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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달리기란 없다. 서울 마라톤 언택트 레이스

지구빵집 2020. 10. 2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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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는 것을 기를 쓰고 하던 시절을 지내왔다면, 하지 않아야 될 것도 정말 사력을 다해서 하지 말아야 하는 때가 온다. 밤에 술 먹지 말아야 하고, 담배도 피우지 말아야 하고, 생각을 비워야 하는 것들도 여간 힘들게 노력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하게는 그냥 하지 말아야 한다. 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나가서 삽질을 하든가 무작정 달려 볼 일이다.

 

COVID-19로 예상했던 대부분의 일이 산산이 부서졌다. 달리기 대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든 대회가 취소되고, 간혹 열리는 대회도 서로 만나서 진행하지 않는 방식인 언택트라든가 버추얼로 대회를 진행한다. 서울 마라톤은 이미 한참 전에 혼자 달리는 미션을 수행한 사람에 한해서 잠실 주경기장에서 소수의 인원이 달리는 대회로 치렀다. 처음에는 미션을 수행한 사람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졌는데 참가 인원이 부족했는지 누구나 신청해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주경기장에 모여 달리도록 바뀌었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와 밀린 일을 하고 오후 4시에 경기가 시작되어 일찍 도착했다. 잠실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을 호리병 모양으로 연결하여 1회전에 1km씩 10바퀴를 달리는 경기다. 달리기는 1, 4, 7 레인을 정확히 엄수해 달리고 추월할 경우만 2, 5, 8 레인으로 달린다. 출발할 때도 개인별로 떨어진 거리를 만들고, 대기장소도 엄격히 떨어져 않는다. 기록은 48분 23초로 마음에 들었다. 10km를 달린 기록은 측정해 본 지가 가물가물한데 아마도 51분이 아니었나 싶다. 잠실 주경기장의 웅장한 관중석은 텅 비었고, 주로의 붉은색 트랙과 레인의 경계인 흰색이 선명한 맑고 시원한 트랙을 달렸다. 달리고 나니까 '이제 슬슬 달려볼까?' 하고 생각하는 데 경기가 끝난 느낌이 든다. 더 단축시킬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군데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나왔다. 일하는 게 재미있어진 남자는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다. 

 

여기까지 달리고 길을 잃은 건가? 길은 달리면서 생기는 거지, 정해진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아직 달리지 않은 길만이 존재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처음이라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원칙이다. 그것에는 맞는 길도, 모범적인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해서 여자와 사는 일도 처음이고, 아들로 태어나는 것도 아이의 부모로 사는 일도 처음으로 하는 일이다. 첫째 아이를 키워 봤다고 해서 둘째를 더 잘 키우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조화롭거나 소통이 부족하거나 서툰 것도 다 용서가 된다. 처음 하는 일은 늘 그러니까.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내일은 더욱 훌륭한 강아지가 되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 귀가한 주인을 보고 '아침에 아주 반갑게 보냈으니 지금은 조금만 반갑게 맞이하자'라는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배고프면 모든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잠잘 때는 잠을 잔다. 주인과 산책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산책하는 시간엔 충실히 몰입한다. 누구도 함께 지내는 반려동물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곳엔 일절 판단이 개입할 틈도 없다. 동물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게 두 가지 있다.

 

동물들은 눈이나 다리, 고환이 없어도 기본적인 생활과 기능만 수행한다면 얼마든지 행복하다고 한다. 심지어 갑작스레 눈이 아예 보이지 않아도 수일 내로 금방 적응한다. 사람처럼 외적으로 다르다고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조금 느리거나 불편한 '나'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치거나 아픈 동물들이 섞여 있을 경우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이유다.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특히 중성화를 반대하는)이 모르는 것 중 하나가 "동물들은 장기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이 암이나 병으로 사지를 절단하거나, 안구 적출, 자궁이나 고환을 적출해도 사람처럼 "절단 후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는다. 어쩌면 앞에 나온 이야기와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작은 고통에서 벗어나면 동물들은 훨씬 행복해진다.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회사로 오는 길에 종현이가 전화를 했다.

 

"왜 그렇게 잘 달렸어?" 종현이가 물었다.

 

그에게 늘 감사했다. 가장 좋은 자세로 가장 먼 거리를 적어도 느리지 않게 뛰도록 가르친 사람이다. 고마웠다. 서브 3을 달성한 사람답지 않게 겸손하고 어떤 형태의 훈련에도 잔꾀를 부리지 않는 일류였지만 요즈음은 달리는 일에 소홀해 보인다. 사실 그가 소홀해질수록 나는 열심히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춘식, 명희 선배가 훈련에 안 보이는 날이 늘면 나는 그만큼 많이 달렸다. 전염병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많이 변하게 만든다. 좋지 않은 상태로 들어가는 쉬운 일이지만 좋은 상태로 옮겨 가는 일은 어렵다. 지금은 누구나 좋지 않은 상태에 있을 확률이 더 크다. 우리가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아니면 더 좋은 길로 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네가 가르쳐 준대로 달렸어." 

 

"내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네가 성장한 거야. 정말 보기 좋은데." 종현이가 말했다

 

"내가 더 잘 달릴 수 있게 가르치고 옆에서 지켜본 사람을 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고마워." 남자가 말했다.

 

"고생했다. 잘 들어가고, 주중에 한번 보자." 종현이가 말했다.

 

"그래. 근데 요새 왜 달리기에 열심히 하지 않니? 어제도 나오지 않았잖아." 남자가 말했다.

 

"일이 많아, 바쁘기도 하고. 그동안 많이 달렸어. 열심히 해. 나를 따라잡으려면." 종현이가 말했다.

 

 그를 따라잡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달리기에 점점 흥미를 잃어간다. 다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도전할 것이 없을까도 생각해 본다. 멋진 10월의 하루를 보낸다. 징글징글한 가을이다.

 

 

서울 마라톤 언택트 레이스

 

서울 마라톤 언택트 레이스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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