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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신 - 두뇌국과 무뇌국 -펀글 : 서프라이즈 /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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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신 - 두뇌국과 무뇌국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08-30)


이상한 국가 기밀

미국 국무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스티븐 김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국가 일급 기밀 정보를 기자에게 누설한 혐의로 피소되었다. 보통 한 나라의 일급 군사 기밀이라고 하면 그 나라의 군사 기지가 어디에 있다든가 첨단 무기의 내역이라든가 전쟁 전략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적에게 누설되면 자국의 전투력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정보를 말한다. 그런데 스티븐 김이 ‘누설’했다는 기밀 정보는 미국의 군사 정보가 아니라 타국의 군사 정보였다. 타국의 군사 정보를 놓고서 미국 기자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문제의 타국은 북한이고 기자의 소속 언론사는 미국의 우익 매체 폭스 뉴스라고 한다.

작년 가을 폭스 뉴스에는 군사 전문가이자 역사가인 윌리엄 포스턴이 출연했다. 포스턴은 EMP(전자기파) 폭탄의 가공할 위력을 주제로 다룬 소설 <<일초 뒤>>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몇 달 동안 올랐다. 포스턴은 방송에서 미국 상공 백마일 높이에서 핵폭탄이 터지면 전자기파의 파상 공세로 미국의 모든 전자 시스템이 마비되어 주유소부터 은행, 슈퍼, 병원, 군사 기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든 전자 관련 설비가 1초도 못 가서 결딴이 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미국 국민의 겨우 10%만 살아남을 것이라면서 북한은 그런 공격을 퍼부을 능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평범한 미국 시민이 들으면 경악할 만한 시나리오였다.

사회자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자 포스턴은 EMP 무기는 이미 사용되었다고 덧붙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과 미국이 상대에게 엄포를 놓기 위해 지구 상공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의 한 섬에서 EMP 실험을 했는데 무려 1,300킬로미터 떨어진 뉴질랜드에서도 전자제품이 못 쓰게 되었다.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소련과 미국은 영국과 함께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지하 핵실험을 제외하고 대기권, 대기권 외부, 수중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했다.

미국 정부는 왜 자국 군사 기밀도 아닌 타국의 군사 기밀을 일급 국가 기밀로 분류하는 것일까? 북한처럼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적대국의 무기 개발을 막지 못한 무능력이 자국민에게 들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일까? 그러나 EMP 무기의 공포에 대해서는 미국의 극우 정치인 뉴트 깅리치가 줄곧 떠들었고 폭스 뉴스에 나온 윌리엄 포스턴도 그걸 주제로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되었으니 그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미국 정부가 적대국의 첨단 무기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해당 적대국 앞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한의 첨단 무기 보유를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북한의 협상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아니, 꼭 북한과 미국의 양자 관계가 아니더라도, 안보에 불안을 느끼는 나라들은 미국이 인정하기를 꺼리는 북한 무기에 끌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북한의 위상은 올라가고 미국의 위상은 내려간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것이고 스티븐 김을 처벌하려는 이유도 이것이다.


알면서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내가 너의 비밀을 안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로 두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사실 정상적인 나라의 안보를 맡은 정보기관의 가장 중요한 행동 수칙인지도 모른다. 영국인은 절대적인 군사력의 물리적 열세를 극복하고 독일의 침략을 막아낸 ‘영국 본토 항공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영국이 대독 항전에서 이긴 결정적 이유는 영국이 개전 초반부터 ‘에니그마’라는 독일의 암호 체계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는 데 있었다. 영국은 독일의 작전 계획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영국은 독일의 암호 체계를 자국이 해독했다는 사실을 독일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어떤 경우에는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척해주었다. 그래서 독일은 자국의 암호 체계가 적국에 해독 당했다는 사실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까맣게 몰랐다. ‘에니그마’ 암호기는 2차대전이 끝난 다음에도 70년대까지 제3세계에 수출되었다. 영국 정보기관이 해당 국가들의 일급 국가 기밀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자국의 일급비밀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급 기밀로 유지해야 할 이유는 이래서다.

1차대전 당시 미국이 극구 참전을 꺼리다가 나중에 독일과의 전쟁에 합류한 것은 독일이 멕시코 정부에다가 은밀하게 동맹 제의를 한 외교 전문을 영국 정보가 해독하여 미국에 알렸고 이것이 미국을 격분시켰기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가 독일의 외교 기밀을 탐지한 것은 독일이 쓰던 미국의 해저 통신망을 염탐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이 쓰던 해저 케이블은 영국이 개전과 함께 끊어놓았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 정부의 양해를 얻어 미국이 관리하던 해저 케이블을 썼다. 그런데 영국은 동맹국으로 끌어들이려던 미국의 통신망까지 감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의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해서 영국은 우편물로도 동시에 발송된 독일의 대멕시코 극비 제안 문건을 멕시코의 우체국 직원을 매수하여 입수한 뒤 미국 정부에 몰래 건넸다. 또 독일이 자국의 암호 체계가 해독된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당 문건은 주멕시코 독일 대사관에서 암호가 해독된 다음에 유출된 것처럼 꾸며댔다. 1차대전에서 영국이 이긴 것도 영국의 빼어난 정보 관리력 덕분이었다. 최근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먼저 알아냈다고 요란하게 떠벌리는 한국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나 영국 같았으면 국가기밀죄로 다스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 정보부는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한국 정보부는 모르면서 아는 척한다.


