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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완의 폴리아카데미 1강]언론과 권력

지구빵집 2010. 8. 1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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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완의 폴리아카데미]

1강 언론과 권력 내용입니다

  폴리1.jpg

 

이병완의 폴리아카데미

(http://wanlee.net)

 

날짜와 시간 : 2010년 8월 6일 금요일

장소 : 상무지구 무각사 문화관 3층

주최 : 국민참여당 광주시당 청년위원회

 

봉숭아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하하)

한여름에 시작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봉숭아학당에서 더위를 보내며 즐겁게 보냅시다.

한 30명 모였으면 했는데 25명 오셨네요.

 

술 마시고 노는 것 보다 이렇게 이야기 나누고서 맥주 한 잔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첫 번째 주제로 언론과 권력으로 정했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정리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언론과 권력을 상징적으로 체험하신 분은 누구일까요?

(노무현대통령)

노무현대통령이 아니겠느냐 생각하시겠지만, 김영삼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에서 가장 사랑받았고, 마지막엔 가장 심하게 고통을 당했던 분이라고 봅니다.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정치적 평가를 떠나서요.

 

이분이 92년 대선 때, 87년 민주화이후 처음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조중동이 등장합니다.

그전에는 언론자유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87년 이후 기독교방송, 불교방송, 평화방송(천주교), 세계일보(통일교회), 국민일보(순복음교회)등 종교언론의 보도기능이 살아납니다.

언론이 허가사항이었으나 88년부터는 자유등록이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등록만 하면 가능했습니다.

 

정치에서는 90년에 이루어진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냐?

그전 언론사들은 자기들이 누렸던 기득권이, 민자당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당장 사라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92년 대선이 되니까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결이 됩니다.

언론들은 김대중대통령이 집권하는 경우를 빼고는 누가 집권을 해도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만들기 목표에 ys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조중동을 포함한 전 매체가(한겨레까지) ys지지를 했던게 92년 대선입니다.

 

그래서, 김영삼대통령이 됐습니다. 3당 합당을 통해 구도가 짜였습니다. 그해 12월에 당선이 됐는데, 가장 먼저 초청받아간 곳이 서울 동작구에 있는 조선일보 회장 사저로 초청돼갑니다. 제일 먼저 축하를 받습니다.

좀 이상하죠? 대통령 당선자가 개인의 사저를 초청받아가서 축하를 받게 되는 첫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만큼 ys는 언론에게 가장 열렬히 사랑받고 지지받는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대통령이 된 후에 신문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합니다. 세무조사 했는데, 공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김영삼대통령이 임기 마칠 때 쯤 극적인 배신을 당한 게 언론입니다. 97년 외환위기 오기 전부터 김현철 스캔들이 나왔습니다. 싫어서 라기 보다는 다음 대권주자와의 갈등구조에서 이회창후보 편들기로 인해 그렇게 됐습니다. 끝날 때 쯤 가장 극렬한 배신을 당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은 언론에서 사랑받고 태어난 대통령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김영삼대통령 얘기가 아니라 언론이 권력이 돼버리는 관계가 92년부터 나타났습니다.

언론을 얘기할 때 감시라고 합니다. 워치독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개가 도둑이 들었는데, 짖지 않으면 개가 아닙니다. 애완견이 돼버립니다.

모든 권력이 언론을 애완견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왜 그러느냐? 언론이 뭐냐?

세상이 일어난 일에 대해 자기 의사나 의견을 표현하는 일을 언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론과 공론을 만드는 것. 저널리즘이라고 있습니다. 저널리즘 = 언론 아닙니다.

저널리즘은 다른 표현을 합니다. 통상 정기간행물을 통해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청와대에 있을 때, 일본에서 논설위원단이 와서 점심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중진언론인들이 와서 인사를 하는데 대표논설위원이 언론인이라고 표현해줘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언론인이 아니라 저널리스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당황했습니다.

