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행

원불교 대종경 교의품 5장. 일원상의 수행은 어떻게 하나이까.

지구빵집 2018. 7. 8.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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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쭙기를 


일원상의 수행은 어떻게 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하나니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천지 만물의 시종 본말과 인간의 생·로·병·사와 인과 보응의 이치를 걸림 없이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마음 가운데에 아무 사심(私心)이 없고 애욕과 탐착에 기울고 굽히는 바가 없이 항상 두렷한 성품 자리를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모든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쓸 때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오직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하자는 것이니,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견성(見性)이요,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것은 양성(養性)이요,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은 솔성(率性)인 바, 우리 공부의 요도인 정신 수양·사리 연구 ·작업 취사도 이것이요, 옛날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戒定慧) 삼학도 이것으로서, 수양은 정이며 양성이요, 연구는 혜며 견성이요, 취사는 계며 솔성이라, 이 공부를 지성으로 하면 학식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총명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다 성불함을 얻으리라.


일원상의 수행


김 주원


일원상의 수행은 원불교에서 행하는 수행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원의 진리가 곧 제불 제성의 증득하신 자리이고 우리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임을 깨치시고 그 진리를 일원상으로 상징하여 나타내심과 동시에 이를 수행토록 하셨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수행은 그 진리를 깨쳐 얻자는 것이고 제불 제성의 증득한 자리에 나도 계합하자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자가마니보주(自家摩尼寶)를 증득하여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원상 수행의 목적은 신통 묘술을 얻거나 다른 기이한 행적을 나투기 위함에 있지 않고 오직 나의 본래 참마음을 발견하여 회복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며 부처님이나 성자가 다른 분이 아니라 그 마음을 찾고 그 마음을 기르고 그 마음을 쓰시는 분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자가마니보주(自家摩尼寶)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이 말씀은 원불교에 입문하여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를 일러주신 법문이다. 먼저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해야 된다. 오직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한 처지로서 그 진리 세계에 들어가기로 하면 굳건한 신앙이 자리잡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근원이 없는 물과 같아서 메마르기 쉽고 뿌리없는 나무와 같아서 대지 기운을 흡수하여 자랄 수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진리에 깊은 신앙을 뿌리할 때 진리와 마음이 연하여 그 기운을 얻을 수 있고 또 신앙이 뿌리할 때 분명한 목적 의식과 확신을 가지고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없는 수행은 잘못하면 사도에 흐르기 쉽고 또한 대도를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진리를 깊이 신앙하여 마음을 귀의함과 동시에 진리의 절대한 위력에 의지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마음의 표준삼아 그 힘을 얻기에 노력하자는 것이다. 과거에는 신앙과 수행 어느 일면을 강조하고 중시하는 종교 교리가 있었으나 대종사께서는 일원상 수행장에서 신앙함과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으라고 하시어 두가지가 서로 떠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또한 표본을 삼으라 하신 말씀에 대단히 큰 의미가 있음을 생각한다. 표준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큰 공력을 들인다 해도 결국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 수행의 표준을 잘 잡아야 되는데 대종사께서는 일원상을 드러내시어 누구나 바로 여래의 표준을 가지고 조금도 틀림없는 수행을 하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신앙이 돈독한지 내 마음에 일원상을 수행의 표준으로 모시고 사는지 대조하여 이를 확립해 놓아야 비로소 참된 수행을 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여기서 부터는 일원상 수행의 과정을 밝혀주신 것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일원상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는 즉 일원의 진리를 체득하고자 하는 이는 그 진리를 믿고 표본을 삼아서 먼저 표본과 똑같은 그 마음을 알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알아야 기를 수도 있고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른다면 무엇을 기르고 무엇을 써야 될지 알 수가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먼저 일원상과 똑같은 내 마음이 과연 어떠한 마음인지 찾아 알아야 하는데 수행자가 그 마음을 좀더 쉽게 찾도록 하기 위하여 다시 밝혀 주신 말씀이 원만구족 지공무사의 표준이다. 도형으로 나타낸 일원의 마음을 언어로 강연히 표현하자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상태라는 것이다. 원만이란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모두에게 두루하고 전체를 다 감싸고 있는 마음의 양태라면, 구족이란 그러한 마음 속에 모든 것을 다 내포하고 있는 묘용을 나타낸 의미로 보겠고 지공무사란 그러한 마음이 쓰여질 때 지극히 공변되어 일호의 사가 없이 전체심, 큰 공도심, 큰 덕을 나투는 은혜의 마음으로 나타내지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성품의 원리를 공원정(空圓正)으로 볼 때 이 원리를 용심(用心)을 위주한 표준잡기 쉬운 표현으로 바꿔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일원상 수행에서 그 표준을 원만구족 지공무사로 밝혀 주신 것이 활동하는 시대의 활불을 염원하신 대종사님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원불교적인 중요한 어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원상을 화두 삼으라 하셨듯이 우리는 먼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이 화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늘 이 어떠한 마음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사대강령의 첫 번째 말씀하신 정각이다. 우리는 천각 만각을 통해서 대각을 이루게 될 것이다.늘 찾고 찾는 공부가 연구 공부요 혜며 견성이고 도통이다. 그 일 그 일에 찾아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의 표준을 완전히 얻은 분은 성불의 한 단계를 올라섰다고 본다. 이제 찾은 그대로 지키고 쓰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거에는 오전(悧前) 수행은 오염수(汚染修)라 한 것도 완전한 표준을 얻어야 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라 생각된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이것은 양성 공부요 정(定)이며 수양공부이다. 수심결에 성태장양(聖胎長養)이란 말이 있다. 어린아이를 낳았지만 오래 길러서 완전한 성인이 된 뒤라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듯이 불보살의 마음은 생겼지만 오래 오래 공을 쌓아서 그 마음에 완실한 힘을 얻어야 비로소 부처의 인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본래 마음의 모습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 마음의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을 수 있도록 공부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성품의 힘을 기르는 양성 공부이다. 우리의 성품을 무엇이 들어서 도적해가는가 삼독 오욕(三毒五慾)과 착과 상이 들어서 본성을 덮고 물들이고 가리고 도둑해 간다. 그러니 이것을 닦으면 본성이 함양된다. 따로이 본성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닌 것만 놓으면 그 자리가 바로우리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의 본고향이다. 그러니 경계를 당하여 부동하고 안으로 방심하여 마음을 망녕된 세계에 흘러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양성 공부의 핵심이 된다. 그렇게 오래 오래 공을 쌓고 보면 칠정(七)에 부동하고 일체의 착심과 상이 비어서 원만한 성품을 수호하여 동정삼매의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불의 두 번째 단계를 밞음이 될 것이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


