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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한겨레 - 딴지 펌.

지구빵집 2010. 6. 3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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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바이 한겨레

1. 연세대 아카라카 응원현장에서 용역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학생들을 폭행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겨레가 야심차게 내놓았던 인터넷신문 하니리포터를 이제 막 시작했었고 그 일을 보도하는 기사를 썼었다. 한겨레에서는 이 기사를 싣기 전 나에게 확인전화를 해서 기사화해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래도 된다고 답해주었다. 기사에 대한 반응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폭행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내용 자체에 왜곡이 있지는 않았지만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연세대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는 못했고 그 반응은 바로 몇 백 통에 이르는 항의메일로 이어졌다. 대다수가 연세대 학생들이 보낸 메일이었고 그들은 나의 '열등감'을 문제삼았다. 명문대라면 무조건 거부감을 느끼는 찌질이라는 식이었고 너는 어느 대학을 나왔냐,서강대냐 성대냐라며 열등감을 부추기고 싶어했다.

그 순간 나도 연대 학생이지만 문제가 있으면 소속과 관계 없이 비판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꽤 오랫동안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렇게 문제될 줄 알았다면 왜 한겨레 쪽은 좀 진지하게 의논하지 않았나 원망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를 쓴 것도 실어도 된다고 한 것도 나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내가 정리한 바는 이렇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그 논리를 전하는 자의 표현에 문제가 있으면 독자는 논리보다 그 이면의 태도에 더 끌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기자라면 표현력을 키워 최소한 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이 가로막지는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학생 기자에 불과했으나 밀려오는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 이 년 동안 기사를 쓰면서 좀 똑똑해진 듯한 기분을 만끽하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교만했던 게 아닌가. 그동안 정말로 글을 잘 써서라기보다는 현상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실을 포착하여 전달할 줄 아는 날카로움밖에 없지 않았나. 아직 어리니까 잘 봐준 것인데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진실의 힘만 너무 믿다가 내가 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그 때부터 글을 쓰는 양이 급격히 줄기 시작하고 대신 많이 읽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김정란 교수가 '어미'라는 제목으로 의문사진상위원회의 설립을 촉구했던 <한겨레21> 칼럼을 잊지 못한다. 공익 때 점심시간에 읽고 있었는데 아무도 안 보게 화장실에 가서 한참 울고 말았다. 독재에 의해 스러져간 젊은이들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들의 수요집회를 언급하며 어미된 자의 한과 슬픔을 어루만지는 것이 정권교체를 열망한 국민의 뜻이지 않겠냐고 필자는 말했다. 그가 그 글을 쓰면서 그 어머니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아파했을지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독자인 나는 눈물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복학 뒤 사회문제 수업을 듣게 됐을 때 내가 속한 조의 발표 주제는 수요집회였다. 준비해온 자료를 나눠주고 발표를 시작하고 난 뒤 맨뒤에 앉아있던 학생 하나가 내가 발표하는 내용이 다 뻥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으니 거짓말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발표자인 나는 지금도 여의도 국회 앞에 가면 수요일마다 집회를 하고 계신다고 말해주었다. 당신이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게 아니며 사회문제는 바로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문제들이 대부분 아니냐고 반문했다.


3. 그 학생처럼 그런 일이 어딨냐고 말할 수 있을만큼 몇 년 사이 세상이 변한 것일까. 내가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가 97년. 그 해 겨울에 정권교체가 있었다. 그리고 복학했을 즈음에 노무현 대통령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밑바닥에서 서민이 겪는 문제는 여전했다. 그렇기에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적확한 표현으로 전달하는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나는 반대집회에 나갔다.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이 비교적 비중 있게 그 집회를 다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때 집회를 하면서 무슨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경찰이 있기는 했는데 멀리서 서 있기만 했고 나는 연단 위에 올라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늘 보던 언론에서 주로 다룬 문제는 이 외교적 결정이 가져올 파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품격이 있던 민주주의 시절의 이야기이다.