언론인이나 저널리스트나 뭐가 다를까?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사람은 직업적으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는데

언론인들은 고차원적인 개념입니다. 방송, 신문에 종사하면서 정보전달을 하는 사람은 저널리스트라고 말하고, 언론인은 상위적개념으로 공론을 여론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햇병아리 기자도 언론인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온 표현인데도 언론인이라는 표현에 조심스러워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언론인이라고 하는데 그 속 뜻을 알고 가야 합니다.

언론인은 사상적 지사적 개념이 있습니다.

 

그럼, 권력은 뭐냐? 그 파워가 뭐냐?

대게는 내부관계에서 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고자하는 행위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권력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건 정치권력입니다.

정치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루고 싶은 이상이나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정치권력 쟁취를 하기위한 결사체인 정당이 정치권력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알고 있는 조중동에 대한 개념은 정치권력의 다른 이름입니다. 조중동을 언론이나 저널리즘의 개념과 달리 보아야 합니다.

 

이명박정부가 언론과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맞닥뜨리는 딱 그 시점에 와있습니다. 여러분도 언론을 편식하고 계실 것입니다. 조중동을 멀리하고 한겨레를 가까이 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조중동을 보면 언론이라는 이름의 정치권력을 이명박이라는 정치권력과 맞짱을 뜨기 시작하는 게 보입니다.

 

조선동아 사설들을 보면 이제 본격적으로 냉전으로 들어간 게 드러납니다.

정도는 조금 약합니다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그렇습니다. 유심히 보십시오.

언론이라는 정치권력이 왜 우리나라에서 형성이 됐을까?

왜 김영삼대통령이 가장 극적인 과정을 겪었던 대통령이 됐을까?

 

우리나라 언론의 생성과정이 본래 서구에서 나타난 언론생성과정과 전혀 다릅니다.

무슨 말씀이냐? 최초의 신문이라고 하면 고종황제 때 만든 한성순보가 있습니다. 정부가 만들었습니다. 제국신문, 황성신문이 나오다가 최초의 신문이 독립신문입니다. 서재필이 만든.

 

왜 신문이 필요했느냐?

무지몽매한 민중을 가르치기 위함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청나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독립의 개념이었습니다.

완전히 계몽의 개념이었습니다. 독립협회를 만든 회장이 이완용이었습니다.

그러고 독립문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그 자리에는 영은문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의미였습니다. 그 독립문을 세운 것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이었습니다.

국민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신문이었습니다.

 

일본인이 생각하는 저널리즘과 우리가 생각하는 언론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언론이라고 하면 국민을 계도하고 훈육하고 이끌어간다는 개념이 많습니다.

1920년에, 일본은 기미독립운동이후 문화통치, 일본문화세뇌를 시켜 일본인화하자는 게 문화통치입니다. 그래서 허용해준 것이 신문이었습니다.

그 때, 한글신문인 조선일보가 나왔습니다. 1920년에. 그 일주일후에 나온 것이 동아일보.

 

지금의 신문사와 사주가 다릅니다. 초창기에는 조선일보가 방씨 족벌신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조만식사장이었는데, 경영상태가 나빠지자, 10년 뒤 조선최고의 재벌 방응모사장이 조선일보를 인수합니다. 인촌 김성수씨가 만든 게 경성방직, 중앙학원 고려대학교, 동아일보입니다.

 

문화통치의 수단으로 허용한 것이 언론이고 산업자본이다보니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 1940년에 폐간이 됩니다. 만주사변이후 완전히 없어졌다 1945년에 나옵니다.

해방이후 좌우 중도 정당이 나옵니다. 한민당(미군정과 가장 가까운)이 생깁니다.

좌우대립, 전쟁으로 싸움판이 벌어집니다. 당연히 이승만과 협력해서 보수언론이 됩니다.

 

1950년 이후 여당지가 야당지로 바뀝니다. 6.25를 거치면서 이승만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동아일보가 야당지로 바뀝니다. 부산 4.3시절 독재로 변해가니까 여당지가 야당지로 바뀝니다. 조선, 동아, 경향이 야당지가 됩니다. 여당지들은 4.19이후 없어집니다. 결정적인 계기를 맞습니다. 그 당시 대한민국 경제적 토대가 먹고살기 힘들어집니다. 4.19직전 나온 정치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일제 때가 차라리 나았다.” 였습니다. 그 정도로 먹고사는 게 힘들어집니다.

