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모음

지금 나는 어떻게 나를 길들여 가고 있나. 혜국스님 설법

지구빵집 2020. 8. 25. 22:03
반응형

 

 

지금 나는 어떻게 나를 길들여 가고 있나”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마음수행법 화두참선법이 올곧게 전하는 나라가 없다는 게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보살님들은 마음의 행복을 찾아서 가는 곳곳마다 내 삶이 곧 행복인데, 우리 중생들은 지금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오로지 아들딸들을 위해서, 내 아들 딸들을 위하면 다 행복할 걸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재산만 많이 물려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의 복을 짓고 있는가, 행복지수가 과연 얼마인가를 물어봐야 합니다.

저는 남국선원 올 때마다. 이곳에서는 해제 때인데도 훌륭한 스님들이 선방에서 화두 참선하는 모습을 봅니다. 산철에도 열 명이 넘는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나라는 불법이 살아있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만일 법보만 있고 그것을 실참해서 참구하는 수행자가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살았지마는 그렇게 아들딸만을 위해 정신없이 살 게 아니라 눈 딱 감고 나면 내 마음 농사를 얼마나 짓고 살았는가, 나는 행복지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걸 꼭 돌아봐야 합니다.

전 세계인들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보다 몇 백 배 잘 살면서도 왜 그렇게 불행하냐 하면 첫째가 남과 비교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대지의 법칙은 우리가 사는 진리의 법칙은 편안한 것이 30%가 생기면 불편한 것이 상대적으로 30%가 생겨납니다. 편리한 것이 50%가 생겨나면 불편한 것이 50%가 생겨납니다. 문제는 우주를 파괴하는 전자파 같은 불편한 것은 영원히 남아 있어 이 우주를 망치는 이상기후 같은 것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려면 지금이라도 부처님 가르침,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떠나서 내가 부처다, 내 마음 안에 있는 행복을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나를 길들여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런데도 우리는 얘들을 지금 학원으로 학원으로만 내몰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영악해지기만 하고 있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구에서는 이미 이래선 안 되겠다 해서 불교의 바람이 엄청나게 불고 있습니다만 정작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딸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부터는 우리 집만이라도 남과 비교하지 말고 부디 부처님 가르침,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내 한평생 정말 보람되게 살려면 마음의 행복을 찾아서 나아가야지 된다는 마음을 내야합니다. 그러려면 가족 모두가 자기 마음 길들여 나갈 때, 내 마음농사 지어나가는 법, 이것을 가르쳐나갈 때 이 지구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설산 에베레스트 산을 갔던 사람들이 이상 기후 때문에 아이젠 없이 올라갑니다. 우주자연의 이치를 모르고 살다보니 정작 자손들이 설 땅이 없어져 버리고 있는데 우리는 돈 돈 돈만 조츨^^ 것이냐를 생각해 보십시오.

절집에 만일 수행자들이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겠습니까. 아 스님들이 안 계시면 승보가 안 계시면 어떻게 이런 불법이 전해지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도량을 가꿔야 되는 데 봉사단들도 내 마음 농사짓는 시간이구나라는 생각으로 도량을 가꿔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봉사를 해야 합니다. 명실공히 불법승 삼보를 모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가치관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태양은 늘 밝은 광명을 비춥니다. 엄청난 밝은 빛을 비추는데 왜 어둠이 생기는가. 왜 본래 청정한 부천데 왜 죄가 생겼느냐. 이것은 어째서 이 우주가 창조되었느냐 하는 물음과 꼭 같습니다.

저 허공에다 침을 뱉어 봐요. 허공에는 침이 안 묻습니다.

허공에다 먹물을 끼얹어 봐요. 허공엔 안 묻습니다.

텅 빈 그릇은 더럽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감정이 욕망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고 미움을 느끼고 하는 것이지 감정이 더럽혀 진 것이지 본래 마음에는 더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태양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광명에 등을 돌려 어두운 것이다라는 겁니다. 완전하게 밝은 내 마음 광명에 무엇이 등을 돌려서 죄업에 끄달리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몸뚱이 한 번 보십시오.

