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기분은 저조한 기록 때문 만은 아닐 거다. 대가를 치른 후련함도 오래가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서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선뜻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삶도 두렵고, 죽음도 두렵다. 실제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행동 자체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날 결과를 두려워한다. 실패가 불러올지도 모를 부끄러움, 수치, 혹은 자신감과 용기, 자신을 부정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은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시도하고, 어른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삶에서 대단한 것은 없지만 단 하나 용기가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돌아보니 내 삶은 좀 형편없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극히 드문 이유다. 대부분 침묵하고 조용히 삶을 끝낸다. 잘했든 못했든 부정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마라톤, 그 녀석 참 저주스럽다. 마라톤(marathon )은 육상 경기의 한 종목으로, 42.195 km (26마일)의 거리를 달리는 도로 경주다. 다른 것은 그냥 달리기다. 10km, 하프 런, 트레일 러닝, 다 그냥 달리기다. 사실 따지고 들자면 아마추어고, 대단한 달리기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사람에게 마라톤이 무어그리 많은 것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지금도 달릴 수 있다는, 거기다가 42.195km를 완주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과분한 선물이 아닐까. 아침 일찍 서둘러 나가는데 어둠속에서 지켜보는 살벌한 눈이 있었다.
5:30분에 춘천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러 나가는데 한마디 한다. 새벽 5시에 나가면 대회 마치고 뒤풀이다, 3차다 하면서 실컷 놀다가, 꼬박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집에 들어오던 때가 있었지만, 너무 오래전이다. 사람은 이유없이 삶에 들어오고, 이유없이 떠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초기 마라톤 시절에는 당연히 지금보다는 젊었고, 달리는 거리만큼이나 선배와 동료들과 함께 있던 시간도 많았다. 말하자면 그 때는 마음껏 들판을 달리던 농경 수렵 시대였고, 지금은 중세를 지나 정해진 주로만 달리는 정보화 시대다. 달리기와 동떨어진 외모와 장비에 몰두하고, 경쟁과 기록에 집착하고, 바이오미캐니컬 데이터를 측정하는 어린 러너로 가득한 시대다. 차라리 오직 덩치 큰 매머드를 포획하러 힘껏 달리던 시대가 훨씬 더 행복했다는 생각이다. 달리면서 모두가 자기 몸에 집중했고, 순간순간 즐거운 일에 몰입했고, 별로 포기하는 일이 없어서 완주하고 느낀 충만함도 꽤 오래갔다.
"열심이네? 대회는 왜 나가? 풀코스 뛰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운동하다가 죽는 사람이 한둘이냐? 운동 안 해서 죽는 사람이 1년에 530만 명이고, 흡연으로 죽는 사람 수 하고 같아. 그냥 나가보는 거야. 요새 젊은 애들은 어떻게 달리나 보러."
단풍으로 물든 도시 춘천, 달리는 내내 있는지도 몰랐던 의암호의 도도한 물길, 더없이 푸른 하늘 아래를 함께 달리는 러너, 모든 것이 바로 여기, 춘천 마라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다시피 들어온 기록은 저조하다 못해 아주 참패를 당한 기분이다. "누구나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링에 올라 처맞기 전까지는." 자, 어깨에 힘을 빼고, 리듬을 타는 거야. 약간 앞으로 숙이고 골반을 실룩거리면서 경쾌하게 착착착 발을 앞으로 옮기면 돼. 5km 까지는 아주 천천히 가고, 하프까지도 참으면서 약 5초 늦게 달려. 하프를 지나고 37km 까지는 그냥 힘닿는 대로 가. 절대 빠르게 달리지 마. 이제 남은 거리는 만약 힘이 있다면 사생결단으로 달려. 가볍게 주욱 밀고 들어오면 돼. 간단해. 이게 링에 오르기 전에 가졌던 빛나는 계획이다.
달리기에 좋은 날씨다. 온도, 바람, 햇살 모든 게 뭔가 잘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Sub4 주자라고 알리는 C조에서 출발한다. 10km까지 6분 페이스, 20km 까지도 같은 페이스다. 이제는 조금 더 힘을 내기만 하면 된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가운데 하프를 넘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든다. 빨리 지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몸에 기운이 다 빠진다. 페이스를 조금 낮춰보지만 그럴수록 점점 처지는 느낌이었고, 벗어나려고 어느새 옆을 추월하는 D조와 E조 4시간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 발을 맞추다 1km도 함께 달리지 못하고 그대로 보냈다. 계속 늦어져 C조 4시간 20분 페메를 앞서 보낼 때는 나에게 원망하는 소릴 해댔다.
춘천마라톤에서 가장 긴 언덕이 바로 춘천댐을 오르는 오르는 경사다. 신매대교 중간에서 반환을 하고 약 6km 정도 시골 마을 길을 달린다. 강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힘들 때 마을의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간신히 춘성교를 넘어가니 32km 지점이다. 하~ 그만 달리고 싶다. 남은 거리가 진짜 마라톤인데 이미 졌다는 생각이 든다.
포기의 달콤함은 정말 거부하기 힘든 극도의 유혹으로 다가온다. 삶은 모든 순간 '다음에'라는 말로 포기했던 달콤함으로 가득 차 있다. 달리다가 이제 그만 걷자는 생각으로 잠깐씩 멈출 때마다, 전혀 맛볼 수 없었던 달콤함을 몇 번이나 맛을 보았다. 이대로 마냥 걷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결국 다 망친다는 생각에 힘을 냈다. 환자구자 선배를 반환점을 돌 때마다 나보다 앞서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금방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가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끝까지 쫓아가보자고 달렸다.
나중에 들어와서 알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앞지르고, 결국 나보다 늦게 달렸다는 사실이다. 고마웠다. 덕분에 끝까지 있는 힘을 내어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머지는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았다. 훈련에는 만족할지 모르지만, 생활에서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모든 대가를 치렀다. 경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종착역은 모두 같다. 순서도 없고 기준도 없다. 누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날지, 아이가 먼저인지 결혼이 먼저인지도 아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규칙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도 없다. 그걸 삶이라고 부른다.
버스에 모두 올라왔다.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보니 보니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아니, 표정이 전부 왜 이래? 누가 뛰라고 했어? 아니, 누가 목에 칼 들이대고 완주하라고 했냐고?"
"자, 지금까지 인내과 영광의 시간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쾌락의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MT에서 뒹구는 그런 쾌락 말고, 맛있는 닭갈비와 생사를 넘나드는 주로에서 살아남은 동료와 신나는 무용담을 곁들여 소주 한잔 기울이는 아주 즐거운 쾌락을 즐길 시간입니다. 자 그럼 갑시다!"
그토록 원했던 걷는 일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해 막상 걸어보니 차라리 파닥파닥 헤엄치듯 주로를 달렸던 순간이 그리웠다. 인사 불성이 되어 달렸던 길고 아득했던 주로,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지난 게 오히려 아쉽다. 다 끝났다. 아주 통쾌하게 대가를 치렀고 나는 다시 내 삶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
내년에 다시 올 춘천의 가을을 지금부터 그리워한다.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스타트 라인에 서고, 어떤 사람으로 다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지 아무도 모른다. 폼나게 떨어져 보자.

춘천마라톤 완주 기록증

풀코스 완주 상세 시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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