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각 바른 글

마스크 뒤에 숨은 웃음꽃들이 가득

지구빵집 2020. 10. 1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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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빠질 준비가 된 것 같아.'하고 말하면서 가을에 물드는 사람은 없다. 날이 가면 갈수록 어느새 가을이 가득 찼다.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다. 아무런 호기심도 없고, 욕망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생각이 없거나 있어도 천천히 하는 나이로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가는 그가 감사함을 느끼는 깊이에 달려 있다" -존 밀러.

생각해보니 요 몇 달은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어 보인다.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만한 일도 없었고(아내와 아들에게는 늘 감사하지만 ^^). 아침을 보는 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 거리를 걷는 일이 기적이라는 데 감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아이들만 있는 집단이 외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방치될 경우, 거기엔 항상 가장 강한자의 압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인 세계의 가장 심한 압제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기 쉽다. 그런 상황이 인간의 본질적인 면일 수 있다. 원시적 서열과 힘의 지배는 단 한 번도 인류에게 벗어난 적이 없는 특징이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타적이고 호의적인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기 위해선 자신의 주변을 호의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이의 과한 요구에조차 때때로 호의적인 주변에서 받아들여진다는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 아이의 중요한 소망에 어느 정도 공감해 주어야 하고, 아이들을 단지 성공의 열망이나 신의 영광, 국가의 위대함 따위의 추상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저절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알려진 것은 없다. 권위를 내세워 가르치는 일은 복종을 기른다. 역시 답은 한 가지였다. 모범을 보이고 인내와 지켜봄을 발휘하지 않고는 가르치기 힘든 것이다. 

2학기 개강을 하고 5주 차까지 온라인 수업을 했다. 4차 산업혁명과 머.신러닝에 대한 강의가 2차시, 4차 산업혁명의 기술과 산업 주제로 1차시의 온라인 수업을 하고 모험 설계 실습으로 들어간다. 행정팀에 대면 수업 진행을 알리고 건물 입구부터 빈틈없는 개인 방역이 이루어진다. 예기치 않았던 상황으로 환경과 장소와 관계가 모두 황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원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인류가 가진 사회성과 관계, 자연을 보면 모여 있어야 한다. 덩굴도 그렇고 나무들도, 심지어 로봇들도 모여 있는 것을 좋아한다. 

큰 강의실에 원형 탁자가 30여 개 놓여있다. 아이들은 서로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앉는다. 둥근 탁자를 좋아한다. 카페를 가도 둥근 탁자가 있으면 전망 좋은 사각 테이블보다 먼저 차지한다. 둥근 테이블은 서열이 정해지지 않는다. 일직선의 자리배치가 없어진 둥근 탁자는 적어도 옆 사람의 표정이나 몸짓도 볼 수 있다. 둥근 탁자에 앉은 사람의 말도 둥글게 나오고, 구태여 말이 도달할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둥근 탁자 여기저기로 굴러가다 적당한 사람에게 도착한다. 자유롭고 통통 튀는 분위기가 저절로 만들어진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대면 수업에 당황한 건 아이들이다. 입학식도 하지 못한 아이들이니 학교에서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몇 번 마주친 친구들과 옹기종기 탁자를 둘러싸고 앉았다. 매일 만나는 사람과는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가끔 만나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닿지를 않으니 대화가 끊기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의외로 강의실이 조용하다. 마스크를 쓴 얼굴에 보이는 것은 반짝이는 눈이지만 표정은 밝아 보이고 언제든 기회만 되면 웃음꽃을 피울 준비가 되어있다. 전공 필수인 과목이라서 그런지 학생이 많은 편이다. 과목 대표를 뽑는다. 아이들을 예민한 고양이 대하듯 다루어야 하는 나이는 지났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는 배워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중이 몇 번 통하지 않으면 존중은 사라진다. 몇 번이나 추궁하자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막힘없고, 다투지 않고, 다양한 요구들을 충돌 없이 포용하는 리더로서 잘 이끌어 달라고 말했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에게 가정 먼저 하는 이야기는 정해져 있다. 교육은 배우는 학생에게 많이 가르치거나 더욱 많은 것을 구겨 넣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교육(Educa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Educo’가 어원으로 ‘이끌어낸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사람 내부에 원래 갖추어져 있는 능력이나 재능을 수면 위로 잡아당겨 확장해 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자기 마음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여러 가지 능력을 원하는 대로 능숙하게 조절하고, 주위 사람들과 협조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자랑할 것도 많지 않아서 대충 자기소개를 하고 남은 11주를 어떻게 배우고 이끌어 내면서 평화로운 항구에 도착할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가급적 말을 줄이고 질문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가 배우는 과목에 대해 설명한다. 아직은 성숙함(성숙함이란 낭만적 사랑이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찾기를,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추구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이어서, 편협하고 다소 인색한 감정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알랭 드 보통)과는 거리가 멀고, 지식을 습득하는 데 뛰어난 아이들과 함께하는 수업은 재미가 쏠쏠하다. 남은 기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직전으로 눈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겨울 방학 시작할 때까지 매 주차별로 배워야 할 것과 학생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

참석한 학생들과 오지 않은 학생까지도 포함해 적절한 인원으로 팀을 만들기로 한다. 전공이 다른 학생들이 서로서로 잘 섞여야 한다. 높은 수준의 돌연변이는 항상 더욱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회로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물질은 대부분 금방 사라진다. 팀 명단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팀 이름은 천천히 정하기로 한다. 아이들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한다. 금세 넓은 강의실이 소란스럽다. 둥근 테이블 옆으로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팀원을 모으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1학기 모험 설계 수업 결과를 요약정리한 자료를 책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한 권씩 나누어준다. 급하게 주문해 받은 4주 동안 학습할 실습 키트를 나누어준다. 무엇을 하든 도구는 배움에 있어서 아주 좋은 방식을 제공한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꼭 필요한 동기를 준다. 오히려 관심이 더욱 빨리 줄어든다 할지라도 그 정도의 역할조차 충실히 수행한다. 박수 두 번! 박수 세 번! 하니 아주 정확히 박수를 치며 조용해진다. '이제 게임을 시작합시다.' 하며 오늘 배워야 할 한 가지를 설명한다. 소프트웨어를 배운다는 것,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일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고, 가장 중요한 프로그래밍의 원리인 변수, 연산, 제어, 함수를 따라 말하게 하고 수업을 종료한다.

우선 학생들은 서먹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질문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다도 잘 떨고, 꺄르륵 잘 웃는 아이들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있다. 어쩌면 어른들이 보기에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어떤 성인이 유치원 아이나 고등학생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언제나 수다를 떨며 다닐 수 있지만, 설사 그런 모습이 보인다고 해도 인정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라면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특징의 하나인지, 아직 어린 나이지만 적절한 사회성이 내부에 자리 잡아가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우리를 깨닫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은 결정도 아니고 선택도 아닌 바로 행동이다. 무엇을 결정하든 결국은 자리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지 않으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을은 쓸쓸함과 외로운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낭만적이면서 고독한 풍경을 보이는 가을은 죽은 영혼이 저승에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계절이다. 아이들과의 수업은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고, 모든 것이 굳어가는 모습을 날려 버린다. 그렇게 못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생기발랄하게 신나지도 않았던 아이들과 수업을 마쳤다. 유행하는 전염병으로든,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도전으로든 어떤 식으로 자기 검열이 필요한 때는 온전히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거리를 두고 앉아야 하고, 선생님은 조심조심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 기도가 늘 필요한 일이다. 이제 남은 일이 무엇이지? 하고 생각한다. 

 

가을 참 징글징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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