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어떻게든 이별 -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류근 詩

지구빵집 2018. 3. 1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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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만나서 불행했습니다.


그런 때에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보다 떠나간 사랑에 대한 시들이 많은데, 고(故) 김광석의 노래로 널리 불리는 초기 시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토로하던 류근 시의 화자는 긴 세월 상처로 남은 애인, 애인들에게 어느덧 “결별의 말을 남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당신을 만나 “남김없이 불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이제 선뜻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제 기억과 상처에게도 전하는 인사일 것이다. “가족에게 비겁했고, 가족 때문에 비겁했다. 애인에게 비겁했고, 애인 때문에 비겁했다. 시 때문에 비겁했고 시에게 비겁했다”(홍정선). 모든 비겁함에 이별을 고하며, 겪어온 어떤 상처보다 더 쓰라릴 ‘고독’을 화자는 견딜 수 있을까. “내게서 한 걸음도 달아나지 못하고/일없이 왔다 가는 밤과 낮이 아프다”(「고독의 근육」).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일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 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시인들」 전문


 


시집 속으로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상영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버린 영화였다

―「영화로운 나날」 부분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하였다

[……]

그러니 나의 이별을 애인들에게 알리지 마라 너 빼놓곤 나조차 다 애인이다 부디, 이별하자

―「어떻게든 이별」 부분



어머니는 시집간 누이 집에 간신히 얹혀살고

나는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산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는 살아 있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으려고 억지로 몸을 비트는 나무들에게

어째서 똑같은 이름이 붙여지는지 하루 종일

봉투를 붙이면 얼마나 돈이 생기는지

생활비를 받아오면서 나는 생활도 없이 살아 있는

내 집요한 욕망들에 대해 잠깐 의심하고

의심할 때마다 풍찬노숙의 개들은 시장 쪽으로

달려간다 식욕 없는 나는 술집으로 슬슬 걸어간다

[……]

내가 일없이 취해서 날마다 취해서

숙취와 악취를 지병처럼 앓고 살 때

[……]

나는 또 누군가에게 빨리 들켜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절망하고 싶어진다 평화롭게

항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 적군을 향해서

나는 나의 순결한 백기를 흔들어야 하는가

비틀거리며 돌아올 때마다 더 수직으로 빛나는

세상이여 나는 왜 이렇게 너희와 다른가

이렇게 닮지 않으려

몸을 비틀어야만 하는 건가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부분


 


내가 버린 한 여자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고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으론 세상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조차 없었던,


말도 아니고 몸도 아닌 한 눈빛으로만

저물도록 버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어머니,

―「낱말 하나 사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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