김선일 씨의 죽음 때문에라도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더욱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벌어진 FTA 체결 문제와 청와대비서관의 항의와 뒤이은 사퇴 프레시안에 실린 그의 기사 등을 보면서 정말로 노무현 정권보다 더 서민을 생각하는 정권이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4. 그러는 동안 우리는 최악의 정권을 맞이한다. 더 서민을 생각하는 정권이기는 커녕 토건세력을 비호하고 독립정신을 부정하는 강남 땅부자 정권을 맞이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욕지거리 나오는 짓을 벌인다. 시민은 촛불집회로 뜻을 전달했고 퇴임 순간까지 욕을 먹던 전 대통령은 보고 싶은 그리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들은 시민을 향해 치졸한 복수극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뺏긴 적 없는 금권과 다시 장악하게 된 공권력을 이용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궁지에 몰았다. 기소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검찰과 언론은 한통속이 되어 노무현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광고하듯 찍어대었다.

공직자 한 명 앉히려고 해도 땅투기, 위장전입, 세금탈루 안 한 인간이 없어 온갖 비웃음을 사던 이들은 자기네 편이라고 대충 물타기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이후 받은 후원 가지고 아방궁이네 어쩌네 시계가 명품인데 지 돈으로 샀겠어, 자식들은 미국에 떵떵거리며 산대 이 정도 수준의 이야기를 기사랍시고 사실확인도 안 하고 검찰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적고 찍어대는 언론을 보니 사람이 이렇게까지 역겨움을 느낄 수도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겨레와 경향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한통속이었다. 조중동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부패한 자의 일관성이라고 보면 됐으나 이 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기본적으로 내 일상은 너무 바빴고 그냥 무관심해지기로 했다. 뜯어보지 않은 한겨레21의 표지는 <굿바이 노무현>이었다.

5.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계단을 올라오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내 옆 할아버지에게 한 마디 한다. 노대통령이 죽었대요. 뭐, 정말? 자살했다는데.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머리속이 하얘졌다. 내가 찍은 대통령, 정책적인 견해 차이로 굉장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 어떤 문제는 이해가 되는데 어떤 문제는 납득이 안 되서 가능하다면 따져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던 대통령. 그가 죽었다.

작은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고 했다. 그 날 하루 황망한 기분으로 보냈으나 다음날이 되니 누구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 할 지 분명해졌고 분노는 하늘을 뚫고 나갈 정도였으며 예전에는 느껴본적이 없는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초대받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먹으려고 하는데 먹지 못했다. 친구들은 나를 내버려두고 자기들끼리 외출했다. 소파에 앉아 인터넷 화면을 보며 기사를 읽던 나는 더 읽을 수가 없어서 누워버린다. 누운 상태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엉엉 울었다. 다시 분노한다. 잠시 이성을 찾으려다 울음밖에 안 나온다는 것을 알고 포기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딱 하나. 대한문 앞에 가는 것이다. 봉하마을까지 갈 수 없으면 그거라도 하자. 정동 경향신문사 앞까지 늘어선 줄에 서서 기다린다. 사람들이 나무에 걸어놓은 노란 리본과 포스트잇에 써놓은 글귀를 읽으면서 기다린다. 검은색 테두리가 쳐진 한겨레21 특집을 읽으면서 기다린다.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나는 절할 수 있었다. 조문을 마친 뒤에도 계속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아저씨는 왜 그런 거야, 왜, 왜 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6. 우리가 시민의 적을 응징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딱 하나, 투표였다. 절반의 승리는 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평가와 대안이 등장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재보궐선거에서 야권연대를 해야 하는가? 하길 바란다. 어떤 연대를 해서라도 이 철면피 정권을 끝내주길 바란다. 민주당이 문제의 핵심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참여당은 어떻게 한다고 하는가? 진보신당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봐야겠다. 잘 모르겠다. 나는 잘 모르겠으니 전문가가 알기 쉽게 전해주면 좋을 것 같다. 한겨레가 할 역할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블로그를 통해서도 전문가 수준의 이야기가 많이 올라온다. 그 영향력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언어로서 한겨레가 할 수 있는 제안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이런 기대에 대한 한겨레의 응답은 '놈현 관장사'였다. 직설을 빙자하여 망자를 조롱한다. 전체 내용은 대통령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니 독자의 이해를 바란다고 사과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학생기자로 글을 쓰던 나도 표현에 그 사람의 태도가 담긴다는 점을 깨달았는데 전하고자 하는 논리와 표현은 별개 아니냐고 주장하는 것 같아 거슬렸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경력이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던 나도 표현에 담긴 진실성의 위력을 깨달았다. 그걸 모른다고 하면 당신은 글쓰는 전문가임을 자임할 자격이 없다.

