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일에 대해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할 수 있다니." 하면서 그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은 늘 회자된다. 마라토너가 아닌 일반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과정, 그리고 결국 다다르는 지점은 모두 동일하다.
긴 문장을 옮기지만 나 역시 공백을 달린다.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서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대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pp.18-19
러빙 스푼풀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멋지다.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과장해서 크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음악이다. 마음을 환하게 하는 그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1960년대 중반에 내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의 기억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다. 어느 것 하나 대단한 일은 아니다. 만약 내 전기 영화가 만들어진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편집 단계에서 전부 커트해버릴 정도의 일들이다. “이 에피소드는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뭐,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흔해빠진 거잖아.”라고 할 정도의 아주 사소한 일들인 것이다. 그렇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그런 흔한 일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닌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거나 약간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여러 가지 흔해빠진 일들이 쌓여서- 지금 여기에 있다. 카우아이의 북녘 해안에.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등대 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이 유칼리나무를 머리 위에서 산들산들 부드럽게 흔들어댄다. p.19-20
똑같은 경우를 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직업에 -적어도 나의 경우라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지만- 이기고 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판매 부수나, 문학상이나, 비평을 잘 받거나 못 받거나 하는 일은 뭔가를 이룩했는가의 하나의 기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p.26
확실히 추운 날에는 어느 정도 추위에 대해 생각한다. 더운 날에는 어느 정도 더위에 대해 생각한다. 슬플 때는 어느 정도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즐거울 때는 어느 정도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앞에서도 썼듯이,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두서없이 떠올릴 때도 있다. 때때로(그런 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소설의 괜찮은 아이디어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p.36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도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pp.36-37
그리고 현재, 나는 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 속에 몸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우습기도 하다. 거기에 있는 나라는 인간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나 스스로도 잘 판단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각별히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 일처럼 생각된다. 나에게 있어 -혹은 다른 누구에게 있어서도 아마 그렇겠지만-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일이라면, 좀 더 분명하게 여러 가지 일을 따져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치부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 나로서는 자질구레한 판단 같은 것은 뒤로 미루고, 거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우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하늘이나 구름이나 강을 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우스갯거리가 예외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pp.38-39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을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손에 들고 읽어준다는 드문 상황도 생겨난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pp.39-40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누가 그런 것을 자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은 인간은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을 통해서만이, 그리고 손에 닿을 수 있는 재료를 통해야만, 사물을 명학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일단 눈에 보이는 형태로 바꿔놓아야만 비로소 납득을 할 수 있다. 지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적인 인간인 것이다. 물론 조금쯤의 지성은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전혀 없으면, 아무리 뭐래도 소설은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에서 순수한 이론이나 도리를 조립해서 살아가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다.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이른바 사변思辨을 연료로 해서 전진하는 타입의 인간도 아니다. 그보다는 신체에 현실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 소리를(어떤 때는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理解度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 나가면 사물의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품도 든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걸려 가까스로 납득을 했을 때는, 이미 때를 놓쳐버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애당초 나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p.44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그날,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중략)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p.53
