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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가 여름을 보내는 방법

지구빵집 2021. 8. 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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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가 여름을 보내는 방법

 

도시의 열기를 수집하는 잔류 구름, 모두가 씁쓸하고 뜨겁고 황량한 들판, 축제도 없고, 공허한 저녁 잔치도 열리지 않고 묵묵히 계절을 보냅니다. 긴 시간 이어지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로 팬데믹(범유행 또는 세계적 대유행은 전염병이나 감염병이 범지구적으로 유행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상황은 어디든, 누구라도 예외 없이 크든 작든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큰 목표를 세우거나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주변의 사소한 것에 기울이고 지나간 소중한 시간과 경험을 되살려 보는 것도 의미 있은 일이라고 합니다. 

 

달리기는 뜨거운 여름에도 쉬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결실을 맺는 일과 마찬가지로 엄동설한 겨울 훈련을 꼼꼼히 하면 봄에 열리는 동아마라톤과 서울 하프 마라톤에서 좋은 기록이 나오고, 뜨거운 여름에 흘린 땀은 가을에 연달아 열리는 춘천마라톤이나 중앙 마라톤 대회에서 뿌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2019년 가을 마지막 마라톤 대회가 열린 후로 좀처럼 러너의 축제는 열리지 않습니다. 팬데믹 상황이 마무리되는 2023년은 되어야 수만 명의 러너가 참가하는 대회가 열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러너에게 있어서 여름 나기는 심신이 많이 지치거나 힘든 기색 없이 지나갑니다. 러너는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몸을 잘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휴일 아침 운동장 400미터 트랙을 80회전 달리거나, 남산 삼순이 계단 훈련과 산책로를 왕복하는 전지훈련을 하고 나면 여름은 어느새 저만큼 가있곤 했습니다. 물론 땀 흘리는 훈련만 해서는 여름이 쉽게 가지 않습니다. 바로 관악산 계곡에서 발에 물 담그고, 허름한 식당에서 막 공수한 아주 큰 민어로 파티를 하고, 마지막으로 공주 백제 마라톤을 달리면 어느새 선선한 가을을 맞이합니다.

 

아무리 많은 달리기 훈련 방법이 있다고 해도 전부 해볼 수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진 옷과 맛있는 음식, 좋은 사람과 새로운 곳 여행도 한결같이 좋을 수는 없으니, 매 순간 가장 마음에 들고, 즐겁고 편한 것을 선택합니다. 파란색과 빨간색 티셔츠가 마음에 들면 어느 하나를 고르지 말고 두 개를 삽니다. 토요일 정기모임 훈련을 마치고 자주 가는 마마 구이 식당에 가면 김치찌개, 청국장, 고등어구이, 제육볶음 이렇게 서 너 가지를 시켜서 둘이 먹습니다.

 

화요일 목요일 훈련 장소인 관문 운동장에 해가 뜨기 전에 모입니다. 10여 명 남짓 모여 트랙을 돕니다. 일렬로 늘어서 맨 앞 주자가 페이스를 맞춰 5바퀴를 돌면 맨 뒤로 갑니다. 조금씩 빠르게 달리면서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 선두 교체를 하고 나면 50회전을 달리게 됩니다. 하프를 달렸으니 쉴 만도 하지만 적어도 30km는 달려야 제대로 훈련을 하니 남은 30회전은 각자 원하는 페이스로 달립니다. 벌써 해는 높이 올라 햇살이 뜨겁습니다. 훈련을 끝내고 관악산 향교 옆 계곡으로 이동합니다. 일주일 전에 비가 내려 관악산 계곡에 물이 철철 흐릅니다. 계곡 식당이 많은데 '땅이네'나 '돌담집'을 가서 렬자가 준비한 홍어와 막걸리를 먹기도 하고, 닭볶음탕이나 파전을 주문해 계곡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무 그늘 아래 물속에 주저앉아 신나게 웃고 놀다 보면 언제 달렸는지도 모르게 몸이 가뿐합니다.

 

민어는 농어목 민어과의 야행성 바닷물고기로 주로 서해에 서식합니다. 대가리와 뼈에서는 매우 감칠맛 나는 국물이 우러납니다. 민어 맑은탕은 거의 생선 곰탕으로 보일 정도인데 바닷고기 중에 이 정도로 국물이 진하게 우러나는 종류는 흔치 않습니다. 단점은 식으면 비린내가 나는데(사실 고기로 끓인 곰탕도 식으면 냄새가 나니 고기 비린내와 생선 비린내의 차이일 뿐.) 파나 마늘을 좀 넣고 다시 끓이면 없어지니 따뜻할 때 많이 먹어둬야 합니다.

