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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빈집>

지구빵집 2019. 9. 1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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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봄의 그대는 벚꽃이었고
여름의 그대는 바람이었으며
가을의 그대는 하늘이었고
겨울의 그대는 하얀 눈이었다

그대는 언제나
행복 그 자체였다

 

 

<사계, 강현욱>

나는
어느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날 나는 태어났고
어느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날이니까.

나의 시는
어느날의 일이고
어느날에 썼다.

 

 

<김용택, 어느날>

 

마감일은 지났고
쿠폰 사용 기간도 넘겼고 케이크도 상했고
미련스레 기다리던 사람도 욕을 하며 떠났다
아버지도 죽었다
이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아랫배는 아프고
생리는 안 터지고
달걀은 프라이가 되거나 치킨이 되고
인간도 아닌 것이거나 인간 이상이거나 다 인간이고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많은 소리를 지껄였고
검은 코트는 다섯 벌이나 되고
갔으면 갔다가 돌아왔을 시간 동안
갔으면 수만 가지 꿈에 빠졌다가
일어나 밥 먹고 물 마시고 다시 수백 명하고 잤을 동안
죽었으면 물통이 되었을 시간
갈까 말까 머뭇거리는 동안
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어제는 등기우편을 찾으러 갔다
집으로 두 번 방문했다가 사람이 없어서 우체국에서 보관하고 있다나 뭐라나
아는 시인이 보낸 청첩장이었는데 결혼식 날짜는 그저께였다
이런 내 인생
한심한 돌멩이
공기에 삭는다
자살도 살인도 용서도 사랑도 포기도 체념도
또 뭐 있더라
이 터무니없는 관념적인 단어들은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그러는 사이
저절로 비가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불고

 

 

<김이듬, 오늘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 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 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
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밤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은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돔아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 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히 적시던 헝겊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기형도, 비가2 -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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