소설가가 되려는 것과 같은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도 없이 ‘지금이라면 뭔가 나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그럴듯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느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 ‘자, 뭔가를 써야지’ 하면서 알게 됐지만 나는 제대로 된 만년필 한 자루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원고용지 한 뭉치와 1,000엔 정도의 세일러 만년필을 사왔다. 참으로 조촐한 자본 투자였다. p.53
이만큼의 일들을 짧은 기간에 순서대로 처리해 나간다. 그리고 더욱이 뉴욕의 레이스를 위한 연습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이 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욕심을 내고 싶을 정도다. 내 몸이 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욕심을 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소설가로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소설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다.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제 조건이다. 연료가 전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달릴 수 없다. p.120
그러나 재능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경우, 그 양이나 질을 그 소유자가 잘 컨트롤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양이 부족하니까 약간 양을 늘려보고 싶다고 생각해도, 절약해서 조금씩 꺼내 가능한 오래 쓰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 재능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터져 나오고 싶을 때 저절로 분출해버리고, 나올 만큼 다 나와 고갈되면 그것으로 책 한 권이 끝나는 것이다. 슈베르트나 모차르트같이, 또는 어느 시인이나 록 싱어처럼 풍부한 재능을 단기간에 기세 좋게 소진하고, 드라마틱하게 요절해서 아름다운 전설이 되는 삶도 확실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별로 참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 받는다면 주저 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닌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나는 평소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아침나절에 집중해서 일을 한다. 책상에 앉아서 내가 쓰고 있는 일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보지도 않는다. 설사 풍부한 재능이 있더라도, 아무리 머릿속에 소설적인 아이디어가 충분해 있다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지독한 충치의 통증이 계속된다면 그 작가는 아마 아무것도 쓸 수 없지 않을까? 집중력이 격심한 통증에 의해서 방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p.120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 -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요구된다. 호흡법으로 비유해보면, 집중하는 것이 그저 가만히 깊게 숨을 참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숨을 지속한다는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해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작업이다. 그 두 가지 호흡의 밸런스가 잡혀 있지 않으면 몇 년 동안에 걸쳐 전업 작가로서 소설을 계속 써나가기 어렵다. 호흡을 멈추었다 이었다 하면서도 계속할 것. p.120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p.125
이것도 확실히 ‘장거리형’ 체질이다. 나는 매일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맥박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긴 거리를 달린다고 하는 기능에 맞춰 신체가 맥박 수를 조정한 것이다. 처음부터 맥박이 빠르고 그것이 거리를 달려감에 따라 점점 올라간다면, 심장은 바로 파열해버린다. 미국의 병원에 가면, 우선 간호사에 의한 예비 진단과 같은 절차가 있어서 맥박을 재는데 언제나 “아, 당신은 러너군요”라는 말을 듣는다. 장거리 주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모두 비슷한 맥박 수로 되어가는 모양이다. 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추어냐 프로냐 하는 것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새겨 나간다.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스치면서 서로의 호흡의 리듬을 들으며, 서로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들이 서로의 상대의 어법을 교감하는 것처럼. p.131
내가 상당히 완고하다는 것과 같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 근육은 완고하다. 근육은 기억하고 인내한다. 어느 정도 향상도 된다. 그러나 타협은 하지 않는다. 융통성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것이 나의 육체이다. 한계와 경향을 지닌 나의 육체인 것이다. 얼굴이나 재능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어도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이를 더해가면 그런 안배가 자연스럽게 가능해지게 된다. 냉장고를 열어 거기에 남아 있는 것만 써서 적당한(그리고 어느 정도는 맛있는) 요리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사과와 양파와 치즈와 우메보시 밖에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p.132
수면은 나날이 미묘하게 변화하고, 색이나 파도의 형태나 유속이 변해간다. 그리고 계절은 강을 둘러싼 식물과 동물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변모시켜 간다. 여러 크기의, 여러 모양의 구름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가고, 강은 햇살을 받아서 그 하얀 구름이 오가는 것을 어느 때는 선명하게, 어느 때는 애매하게 수면에 비춘다. 계절에 따라서, 마치 스위치를 전환하는 것처럼 바람의 방향이 변화한다. 그 살결에 닿는 감촉과 향기와 방향으로 우리는 계절의 추이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런 실감을 동반한 흐름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의 거대한 모자이크 속의 미세한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 다리 밑을 지나는 강물처럼 교환 가능한 자연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140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니만큼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그와 같은 자세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어딘가에서 그 에너지를 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기초 체력 위에 그 에너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할까? pp.149-150
