다. 침묵과 마찬가지였다. 나서지도 않고, 알리지도 않고, 무어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는 모습은 그가 삶이 별로 재미가 없다는 의미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뻔한 일들이다. 일상을 제법 잘 살아가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다가 갑자기 사이가 가까워지면 -일상적인 평범한 일로 만나거나 함께 하는 일에 더욱 협력을 하게 되면- 갑..
여자는 한참을 뛰지 못하고 있다. 자꾸 말이 끊어진다. 여자는 한참을 뛰지 못하고 있다. 자꾸 말이 끊어진다. 여름이 참 길고 지루하고 또 지루하다. 작년은 수월하게 지냈는데 올해는 111년 만에 찾아 온 폭염으로 푸욱 익어간다. 세상이 생긴 이후로 한 번도 같은 날씨라거나 같은 기후, 같은 아침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다. 모든 날씨는 우주와 자연과 사람 마음이 만들어 내는 유기적 조합이기에 같은 날이 있지 않은 게 당연한 일이다. 여자는 한참을 뛰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말했다. 연골이 닳았는지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여러날이 기약없이 흐르고 있다. 여름을 여름처럼 보내야 가을 겨울에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건 진이 빠져서 버티기도 힘든 날이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좋을텐데 여름 참 치열하네. 안그래?" 여자가 말했다. 말 하고 나면 꼭 확인 받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