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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증인으로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이유 - 한인섭

지구빵집 2020. 7. 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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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증인으로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이유 - 한인섭 

 

서울 중앙지법 형사합의 25-2부(임정엽 권성수 김선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정 교수의 속행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한 원장은 "참고인 조사, 피고인 조사 때 받았던 질문을 중심으로 기소 우려를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 범위에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하고 한다"라고 밝혔다. 기사 참고 링크 아래의 글은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의 페이스북 글을 옮긴 것임을 알립니다.

 

[피의자 증인으로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이유]

어제 법정에 가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제껏 피의자를 증인으로 내세워 검찰에 유리한 증언을 끌어내 온 잘못된 압박수사. 인권 경시 재판 관행의 문제를 지적하고 바꾸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언론에서 제 증언거부사유를 발췌 소개했기에, 오히려 제가 전문을 공개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사하게 열악한 처지에 있는 피의자 증인에게 적절한 방어권 행사를 위한 지식을 제공함은 법학자의 역할이기도 하고, 변호인들도 법정증인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한 자료로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검사는 피의자 상태를 방치하고 이용해 증언을 압박하지 마시기 바라고, 법원은 피의자 증인의 신빙성에 합리적 의심을 더하는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제가 8분 정도 낭독한 뒤 법정이 휴정했고, 이어 재판부는 증인신청을 철회했습니다. 아래는 낭독한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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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거부사유(요지)

존경하는 재판장님과 재판부 판사님.

저는 피의자/증인으로서 증언거부사유를 소명하고자 합니다.

간략히 요지를 말씀드리고 자세한 것은 서면으로 제출하겠습니다.

○ 형소법 제148조에는 “자기가 공소제기를 당할 염려”가 있으면 증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증언이 공소제기의 자료가 될 가능성이 있을 때나 밀접히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검찰은 저를 처음엔 참고인으로 불렀다가, 다음엔 피의자로 전환시켰습니다. 저는 구성요건이나 증거관계나 시효나 어느 점을 보더라도 피의자로 될 이유가 없기에 피의자로 소환되었을 때 “의아스럽다”고 항의하면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고, 조서 초안에 서명날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현재 피의자로 되어 있기에 공소제기를 당할 염려가 있습니다. 당연히 148조의 요건을 충족합니다.

○ 저는 지난번에 불출석사유와 함께 증언 거부하겠다는 뜻을 재판부에 전달했습니다. 제 증언거부를 받아들일까에 대하여 본 재판부는 검사의 질문사항을 사전에 검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명하신 재판부에서 적절한 판단을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만, 두 가지 점을 유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재판부가 본 것은 검사의 질문사항이었을 뿐이고, 저의 참고인 조서나 피의자 조서를 포함한 검사가 보유한 다른 증거를 확인하고 검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재판부가 기소 우려가 없는 부분이라 판단하더라도 그 판단은 검사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기소 여부는 전적으로 검사의 재량 영역입니다.

따라서 일부의 자료만 보고 공소제기 우려가 있다/없다는 판사님의 판단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확실히 믿고 의지할 수 없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검사는 수사가 일단락된 지 반년 이상이 지나도록 불기소 처분을 하지 않고, 피의자 상태를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제 증언거부의사를 알게 된 5월 14일에 처음으로 “조□ 건은 전혀 형사입건 대상이 아니고 공소시효도 지나 문제가 안된다”라고 재판부에 밝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저는 그런 사실을 통지받은 바 없습니다. 검사로서는 저의 피의자 지위를 방치한 채, 오히려 그런 상태를 이용하여 법정에서 제 증언이나 기타 자료를 모아 증거자료를 보강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증거수집 방법이 진술거부권을 우회하려는 편법적인 게 아닐까 우려합니다.

○ 저는 피의자라고 하지만, 대체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검사는 피의사실을 특정하지 않은 채 2009년부터 2019년까지 광범위하게 질문했습니다. 검사는 수사과정에서 공소시효가 끝난 듯이 보이는 사안조차도 무슨 행사 죄니 무슨 업무방해니 조사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참고인 조사/피의자 조사 때 받았던 질문을 중심으로 기소 우려를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 범위에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제가 수사절차에서 진술 거부한 질문사항의 범위 내에서는 형소법 제148조 증언거부사유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해주길 바랍니다.

○ 일반적으로 볼 때, 피의자 증인은 통상의 증인보다 훨씬 취약할 수 있습니다. 검찰이 참고인을 손쉽게 피의자로 전환하듯이, 손쉽게 피고인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검사의 심기를 거스르면 거듭 검사실로 출석요구, 별건수사, 기소 위협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심리적 위축 상태에서 증언한다고 하면 양심에 따른 임의성 있는 증언이 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 사건 법정에서도 자신이 피의자인지 끝내 함구한 증인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 불안했을 심정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게 됩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본 법정에서 제가 증언을 강요당한다면, 저 같은 피의자 증인에게는 법정이 검찰 조사실의 연장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최소한 피의자증인에게는 진술거부권과 상응하는 의미에서의 증언거부의 범위를 인정해주시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피의자 증인의 경우, 148조의 증언거부권을 ‘눈치 보며 불안하게’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권리행사이자 바람직한 법정문화의 일부로 정착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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