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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미풍,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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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미풍 - ​스테판 말라르메

 

육신은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

도망쳐야 한다! 저기 멀리 도망쳐야 한다!

나는 새들이 취해 있는 것을 느낀다

낯선 물거품과 하늘 사이에서.

 

아무것도—오래된 정원들이 눈에 비치더라도—

나의 심장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아아! 밤들 속에서 비어 있는 종이에

등불 아래 홀로 앉아 있는 이 마음을!

 

가슴에 아직 남아 있는 젊은 여인의 젖이나

아기도, 앞으로의 이야기들도,

배의 선미에 새겨진 그림도

이 마음을 붙들 수 없다.

 

폭풍우에 흔들리는 돛대여!

너를 향해 나는 돛을 올릴 것이다.

권태로운 존재여, 잔인한 희망이

아직도 작별의 손수건을 믿게 한다.

 

​그리고 어쩌면

돛대 없는 배들이—돛대도, 비옥한 섬들도 없이—

그러나 노래하는 선원들의 노래에 이끌려

나의 가슴속에서 떠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 시인이란 ‘손가락으로 여러 감각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는 악기’와 같은 존재이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이끈 ‘시의 수도사’ 말라르메의 비유다. 악기들이 연주하는 것이 허공이고 바람이듯, 시가 노래하는 것은 백지이고 여백이다. 말라르메는 “거기서, 바로 종이 위에서, 내가 모르는 어떤 마지막 별들의 반짝거림이 의식 사이의 한결같은 공허 속에서 한없이 순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발레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며, 허공의 바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의 진동을 백색의 종이 위에 언어화시키고자 했다. 그에게 시란 ‘언어로 사유하는 부재’였다.

 

‘바다의 미풍’은 말라르메의 초기 시다. 슬픈 육체, 다 읽어 버린 모든 책, 눈에 익은 낡은 정원, 밤새 백색의 종이와 씨름했으나 결국 태어나지 못한 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젊은 아내…… 시인의 일상들이다. 손수건이라도 흔들며 이별해야 하는 권태의 거처이기도 하다. 하여 시인은 그것들로부터 떠나고자 한다. 사실은 언젠가 떠날 수 있을 거라 믿는, 그런 잔인한 희망에 시달린다. 폭풍우와 난파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때 미지(未知)의 거품과 하늘에 도취한 새는, 이국의 자연에 도취한 수부(水夫)이며 한 편의 시에 도취한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미지의 세계를 열망하기에 위험을 무릅쓴 채 바람을 따라 떠나야만 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수부가 돛폭의 휘날림으로 배의 향방을 잡고 바다를 항해하듯, 시인 또한 부재의 일렁임으로 언어를 이끌며 백색의 종이를 항해한다. 배의 흰 돛에 유도된 바다는, 곧 부재의 언어에 유도된 미지의 세계와 같다. 그러기에 그는 “없음이라, 이 거품, 처녀시는/ 오직 술잔을 가리킬 뿐;/ 그처럼 저 멀리 세이렌의 떼들/ 수없이 뒤집혀 물에 빠진다”(‘인사’)라고 노래했다. 배가 뭍을 떠남으로써 미지의 바다를 발견하듯, 시인 또한 익숙한 일상을 벗어날 때 아직 씌어지지 않은 ‘처녀시(vierge vers)’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백색의 종이 앞에서 고뇌하는 시인의 고통은, 별의 지도를 보며 어둠과 폭풍우와 암초 따위와 싸워야 하는 수부들의 죽음을 무릅쓴 고뇌와도 같다. “미(美)가 곧 죽음이 아니라면……/ 어떠한 매혹에/ 내 이끌렸는지,”(‘에로디아드’)에서처럼, 미지에의 매혹은 죽음을 무릅쓴 바다의 미풍(微風)이자 씌어지지 않은 ‘처녀시’의 미풍(美風)이기도 할 것이다.

 

말라르메의 ‘처녀시’는 ‘한 권의 책’으로 종결된다. 그는 “세계는 하나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쥘 위레와의 대담에서)으며, 그 책은 “요컨대 단 한 권밖에는 없다고 확신하는 책”이며 “시인의 유일한 임무인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적 설명”(베를렌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라고 했다. ‘말라르메의 책’을, 우주의 모든 것을 종합하는 ‘대작(Grand Oeuvre)’ 혹은 ‘(대문자) 책(Le Livre)'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표현되고 말 것이라는 말라르메의 이 같은 꿈은, 우주의 모든 것이 겹쳐지지 않고 동시에 담겨 있다는 보르헤스의 작은 구슬 ‘알렙(Aleph)’을 연상케 한다.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아름다움을 좇아 익숙한 세계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심혼의 열망과 그 과정 자체야말로 예술의 운명이고 시의 운명이다. 말라르메는 아이와 아내 곁에서 평생을 쌓여 있는 책과 비어 있는 종이와 씨름하며 예술을 살았고 시를 살았다. ‘모든 책’을 읽으면서 ‘단 한 권의 책’을 꿈꾸었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단 한 편의 시’를 향해 정진했다. 모든 시에 저항하며 언어의 본성과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 단 한 편의 시, 씌어질 수 없기에 패배가 예정된 시론을 향한 끝 모를 도전과 헌신의 도정이 그 삶의 전부였다. “나는 들려 있다. 창공! 창공! 창공! 창공!”(‘창공’)이라는 외침이나, “필경 200번이나 이 시를 스스로 읽고 나서 달성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검토해야 할 다른 면이 남아 있는데, 미학적인 면이지요. 아름다운가요? 미가 아른거리는가요?”(카잘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라는 물음처럼, 온몸으로 살아 냈던 시의 실천이 바로 말라르메 시의 윤리이기도 하다. 그를 ‘시의 수도사’라 부르는 까닭이다.

 

말라르메는 1898년, 56세의 가을에 급작스러운 호흡곤란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니, 태워 버리거라. 문학적으로 남길 만한 유산은 없다.”라며 ‘반백 년이나 된 많은 기록들’의 유고 출판을 금지하는 유언으로 남긴 채! 그리고, 백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쓴다. 말라르메여, “내가 꿈을 사랑하였던가?”(‘목신의 오후’)라고 묻던 말라르메여, 당신이 꿈꾸던 바다의 미풍은 ‘아름다운 취기 하나’로, 당신의 모든 책들 또한 ‘한 권 책 속의 주술’로만 남아 있거늘……. 말라르메여, 말라르메여, 21세기 내 아침의 머리가 깨지는구나! 지난 세기의 미풍은 어디로 갔으며, 모든 책들의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여전히 지난 밤의, 20세기의 꿈을 사랑하고 있는가?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é, 1842.3.18~1898.9.9)

 

184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상스의 중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부터 많은 습작을 했다. 20세에 연상의 연인 마리와 런던으로 건너가 영어 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귀국하여 중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귀]를 불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베를렌, 랭보와 더불어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주도했으며, 그의 집에서 열린 예술가들의 모임인 ‘화요회’에서 20세기 초 대표적 문학가들인 지드, 발레리등이 배출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에로디아드], [목신의 오후],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디바가시옹], [던져진 주사위] 등이 있다.

 

글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참고 링크: [김성윤 칼럼]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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