 

그 당시에는 신문이 기업으로서 역할이 크지 않았습니다. 기업이긴 하지만, 기업적 측면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구독료로 먹고 살다보니 기자들이 지사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승만, 장면 정권이후, 5.16쿠데타 이후, 집중적인 경제개발로 바뀌면서 돈이 생깁니다. 경제개발 이후 시장이 넓어져 광고수입이 주된 수입이 됩니다. 신문이 기업의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1970년 유신까지 옵니다. 4월 7일 신문의날에 박정희가 기념축사에서, 우리와 함께 한 민족중흥의 기수라고 언론을 표현합니다. 박정희대통령은 언론을 다룰 줄 알았습니다. 신문발행허가를 안 해 줍니다. 경제개발 5개년 확장해가면서 자본주의가 커집니다. 기존언론의 파이를 키워주며 정권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신문이 언론의 입장에서 기업의 입장으로 바뀝니다. 박정희는 유신이후 동아일보 광고사건 등 광고로 조정하면서 권언유착의 길을 걸어옵니다. 언론이 권력의 맛을 보면서 언론이 권력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전두환정권이 들어서서 권언유착이 더 강화됩니다. 유신 때 보다 더해집니다.

지방언론들이 있었지만, 통폐합시키고 해지시켜서 일도일사를 만들어 줍니다. 광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경영자입장에서는 수입이 엄청 늘어납니다.

 

유신 때 신문사의 경영다각화를 지원해줍니다. 조선일보 앞 코리아나 호텔 등 다른 여타사업에 진출하도록 차관을 통해 키워줍니다. 5공 때는 각종 세제지원을 해줍니다. 기자들에 대해서는 각종 수당에 대한 세금을 없애줍니다. 그 당시 어려웠던 해외취재 엄청나게 지원해줍니다. 이런 과정을 하다 보니 신문이 권언유착을 통해 완전한 기득권세력이 됩니다.

 

예를 들면 1986년 5공 끝날 때 쯤 자산비교를 하면 4배에서 5배 증가합니다. 100억 이하였는데, 5년 뒤엔 4배에서 5배로 증가합니다. 중앙일보는 400억 500억에서 1500억으로 증가합니다. 언론사종사자들이 사회에서 가장 안정되고 수입이 많은 직종 중 하나가 됩니다. 87년 이전까지 지사적의미의 언론이 자본주의가 들어오고 산업개발이 되고 개발독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경제계 편입이 되고 기득권화가 됩니다.

 

김영삼대통령이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이 된 후 우후죽순으로 언론사가 생겨서 난립합니다. 기존 언론들이 경쟁이 심해지니 불안해합니다. 그 불안함을 가장 안정시켜줄 수 있는 대상이 김영삼후보였습니다. 왜냐? 민자당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기득권을 세력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후보였다고 판단해서 열렬히 사랑하고 지지해줬습니다.

 

그런데 김영삼대통령은 가장 극적인 배신을 당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가장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언론권력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게 97년 대선과정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워치견, 팻견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이 됩니다. 본격적으론 나타난 것이 97년입니다. 2002년 대선 때는 물불 안 가렸죠. 그 대표적인 것이 2002년 아침조간 사설에 정몽준 단일화파기였습니다. 망했다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뿌리는 그렇게 된다는 거죠. 독재정권하에서는 권력이 당근을 줬습니다. 시장독점, 다른 사업 진출 돕기, 세제지원 등 87년 이후에는 채찍을 줄 수도 당근을 줄 수도 없었고 경쟁만 치열해졌습니다. 새로운 방송이 생기면서. 자기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왜 김영삼대통령은 세무조사를 했을까? 공표는 안했지만.