이렇게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면서 어떻게든 계속 달리는 사이에, 75킬로 근처에서 뭔가가 슥 하고 빠져나갔다. 그런 감각이 있었다. ‘빠져나갔다’라는 말 이외에 그럴듯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p.172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계속 달리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 무렵에는 피로하다고 하는 것은 내게 그다지 중대한 문제는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 피로에 지쳐 있다는 것이 ‘늘 그런 상태’라고 하는, 이른바 상태常態로서 내 안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들끓고 있던 근육의 혁명의회도,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일일이 시비를 거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 더 이상 누구도 테이블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컵을 던지지 않았다. 그들은 피로에 지친 모습을 역사적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혁명적 성과로 그저 묵묵히 수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규칙적으로 팔을 앞뒤로 흔들며, 다리를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기만 하는 자동적인 존재로 변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자 육체적 고통마저 거의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사정이 있어서 처분할 수 없는 보기 싫은 가구처럼,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린 것이다. pp.173-174
그리고 오래간만에 매우 순수한 심정으로, 지금 나는 마라톤 풀코스를 위해 매일매일 달리는 거리를 쌓아가고 있다. 새로운 노트를 펼쳐놓고, 새로운 잉크병을 열고, 거기에 새로운 글자를 쓰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활달한 기분을 다시 품게 되었는가, 지금은 아직 차근차근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없다. 케임브리지 거리와 찰스 강변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전에 느끼고 있었던 마음이 되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무심하게 달리기를 즐기던 나날의 기억이 그리운 정경과 함께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어떤 종류의 피하기 어려운 조정이 진행되고 있어, 그 때문에 필요로 했던 기간이 드디어 끝났다,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나는 기록에 도전하는 무심한 젊은이도 아니고, 한낱 무기적無機的인 기계도 아니다.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자신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해가려 하는, 한 사람의 직업적인 소설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경험과 본능뿐이다.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뭔가를 더 생각해본들 소용없다. 이제는 당일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능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딱 한마디, ‘상상하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브루클린에서, 할렘에서, 미드타운으로, 수만 명의 주자들과 함께 뉴욕의 거리를 달려 나가는 내 모습을. 몇 개인지 모를 거대한 강철의 현수교를 내가 넘어가고 있는 것을. 번잡한 센트럴파크 사우스를 따라 달리면서 결승점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의 기분을. 레이스를 완주한 후에 먹으러 가는, 호텔 근처의 고풍스런 스테이크 하우스를. 그런 광경은 온몸에 조용한 활력을 가져다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캄캄한 어둠의 세계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을 그만둔다. 침묵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그만둔다. p.202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의 편린 같은 것이 보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태평양 상공에 덩그러니 떠 있는 무심한 여름 구름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구름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 -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내용에 비해 너무 무겁고,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 p.229
그러면 그때 그녀는 조금씩 롤링의 움직임을 늘려 나갔다. 아주 조금씩. 그것도 “이건 롤링 연습입니다”와 같은 말은 하지 않고, 개별적인 몸의 움직임을 가르쳐 나간다. 그 가르침을 받는 쪽은 그 연습의 구체적인 의도는 모른다. 그저 들은 대로의 몸의 그 부분을 차근차근 움직이고 있을 뿐. 어깨 돌리는 법을 배울 때에는 어깨 돌리는 법만 집요하게, 아주 싫증이 날 정도로 반복시킨다. 어깨 돌리는 법 연습만으로 하루가 끝날 때도 있다. 이건 상당히 피곤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품 조각이 전부 조립되어 전체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거기서 처음으로 개별 부품의 기능을 알 수 있게 된다. 밤이 새고 하늘이 밝아지면, 그때까지는 그저 뿌옇게밖에 보이지 않던 집의 지붕 모양이나 색깔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과 같다.
과호흡 문제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뻔뻔한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신경질적인 데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타트 전에 그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니, 나로서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고 정신적으로 물속에 푹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측면도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스포츠에 있어서는 전제 조건과 같은 것이다.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트라이애슬론이나 풀 마라톤이라고 하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잘 된다고 하는 가정이지만) 다다를 수 있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 -혹은 훨씬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 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러고 경험칙으로써. p.257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pp.257~258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놓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19**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pp.257~258
이미지 http://blog.ncsoft.com/?p=29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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