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과 세계
-1996년 12월 2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연설에서는 늘 첫 마디가 제일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미 첫 마디는 이렇게 지나갔군요. 하지만 다음 문장, 또 그다음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여섯 번째, 열 번째,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이를 때까지도 이러한 고민과 어려움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무엇이 아닌, '시(詩)'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시와 관련하여 연설을 하는 것은 제게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어쩌면 처음인 듯싶군요. 나는 항상 스스로가 연설에는 영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내 수상 소감은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이라 해도 한 번에 조금만 주어진다면 훨씬 견디기 쉬울 테니까요.
오늘날의 시인들은 회의적이고, 의심 많고, 특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합니다. 마치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대중들 앞에서 스스로가 시인이라는 것을 밝히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끄럽고 요란한 시대에는 너무 깊이 감춰져 있어서 자신조차 확신하기 힘든 장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보다는, 단점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한결 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우연히 몇몇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인터뷰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시인들에게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다수의 시인들이 스스로를 '문인'이라고 칭하거나, 아니면 시 쓰는 일 말고 자기가 하고 있는 다른 일을 먼저 언급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무원들 혹은 버스에 동승한 승객들은 자신들과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그 사실을 가볍게 의심하거나, 아니면 뜻밖이라는 듯 다소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제 짐작으로는 철학자 또한 비슷한 문제에 부딪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약간 다릅니다. 적어도 자신의 전문 분야를 학문적 타이틀로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상황은 한결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철학과 교수-왠지 시인보다는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시의 경우에는 '교수'라는 타이틀이 없습니다. '교수'라는 지위는 전문적인 대학 공부를 마치고, 정해진 시험을 치르고, 참고 문헌과 각주로 풍부한 자료를 곁들인 논문을 통해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고, 나아가 성대하게 수여되는 학위를 획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다릅니다. '시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훌륭한 시가 적혀 있는 종이 쪽이지만, 사람들은 도장이 찍힌 증명서나 학위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될 위대한 시인 브로츠키(Josif Brodski, 198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를 국외로 추방했습니다. 그는 시인이 되어도 좋다는 공식적인 허가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국에서 '기생충'으로 낙인찍혔습니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나는 그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시인들 중에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말하면서 진심으로 긍지를 가지는 사람은 오직 브로츠키뿐이었습니다. 그가 '시인'이라고 힘주어 발음할 때, 그의 내부에는 아무런 거부감이나 저항이 없었고, 자유를 향한 애틋한 갈망과 동경이 담겨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젊은 시절 겪어야만 했던 무자비한 모멸감의 기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의심받지 않는 그런 행복한 나라에서 태어난 시인들은 자신의 작품이 출판되고, 읽히고, 해석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설사 한다고 해도 극히 소수만이 그 일에 종사할 따름이라는 점입니다. 단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말이죠. 아직 그렇게 까마득한 옛날이라고는 할 수 없는 20세기 초반에, 시인들은 독특한 의상과 말투, 괴상한 행동 등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행들은 실은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인에게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은 따로 있었던 것이죠. 혼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가면, 장신구들을 모두 벗어던진 채 고요한 침묵에 잠겨 아직 채 메워지지 않은 종이를 앞에 놓고, 조용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그런 순간 말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유명한 학자나 예술가들에 대한 전기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야심에 찬 영화감독들은 유명한 예술 작품의 탄생이나 위대한 학문적 발견의 창조 과정을 실감나게 그려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몇몇 학자들의 작업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실험실, 여러 가지 기구, 움직이는 기계 장치들은 한동안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다가, 결국 아주 사소한 수정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기대했던 성과를 이루고 마는 대단원에 다다르게 되면, 극적인 감동은 더욱 고조되기 마련입니다.
화가의 생애에 관한 영화 또한 아주 그럴듯한 볼거리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맨 처음 붓질부터 마지막 터치까지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으니까요. 음악가에 대한 영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영화들은 창조자의 내면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첫 마디 선율에서부터, 악보 위에 옮겨져 악기 편성을 마친 위대한 교향곡의 원숙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채울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은 여전히 단순하고 간단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질 뿐이고, 우리가 흔히 '영감'이라 부르는 '영혼의 기이한 체험'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에는 최고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가 있으니 그럭저럭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고약한 것은 시인들입니다. 그들의 작업은 절망적일 정도로 영화 촬영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상 앞에 앉거나 소파에 누운 채로 시선을 고정시켜 물끄러미 벽이나 천장을 응시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일곱 줄의 시를 쓰고는 15분 후에 애써 써 내려간 한 줄을 박박 지워버립니다. 또다시 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러고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할 관객이 있을까요?