그 분이 권력을 다를 줄 알았던 거죠. 4년 잘 끌어왔는데 97년 권력투쟁과정에서 주류매체들은 이회창을 밀고 있는데, 이회창후보와 김영삼대통령이 갈등관계가 돼버린 거죠. 이인제를 밀려고 하니까 이를 죽이려고 한 거죠. 그 관계에서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사건이 터져나온 거죠. 그 당시 김현철사건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마지막에 딱 나온 것이 조세포탈죄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대통령은 개차반이 되버린 거죠. 유일한 채찍이 세무조사였던 거죠. 검찰도 국세청하고는 갈등을 안 일으키려고 하죠. 여간하면 국세청에서 하지 않는 한 검찰에서 잡아가지 않습니다. 결정적이고 큰 것만 잡아갑니다.

 

예를 들면 한상률 전 국세청장, 미국 가있잖아요. 돈이 움직이는 곳에 사람이 따르고 정보가 따릅니다. 그걸 제일 중심해서 들여다보는 곳이 국세청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광화문일대에 신문사가 있는데, 광화문세무서장은 신문사에서 vip대접받습니다. 그 당시에는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문도 경영입니다. 그 이전에는 초법적인 경영을 해왔습니다. ys는 채찍용으로 세무조사 했지만, 그걸 공표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내가 네 죄를 알고 있는데....... 석양 무렵이 되니 개차반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ys를 한국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랑과 배신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9만 표 표차로 김대중대통령이 탄생합니다. 김대중대통령 집권과정에서 보면 djp로 기득권세력을 안고갑니다. 87년 이전 언론을 의식합니다. 표를 의식하기도 했지만, 기득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랬습니다. 그런 융화과정에서 탄생합니다. 한 2년 잘 갔습니다. 2000년 총선이 문제였습니다. 해놓고 보니 진짜 돈 생기고 그걸 거기다 다 뺏기고 있었습니다. jp쪽에서는 내각제 하라고 합니다. 그러다 분리되어 나갑니다.

 

2000년 가을 쯤 동아일보가 포문을 엽니다. “대구에는 추석이 없다.”라고 “경기가 나쁘다”라고 왜곡보도 합니다. 엄청난 포격을 당합니다. 국정원 로비를 통해 노벨평화상을 탔다고 왜곡보도 합니다. 제 생각엔(일부 언론학자들도 그리 분석하지만.) DJP이후 JP쪽에서 더 이상 피해가 없을 거라고 안도했습니다. 국민의 정부 첫 조각에서 울진출신 김중권을 비서실장을 시킵니다. 통일부장관을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가장 보수적인 인사를 시킵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지나가면서 생각이 달라집니다. JP쪽과 균열이 생깁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주류매체들이 97년 때, 지지층은 불교방송, 기독교방송, 한겨레밖에 없었습니다.

 

언론이 전략적으로 바뀝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니 자기 집안토끼를 보호하기 시작합니다. 조중동 독자들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구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에 기업들이 광고를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효과가 없기 때문에. 강남3구, 중산층, 세상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상품을 만듭니다. 좌파, 우파를 만들어냅니다. 친북이다. 좌파다. 등등. 그 신문들이 진보세력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요즘에 와서 진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북한에 대해 반공태도가 강한, 50대 이후, 강남중심, 중산층이상을 규합하려고 한 겁니다. 고급문화를 강화시킵니다. 명품, 전시회, 음악회 등 1면과 사설에 주장을 내세우고 문화면을 강화시킵니다. 이데올로기를 상품화 시킨 겁니다. 자기는 보수이고 나머지는 좌파라고 만들어갑니다. 왜 그러냐면 언론시장의 변화가 관계가 깊습니다.

 

새로운 신문들(한겨레 등.)이 나오기 시작하니 불안한 겁니다. 98년 SBS가 탄생합니다. 엄청난 광고시장을 휩쓸어갑니다 .광고시장규모가 2~3프로밖에 증가율이 높지 않습니다. 삼성은 80프로가 해외수출이기 때문에 광고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 SBS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다 케이블TV 내놓습니다. 2000년에는 인터넷매체들이 나옵니다. 죽을 맛입니다.

기득권 언론들은 내새끼들 키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구매력을 가진 대상을 단합, 연합시킵니다. 조중동이 같은 맥락으로 갑니다. 그래서 오늘날같은 언론시장이 된 겁니다. 권언유착이 된 겁니다.