항의가 빗발치고 나니 편집국장 명의로 사과문을 싣는다. 하지만 그 사과에 담겨있으리라 생각했던 일말의 진심도 사실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김선주의 칼럼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놈현'이 자기 아버지와 자신이 그를 부르던 '애칭'이며 관장사하던 민주당-참여당 사람들 '뜨끔했을 것'이고 자기네 기자가 뽑은 제목이 '똑부러진 제목'이라 칭찬해주고 싶다는 투이며 한겨레 비판하는 사람들 다 '노사모(라고 쓰고 노빠라고 읽는다)'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는 식이다.

이 자의 허접한 논리에 대한 반박은 이 기사의 댓글에 전부 잘 정리되어 있다. 대략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다.

1) '놈현'이라는 비하에 담긴 정치적 함의는 분명하다. 대학 안 나온 촌놈새끼라는 게 속뜻이며 학벌주의와 금권지상주의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질병이 반영되어 있는 말이다. 그 역사성을 거슬러올라가면 친독재파, 친일파의 거부감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그걸 다 무시하고 지네 아버지와 지 애칭인데 뭐 어떠냐고 한다. 이 자는 확신범일까 파렴치범일까. 그러니까 정말 그 말의 역사성을 모르는 건가 아는데 한겨레 편들어주려고 모르는 척하는 걸까.

2) '관장사'의 시작은 조문객들 보라고 준 한겨레21 특집호였다. 바로 전 주에 <굿바이 노무현>이라며 결자해지를 요구했던 너희가 한 주만에 노무현을 추모했으니 대단한 입장전환 아닌가. 죽으라고 해놓고 죽으니 나도 슬프다며 같이 울자고 하다니. '뜨끔'해야 할 자는 한겨레이다. 적어도 민주당과 참여당을 비판할 주제는 못 된다. 그러니까 계속 한겨레가 할 일은 '반성 뿐'이다.

3) 똑부러진 제목이라고 자기 편 끌어안는 모습이 애처롭다. 자신이 저지른 짓의 전후도 분별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기자가 표현력을 키우고 어휘 선택에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점은 제쳐두고 읽는 사람 자극 잘 하는 게 최고라며 스포츠신문 연예부 기자의 설레발이라도 자기네 제목뽑기보다 못하다는 식이다. 편들기를 해서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안이하다. 내부 단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살을 에는 격렬한 난장토론이 지금 상황에 더 어울릴 것이다.

4) 비판하는 이들을 노빠로 모는 버릇은 이 정권을 비판하면 좌빨이라고 모는 버릇과 닮았다.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본능적으로 자기보호를 위해 외부를 차단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성숙해가면서 인간은 그 공격 속에도 배울 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는 법이다. 스무살을 갓 넘긴 학생기자였던 나도 비판을 수용하면서 배운 바가 있다. 전문 글쟁이를 자처하는 자가 그런 수용을 할 수 없다고 하면 당신은 헛산 것이다.

7. 사과 이후에 나온 김선주의 칼럼은 한겨레가 나아가는 방향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좌표이다. 김정란 교수의 <어미>라는 명칼럼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렸던 한겨레가 아니다. 이 정권을 지지한 500만 유권자와 강력한 파트너 삼성과 더불어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하지만 나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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