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복숭아로, 누군가에겐 자두나 참외로 여름이 다가올 것이다. 누군가에겐 팥빙수로, 누군가에겐 소매 없는 셔츠와 반바지와 샌들로, 누군가에겐 물놀이로 여름이 다가올 것이다. (김소연, 나를 뺀 세상의 전부)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 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허연, 칠월)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올 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서덕준, 도둑이 든 여름)
자기 몸속에서 풍겨 나는 냄새에 취해 이슬에 가깝게 투명해지는 유령들, 일몰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젖은 태양의 일렁임 (여름밤, 박형준)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기억의 자리, 나희덕)
버스 창문을 여니 새삼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버스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내일부터 정말 추워질 거란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름과 작별하는 날이다.나는 이 시절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이런 여름은 이제 없을 것 같다는 예감에 쓸쓸했다.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 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상소 한 통 써 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일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 내지 않았습니다. 쓸어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몰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 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허연, 장마의 나날)
후회하는 방법을 배우고 우리는 뻘에다 완성되지 못한 낱말들을 적었다. 생애를 다 볼 수 없으므로. 그 여름 낮게 날아가는 새들은 지저분한 털뭉치 같았고 강 건너에선 기울어진 매운탕집 간판들이 울먹이고 있었다. 반지하방에서 기침을 하던 너의 슬픔을 가져오지 못한 게 아주 오래 아프다. 스물여섯 살. 천호동엔 비가 샜고 낡은 관악기 같은 목젖에선 피가 새어 나왔다. 우리의 눈 앞에선 여름내 동쪽에서 왔다는 부표들이 소혹성처럼 떠올랐다. 거문고자리의 별 하나가 죽을 듯이 반짝였고 아침이면 아무르에서 왔다는 새를 보러 가곤 했다. 그해 비에 젖은 고양이들이 부르르 몸을 떨고 나팔꽃들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만 아프자고 너는 떠났고 나는 질퍽이는 뒷골목을 걸어 강으로 갔다. 마음의 짐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놀라운 강의 밀도. (장마 7 , 허연)
겨울은 여름을 떠올리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여름을 떠올리며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아쉬워할 수 있는 계절이다. 여름을 열렬히 그리워하는 밤. (김소연, 『그 좋았던 시간에』 - ‘겨울에 꺼내는 여름’)
잠비: 여름에 비가 오면 일을 잠시 쉬고 잠을 잔다고 하여, 여름에 내리는 비를 이르는 말. *잠비가 내리자,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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