 

여기까지 했습니다만, 학문적 이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본론적 얘기를 하자는 겁니다.

조갑제가 이명박정부가 창녀만도 못한다는 선정적인 표현까지 합니다. 언론시장의 변화는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20년 전까지 신문구독률이 70퍼센트였습니다. 20년 후에 48퍼센트까지 떨어집니다. 여러분도 신문 안보시는 분들 있잖습니까? 세계적으로 신문기업의 위기가 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너무 빠른 추세입니다. 일본은 아직도 신문 시장입니다. 아사히, 요미우리 등. 한국에서는 매체의 변화가 급속하게 왔습니다. 20년 과정을 거치니 좌파 우파 등 이데올로기 상품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게 맞지 않으면 부딪치는 겁니다. 이명박정권도 그 중간시점에 왔습니다. 친서민정책이라고 내놓는 것 보십시오.

 

참여정부때 여러 가지로 상생제도를 내놓은 것이 많습니다. 최근 새삼스럽게 상생해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예견했던 것을 그대로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주류매체들이 기득권싸움이 됩 겁니다. “재벌 죽여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는 등. 정책에는 어떻게 반영이 됐는지 다음시간에 얘기합시다.

 

한국언론은 엄청난 혁명기적 변화를 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무슨 말이냐?

여러 가지 시각으로 보시는 분들 많은데, 조중동을 언론권력으로 생각하시는 분들 많은데, 전혀 효과를 못내고 있습니다. 6.2지방선거를 보면 압니다. 그들이 똘똘 뭉쳐서 가도 변화가 없습니다. 언론환경, 정보환경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80년대적 사고(괴벨스적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나치가 전국민에게 라디오를 보급했습니다. 박정희때는 전국에 스피커를 보급했습니다. 70~80년대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변할거다라고 하는데 변화한 적이 없습니다.

조중동같은 언론들이 뭉쳐도, 정보를 접하고 소통하는 장치가 바뀌었는데 그걸 다루려는 권력자 마인드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kbs가 관영방송이 됐는데, 안보잖아요. 갈수록 힘들어지게 됐습니다. 언론의 기본적인 영역이 변화했습니다. 저는 미디어오늘을 봅니다. 다 나옵니다. 거기다 해석까지 돼있고. 16주 동안 강의할 것을 이렇게 짧게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회현상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언론과 권력입니다. 어느 정권도 상생하고 싶지 않은 정권이 없습니다. 김대중대통령도 그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무언가를 어떻게 하기 위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방우영 회장의 형이 방일영입니다. 그 분 고희연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합니다. 같이 잘해보자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코미디언 백남봉씨에게 드린 건 화관문화훈장입니다. YS때는 방우영씨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합니다. 노무현대통령도 제가 홍보수석 때 중앙지, 방송 신문들을 사저로 불러서 토론을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탄핵까지 왔는데. 그때 대통령께서 지금까지 기득권을 인정하겠으나 지금부터는 룰에 의해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문고시, 공정거래위등이 나왔습니다. 구조적으로 안 되는 이유가 종사자들이 언론적 식견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문경영적 생존의 문제가 제일 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몇몇 언론사가 제일 열악한 경제환경에 처해있습니다. 지금은 <언론의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론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대중들이 언론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조금 더 가면 언론인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기자, PD가 되겠다고 하나 보도국 내부의 인과관계에서 자유가 필요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으로부터 자유가 필요합니다. 세계적으로 언론이 위기입니다. 한국에서 유독히 급속, 파행적으로 가고 있습니다.

 

폴리아카데미가 상설화되고 규모가 갖춰져 가면 할 수 있는 건 하고, 내외부에서 새로운 강사를 초청해서 또 자리를 마련해갑시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봅시다. 광주에서 시작해보자 이겁니다. 투표때 동원되는 이게 아니라 평소에 한번씩 모여봅시다. 쌍방향소통을 발전시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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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추가합니다

http://wanlee.net/movie/837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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