나는 이미 영감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영감이란 게 과연 무엇이냐는 질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시인들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하거나 얼버무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영감의 놀라운 축복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요.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설명하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이따금 그런 질문을 받으면, 빙 둘러서 대답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에둘러 말하는 거죠: 영감이란 일반적으로 예술가 혹은 시인들만의 특권은 아닙니다. 영감의 수혜자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며, 과거에도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뚜렷한 신념으로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애정과 상상력을 가지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 말이죠. 이 세상에 그런 의사들은 늘 있어왔고, 그런 교사들, 그런 정원사들은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그리고 수백 종의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계속 새로운 도전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들의 직업은 끊임없는 모험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난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호기심은 영원히 식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해결된 문제 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의문과 궁금증이 생겨나게 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영감이 싹트게 되는 거지요. 영감,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감이 솟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의 수단으로 일을 합니다. 혹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일을 합니다. 스스로의 의지와 열정으로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선택을 내리곤 합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 지겨운 일, 그나마 그런 일조차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 이런 일에 종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닥친 가장 슬픈 불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가올 21세기에 곧장 행복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내가 시인들로부터 영감에 대한 특권을 빼앗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시인들이 선택받은 운명을 타고난 몇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껏 쭉 이야기를 듣고 계신 청중 여러분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살인자들, 독재자들, 광신자들, 몇 가지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들 역시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또 열광적인 아이디어로 그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네,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것,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합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철저히 관심 밖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쪽을 향해 눈을 돌리고 주의를 빼앗기는 순간, 자신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는 모든 지식은 결국엔 생존에 필요한 열정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소멸되고 맙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듯이,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마디의 말을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말에는 작지만 견고한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 날개는 우리의 삶 자체를, 이 불안정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광활한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만들어줍니다. 만약 아이작 뉴턴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사과가 그의 눈앞에서 우박같이 쏟아져도 그저 몸을 굽혀 열심히 주워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마리아 스쿼도프스카 퀴리가 자신에게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월급을 받고 양갓집 규수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했고, 결국 이 말이 그녀를 두 번씩이나 이곳, 영혼의 안식을 거부한 채 영원히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노벨상'이라는 선물로 보답해주는 스톡홀름으로 인도했습니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이 작품 또한 일시적인 답변에 불과하며,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통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번 더', 또다시 '한 번 더',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게 되고, 훗날 문학사가들은 어떤 시인이 남긴 계속되는 불만족의 징표들을 모두 모아 커다란 클립으로 철하고는 그것들을 가리켜 '시인이 일생 동안 쓴 작품'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따금 나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들을 꿈꿀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클레시아스테스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허황되고 무모한 상상 말이죠. 인간의 모든 행동에 담겨 있는 덧없는 속성을 탄식했던 전도서를 쓴 바로 그 에클레시아스테스 말입니다. 그를 만나면 나는 우선 머리를 숙여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에게는 에클레시아스테스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인사를 하고 나면 아마도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을 것입니다.
에클레시아스테스,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지만 당신 역시 태양 아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나요. 당신이 쓴 시 역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아니던가요. 왜냐하면 당신 이전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쓴 적이 없었으니까요. 당신의 시를 읽는 모든 독자들 또한 태양 아래 새로운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시대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그것을 읽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당신이 그 그늘에 앉았던 사이프러스 나무 역시 세상의 시작부터 거기서 자라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비슷하지만, 바로 그 나무는 아니었던, 다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 나무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에클레시아스테스, 나는 당신을 만나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지금 태양 아래 새롭게 쓰고 싶어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아직 생각을 정리하고 있나요? 혹시 그 생각들 가운데 일부를 부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은 없나요? 당신이 과거에 쓴 서사시에서 환희를 느낀 적은요? 그 일시적이고 덧없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쩌면 태양 아래 새로운 당신의 시는 바로 그 환희에 관한 것은 아닌지요? 벌써 초안을 잡고 메모를 시작했나요? 설마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죠. "모든 것을 다 썼다.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고... 이 세상의 어떤 시인도 이렇게 단언할 수는 없잖아요. 특히 당신처럼 위대한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죠.
우리는 세상을 떠올릴 때마다, 늘 그 거대함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또한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이 겪는 개별적인 공포에 세상이 너무나도 무관심한 데 대해 쓰라린 분노를 품기도 합니다. 식물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할 거라는 어리석은 확신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별빛이 꿰뚫고 지나가는 세상 속의 공간들을 구석구석 떠올리면서, 별들의 주위에서 발견된 새로운 행성들이 '이미 죽은 상태일까' 아니면 '현재에만 죽은 상태일까'를 놓고 그 답을 알지 못해 고민합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지속되고 있는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를 보면서, 유효 기간이 우스울 정도로 짧고 오로지 두 개의 날짜만이 지정되어 있는 입장권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건 간에 대답은 한 가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 표현에는 논리적인 덫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거나, 보편적인 기준으로 널리 공인되어진 당위성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놀라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준거의 틀로 삼을 만한 지극히 '당연한' 세상은 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놀라움은 스스로 현존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것과의 비교를 통해 생성될 수는 없습니다.
네, 동의합니다. 개별적인 단어를 가지고 일일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모두들 거리낌 없이 이런 표현들을 쓰곤 합니다. '평범한 세상' '평범한 인생' '평범한 사물의 순리'...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시어(詩語)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바위도,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그 어떤 구름도, 그 어떤 날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그 어떤 밤도, 아니,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도. 이것이야말로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는지요.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문학과 지성사 pp.446-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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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좋은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