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ddanzi.com/news/10033.html
[생활] 아이들이 일깨워 준 감성회로
2010.02.22.월요일
김지룡
나는 무척 감성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대단한 착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돌이켜보면 내가 ‘감성적’이라는 것은 무척 근거가 희박한 일이었다. ‘심야식당(일본 드라마 제목)’ 같은 것을 보다가 가끔 눈물을 흘린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으니까.
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왜?”라는 말에 충실히 대답해 주어야 호기심을 살려주고 지적 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 “왜?”라는 질문에 무척 성실하게 대답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딸아이가 “하늘은 왜 파래?”라고 물었던 것은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빛의 파장과 굴절 그리고 산란을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자.
“무지개 알지. 빛이라는 것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색깔이 섞여 있거든. 그리고 빛은 파도가 치듯이 출렁이는데…”
딸아이의 표정을 보니, 전혀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알아들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진다.
“사람들에게 파란 마음, 고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늘이 파란 거야.”
딸아이는 ‘아하!’하면서 납득해 버렸다.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다섯 살 아이가 원한 것은 그런 감성적인 대답이었을지 모르겠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아들아이가 네 살 때 “바퀴는 어떻게 굴러가?”라고 물었다. 엔진부터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도저히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아내의 도움을 청했다. 아내의 대답은 간단했다.
“자동차는 기름이 밥이야. 자동차가 기름을 먹으면 바퀴가 힘차게 굴러가.”
“아하! 그래서 우리가 주유소에 가는 구나.”
참, 쉽게도 답을 한다.
아이들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 대답이 난감했던 것은 내가 감성적인 인간이 아니라 논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온통 이론과 법칙만 난무했다. 대개의 아빠들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대개 논리적이니까.
사람들은 본심을 숨길 때가 많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의사소통에 장애가 올 수 있다. 말속에 숨은 뜻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숨기기도 하고, 야단을 맞을까봐 돌려서 말하기도 한다.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면 뇌 속의 논리 회로가 아니라 마음 속의 감성 회로를 돌려야 한다.
“학교, 꼭 가야 돼?” “주사 꼭 맞아야 돼?” “구구단은 꼭 외워야 돼?” 아이가 이런 말을 한다면 감성 회로를 돌려야 할 때다. 나는 처음에는 이 말이 ‘예스, 노’를 묻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학교에 꼭 갈 필요는 없어(많은 부모는 나와 다른 대답을 하겠지만)” “주사는 꼭 맞아야 돼”.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생각에 이유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내일 맞을 주사는 OO 예방주사야. 맞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큰 병이 생길지도 몰라”.
하지만 이런 질문들이 ‘예스, 노’나 이유를 묻는 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 꼭 가야 돼?”의 숨은 뜻은 “학교 가기 싫어”이고, “주사 꼭 맞아야 돼?”의 숨은 뜻은 “주사 맞는 것이 무서워”일 수 있다. “학교, 꼭 가야 돼?”라는 질문에는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주사 꼭 맞아야 해?”라는 질문에는 “아플까 걱정 되니?”가 적절한 답일 수 있다.
아이가 “왜?”라고 물을 때 이유를 묻는 것인지 본심을 감춘 말인지 알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표정을 살피는 것이다. 대화는 얼굴을 마주보고 해야 한다. 상대가 말을 할 때 딴 곳을 보고 있으면 본심을 읽을 수 없다.
다만, 본심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아이의 마음을 넘겨짚고 단정적인 말투로 말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너,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야단맞았지?” “너, 주사 맞는 게 무서워서 그렇지” 같은 말을 피해야 한다. 넘겨짚은 말이 맞아도 문제가 되고 틀려도 문제가 된다.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처음에는 신기하겠지만, 그런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자기 마음을 족집게처럼 알아맞히면 당황하거나 수치심을 갖게 된다. 반대로 넘겨짚는 말이 맞지 않으면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준다고 불만을 갖는다.
넘겨짚지 말고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식으로 자세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 적절한 해답일 것이다. 대화를 할 때 절대로 아이의 말을 자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끝마칠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조금 지겹더라도 참아야 한다. 사실 부하직원들도 상사 앞에 서면 긴장해서 말을 더듬거나 장황하게 말하는 일이 많다. 끝까지 말할 기회를 주는 상사가 좋은 상사다.
남자들은 대화를 나누다가 곧잘 가르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총각 시절 이런 버릇 때문에 좋은 여자를 많이 놓쳤다. 상대 여성이 “회사 생활이 정말 재미가 없고 너무 힘들어요”라는 말을 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죠. 힘든 일이니까 돈을 주고 시키는 거죠. 재미있는 일이라면 돈 받고 하게 하겠죠.” 이런 식으로 말하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랴. 상대가 원했던 것은 ‘적절한 위로’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런 버릇이 연애에 지장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고치게 되었다. 아빠가 된 뒤에도 이런 식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나쁜 버릇이 나올 때가 있다. “학교 다니기 힘들다”는 말에 “세상일이 쉬운 게 어디있니?”라는 식으로 말할 뻔한 적도 많다. 아이가 생각해 낼 수 없는 기발한 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섣불리 충고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이가 아침에 책가방 싸느라 허둥지둥 하다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학교에 갈 때 “그러니까 그 전날 미리미리 준비했어야지” 같은 말은 쓸데없는 충고다. 그런 것은 아이도 이미 알고 있다.
리더가 되려면 감성회로를 발달시켜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인 부하직원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의 마음이 훨씬 더 읽기 어렵다. 아이의 마음을 읽기 위해 감성 회로를 작동시키다보면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의사소통의 기술을 저절로 익히게 될 것이다.
P.S. 그동안 몇 번 말했지만, 한 번만 더 말하자. 주말에 자기계발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접할 시간이 없다는 아빠들이 무척 많다. 얼마 전에도 그런 상담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아이를 접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자기계발 프로그램보다 효과가 좋다고 확신한다.
어린이경제교육전문가 김지룡 (http://blog.naver.com/edu_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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