이것은 솔성(怯) 공부요 계(戒)며 작업취사 공부이다.

수행의 구경 목적은 자비로써 세상을 구제하는데 있다. 안으로 일원상과 같은 마음을 찾고 그 마음을 보존했을지라도 밖으로 육근을 작용할 때에 조금도 원근친소나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고 과불급이 없는 중도행을 나투어 천하를 유익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진리의 실천자가 되지 못하며 성품의 체용을 다 증득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이 솔성 공부는 공부의 구경이자 성불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대산 종법사께서는 솔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기를 견성을 백점이라면 양성은 천점이며 솔성은 만점이라고 까지 하셨다. 아무리 견성을 하고 양성을 해도 솔성에 어긋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 안으로 원근친소와 희로애락이 끊어진 청정한 자리에 바탕하여 밖으로 천하를 위하는 큰 공심(公心)으로 중도를 행하는데 노력해서 무위이화의 대덕이 나타나도록 심공을 쌓아가야 한다. 그렇게 오래 오래 공을 들이면 드디어 육근 동작이 다 법으로 화하여 만에 중생이 본받을 만한 지경에 이르게 되어 부처의 인격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상의 견성 양성 솔성의 공부가 진리를 증득하는 가장 바르고 빠른 길이 되는 바 제불 제성이 이 공부외에 다른 공부로 부처되고 성인이 되신 분은 없다. 그러니 우리도 이 세가지 공부를 죽기로써 하면 부처를 이룰 수 있는데 그 방법이 삼학 공부이며, 삼학을 구체화 시킨 것이 훈련법이고, 동정간 삼학을 병진하는 것이 무시선 무처선이다. 이 세 가지 공부는 선후가 있는 듯 하나 그 실은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그 힘이 바탕되어 공부가 진취되어 나가는 것이다. 공부는 일조 일석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에서 열 백 천 만 무량에 이르도록 하고 또 하고 또 해서 대적공과 대정진으로 삼대력을 얻어 나가는 불자들이 되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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