우리 몸이라는 컴퓨터 안에 입력된 정보는 우주에 있는 정보다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입력시킨 사람이 있을 때만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력시켰다는 것은 내가 내 욕망 따라 업을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고죽고 나고죽고 하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야겠다고 하는 것, 부처님 법 만나고, 정법 만났을 때 마음 발심한 번 못했다면 천추에 한이 될 것입니다. 부디 마음 공부하십시다.

오늘 나는 내 마음을 위해 얼마만큼 농사를 짓고 있는가. 그러려면 시간만 나면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 내 번뇌 망상 업을 따라 산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입니다.

인간된 몸보다 더 공부하기 좋은 때는 없다.

아들딸 아들딸 하지만 아들딸들은 자기 복만큼 밖에 못산다는 것입니다. 자기 복이 없으면

아무리 천금을 줘봐야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제는 마음 수행하는 법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감정에 따라 가고, 유행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가, 얼마만큼 내 마음을 돌아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도 감정의 노예가 됐구나, 정말 인간 몸 받았을 때 내 마음 농사 지어 이 공부 하면서 내 마음 한번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닙니다. 잠깐 빌려 쓰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럼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 나는 누구인가, 참 나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으로 ‘나’고 인연법으로서 ‘나’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지금 들국화가 만발했습니다. 손가락에 불을 태우고 소백산 도솔암에서 오직 공부만 해야지 했는데 온갖 망상이 다 떠오르니 공부가 안 된단 말입니다.

솔잎 한 되 박 짊어지고 지리산을 헤매다 그만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그때 하얗게 핀 들국화가 있었습니다. 그 향기와 모양이 얼마나 곱던지, 그 들국화는 남이 보든 안보든 최선을 다해 피었단 말이지요.

그걸 보면서 알았습니다. 이 공부는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구나라는 걸.

들국화 향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의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향기는 줄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수화풍 인연에 의해 꽃이 핍니다. 인연에 의해 생겼단 말입니다.

대지가 여러분들에게 흙기운을 보시하고 허공에선 공기가 보시하고 하늘에선 태양 열에너지를 보시하고 연기법에 의해 내가 살고 있습니다. 내 혼자 난 게 아니고 연기법이 우주 전체구나, 그 연기법을 알려주시려고 부처님은 홀연히 꽃 한 송이를 떡 들어보이셨구나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내가 아니고 내 마음이 내가 아니고 본래 연기가 맞아 떨어졌을 때만 생겨났다면 이 몸뚱이가 점점 없어져 버리면 이 공부하기도 어렵겠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땐 정말 쉬웠는데 없어져 버리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바깥으로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은 내 안에 있는 기운을 바깥으로 낭비하는 것이고 이걸 ‘이 뭣고’로 바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마치 물이 흘러, 바다로 흘러 모든 것이 하나로 되듯 나와 너는 둘이 아니구나, 여자와 남자는 둘이 아니구나 할 때, 그런 마음이 들 때 우리는 발심을 했다고 합니다.

부디 주력이든 절을 했든 기도든 참선이든 열심히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연기법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에 번뇌 망상은 내가 만들어놓은 환영이다, 마치 영화 화면처럼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기법으로의 ‘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영화 화면 같은 그림자를 보고 ‘나’라고 착각하고 있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화두’만이 내 본질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설사 안 맞는 게 있더라도 시간만 나면 이 뭣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인가를 물어보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입니까.

부디 번뇌 망상이 날뛰는 몸뚱이 감옥을 만들지 마십시오. 번뇌와 망상을 ‘이 뭣고’로 바꾸고 바꾸다 보면 번뇌 망상이 부처가 되면 만리창천에 우주 전체가 가을날 보름달 환히 비추듯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환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화두의 고마움이여.

부처님께서 꽃을 든 고마움이여.

/제주불교

 

 

작든, 크든 모두 다 들어 있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