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와 고슴도치 -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오징어 먹물의 원래 용도는 호신용이다. 오징어가 천적에 쫓기거나 위급할 때 먹물을 뿜어 자신을 보호한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지중해 연안에선 먹물을 파스타의 원료로 사용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오징어 먹물이 정력, 간 보호에 효과적이며 특히 여성 건강에 이롭다고 여긴다.
오징어에게 있어 먹물은 벌의 침과 같다. 벌이 침을 쓰고 나서 빠져버리면 죽는데 오징어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심각한 체력 저하를 가져오므로 여간해선 함부로 쓰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오징어는 종족을 잡아먹기도 한다. 고나투스 오닉스(Gonatus onyx) 오징어의 경우 촬영된 109건 중 42%가 동족을 잡아먹는 장면이 있다고 한다.
오징어의 옛 이름은 오적어(烏賊魚)다. 죽은 척하고 물 위에 떠 있다가 모르고 접근한 까마귀(烏)를 확 잡아채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오징어 까마귀 잡아먹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꾀를 써서 힘들이지 않고 일을 해낸다는 의미다.
묵어(墨魚)라고도 불렸다. 먹물이 있어서다. 과거엔 이 먹물로 글씨를 쓰기도 했다. 오징어 먹물로 쓴 글씨는 오래되면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흐릿해진다. 믿기 힘들거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을 ‘오적어 묵계(墨契)’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 가운데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 Dilemma)'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고슴도치들은 날이 추워지면 추위를 막기 위해 서로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려 화들짝 놀래며 서로 멀리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곧 추위를 느끼고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만 이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금 멀어진다.
그들은 추위와 아픔 사이를 왕복하다가 마침내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결국 두 마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가장 평안하면서도 따뜻한 상처입지 않을만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고슴도치들은 결국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서로 간의 '적절한 거리'를 찾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내용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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