국가의 두뇌

‘정보’라는 말은 1876년 일본의 한 소령이 프랑스어로 된 군사 서적을 옮기면서 프랑스어 renseignement의 번역어로 만들어낸 情報에서 왔다. 그러니까 ‘적군의 정황 보고’를 뜻하는 군사 용어였다. 지금은 일본어 情報도 한국어 ‘정보’도 ‘자료’ 내지 ‘데이터’라고 하는 좀 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뜻을 나타내는 말로 더 많이 쓰니까 영어로 치면 information에 가깝지만 원래의 情報는 적국의 동태를 알리는 ‘첩보’라는 뜻, 그러니까 영어로 치면 intelligence에 가까웠다. 2차대전 뒤 미국의 information theory가 들어왔을 때 일본인인 처음에는 이것을 情報라고 옮기지 않고 그냥 ‘인포메이숀’이라고 읽어주었다. 일본에서 나온 영일사전에서도 情報는 information이 아니라 intelligence의 풀이어로 1916년에 처음 나온다. intelligence에는 알다시피 ‘지성’ 내지 ‘두뇌’라는 뜻이 있다.

영어 information과 intelligence는 다르다. 지금은 한국에서 없어졌지만 국정홍보처에 해당하는 부처를 영국에서는 Ministry of Information이라고 부르고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부처를 영국에서는 Secret Intelligence Service라고 부른다. 두 말의 차이는, 앞말은 적어도 나라의 차원에서는 꼭 없어도 되지만 뒷말은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꼭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사바세계에서는 나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면 여러모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배신과 모략이 판을 치는 정글 세계에서는 남의 속셈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언제 망할지 모른다.

서양 역사에서 국경을 넘어서 관철되던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종식된 것은 30년 종교전쟁을 매듭지은 베스트팔렌조약이 1648년 체결되면서부터였다. 그 뒤로는 국민국가끼리 합종연합과 이합집산을 하면서 자국의 국익을 놓고 유럽과 식민지에서 패권 다툼을 벌인 것이 서양의 근세사다.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한 전제는 나 말고는 다 가상의 적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벗이 언제 내 등을 찌르는 적이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풀지 않았다. 그런 나라가 두뇌국이다. 영국과 미국이 혈맹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소련 공산주의가 등장하면서 사이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미국은 적어도 2차대전 전까지는 영국을 불신할 때가 많았다. 영국도 2차대전 직후 빚더미에 올랐으면서도 바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가 1952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영국은 나라 간의 동맹도 자국을 자력으로 지키는 국방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뇌국이 아니었다.

개인은 두뇌가 없어도 두뇌를 가진 다른 개인들에게 업혀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두뇌가 없는 나라를 도와주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두뇌가 없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그래서 이름은 달라도 모든 나라가 약육강식의 국제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어로 치면 intelligence에 해당하는 국가정보기관을, 국가‘두뇌부’를 둔다.


두뇌국의 조건

그러나 국가정보기관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두뇌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뇌국이 되려면 정보의 수집 분석 평가 체계가 자기완결적이고 자기지향적이어야 한다. 자기완결적이라는 것은 제 손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제 손으로 정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뜻한다. 자기지향적이라는 것은 타국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키우는 쪽으로 그런 정보 분석의 결실을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한국 외교관이 스파이 혐의로 리비아에서 추방되었다. 한국의 국가정보원 대표단이 리비아를 방문하여 첩보 행위를 시인했다고 리비아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리비아에는 대규모 건설 공사가 많고 여기에 유리한 조건으로 입찰하려면 관련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리비아 정부가 발끈한 것은 그런 통상적 차원의 정보 입수 활동이 아니라 카다피 대통령의 아들이 이끄는 국제자선단체와 관련된 정보를 문제의 한국인 외교관이 수집했다는 데 있었다. 그 국제자선단체는 최근 이스라엘의 탄압을 받는 가자의 팔레스타인인에게 구호물자를 실은 배를 보냈다. 이런 재단의 활동은 한국의 국익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지만 미국 특히 이스라엘에게는 중차대한 문제다. 한국의 국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국익을 지키는 데 한국의 정보원이 동원된 것이다.

리비아는 한국에 10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청했고 한국 정부 관계자는 리비아가 경제 지원을 요청했다면서 어물쩍 국민의 세금으로 리비아에 배상을 하려는 눈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부터는 미국이 요청하는 대이란 경제 제재에 적극 동참하면서 이란을 포함하여 중동 지역의 대한국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 리비아와 이란 모두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한 지역이고 한국에 대한 국민 여론도 좋은 편이다. 그런데 한국을 휘어잡은 무리가 자기들의 상전인 미국과 미국을 휘어잡은 유대인의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서 한국의 국익을 짓밟고 있다. 이제는 미국을 섬기는 것도 성에 안 차서 이스라엘까지 섬기고 있다.

진정한 동맹은 독립국과 독립국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자기완결적이고 자기지향적인 첩보 체계를 갖춘 두뇌국과 두뇌국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타자의존적이고 타자지향적인 첩보 체계를 갖춘 무뇌국 정권이 부르짖는 동맹은 영원한 똘마니와 시다바리의 길이다.

이런 세력이 다시는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영화배우 문성근 씨가 나섰다. 무뇌 정치인 양성소인 한나라당이 다시는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앞으로 치러질 모든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1 대 1로 맞설 수 있도록, 힘을 모으라고 100만 명의 서명을 받는 운동에 홀로 나섰다. 타국의 국익을 위해서 내 자식과 손자가 죽어야 하는 나라로 두 번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문성근 씨가 일으킨 ‘백만 민란’(www.powertothepeople.kr)에 적극 동참하자.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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