 

8월 중순 말복 전후해서 더위가 한창일 때 회원들 대부분이 소집을 받고 양재역 근처 허름한 식당에 모입니다. 허름하지만 생선 손질도 잘하고, 함께 나오는 반찬이나 양념이 제법 잘 발효되고 탕을 끓이는 솜씨가 최고입니다. 당연히 참석 인원에 비해 민어 양은 작습니다. 가격은 무게가 3킬로 그램 내외의 민어를 공수해 오는 데 꽤 비싼 편이지만 회, 내장, 껍질, 부레, 탕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맛을 볼 수 있으니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잔칫날입니다. 

 

갖 잡아온 민어는 살은 무르고 부드러우면서 수분이 많아서 퍼석거리는 느낌이 나서 좋아하는 사람만 회를 먹고, 주로 부레나 탕, 부속물을 맛보는 회원이 많습니다. 부레를 두고 민어의 별미라고도 하며 부레 회를 기름장에 찍어서 먹으면 굉장히 맛있지요. 전통음식 중에는 민어의 부레를 사용하여 순대를 해먹기도 하는데 원래 맛없고, 저렴한 생선을 구이로, 양념에 묻혀서 먹으니 순대로 먹는 부레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여름 한 철 모두 고생한다는 위로와 남은 더위 잘 이겨내자는 파이팅이 더해진 건배사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름밤은 깊어 갑니다.

 

24절기 기준으로 입추와 말복, 처서가 지나고 가을 전국 단위의 마라톤 대회인 춘천마라톤과 중앙 마라톤을 대비해 마지막 장거리 달리기 대회인 공주 백제 마라톤을 달립니다. 일 년 중 러너에게 힘들기로 악명(?) 높은 대회는 서울 대공원 동물원 입구부터 동물원 끝까지 왕복 7km를 미친 듯이 6번 왕복하는 공원사랑 혹서기 마라톤과 그늘도 없고 경사로도 없고 오로지 금강을 따라 정처 없이 아스팔트를 달리는 공주 백제 마라톤입니다. 모두가 풀코스(42.195킬로미터)를 신청한 12명의 마라톤 전사가 새벽 6시 남부터미널 공주행 버스에 올라 출발합니다. 익숙하게 김밥을 나눠먹고 잠깐 눈을 붙이면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셔틀버스를 타고 공주 시민 운동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리 뜨겁지는 않습니다. 

 

9시에 출발을 하면 이제 태양은 머리위에 있는데 여기서 장장 빠르면 4시간이지만 보통 5시간을 버텨야 합니다. 호기롭게 출발해서 하프까지 달리면 출발했던 운동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포기하느냐 직진을 해서 풀코스를 달리느냐는 선택입니다. 일부 선수는 운동장으로 꺾어 들어가지만, 남은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직진입니다. 30km 지점에 반환점이 있는데 더 이상은 달릴 힘도 없고 온 몸은 물이 다 빠져나가 땀도 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병원에서 나온 앰블런스 응급 차량이 보입니다. 간호사를 보면서 물도 얻어마시고 돈 만 원을 빌려달라고 사정합니다. 몰골을 보니 얼마나 불쌍한지 선뜻 내주면서 가지라고 하는 데 작업은 작업이니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보관합니다. 빌린 만원으로 한 참을 달리다 보니 편의점이 나와 순자 선배와 식자 선배는 캔맥주를 하나씩 나눠마시고 달려갑니다. 함께 달리던 봉자는 뒤로 한참을 처져서 어디 오는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언덕을 걷고 달리고 하면서 무사히 경기장에 도착했지만 종이는 땀에 짓이겨져 전화번호도 없고 먼저 들어온 회원들은 경기장 옆에 싸우나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힘든 경기입니다. 마라톤 대회 측에서 제공한 공주 밤막걸리와 국수로 요기를 하고, 유명한 공주 밤 1kg을 받아 들고 귀경길에 오르기 전에 터미널 옆 식당에서 뒤풀이를 합니다. 간호사에게 빌린 만 원은 언제 돌려줄 지 기약도 없습니다. 

 

어떤 거리를 달리더라도 두 다리와 근육, 심장이 주는 힘든 고통으로 그만 달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우리 정신이 약해져 포기하고 싶어서 뇌에 명령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나서 밀려드는 막심한 후회와 강한 자기 연민의 감정을 보면 뇌는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심리적인 고통을 더 진짜라고 여기거나 아니면 둘을 동시에 진짜라고 여기는 게 분명합니다. 만약 포기가 올바른 판단이고 실제로 무리하는 경우라서 그만 두었다면 우리는 칭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사실은 중간에 그만두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여하튼 완주자의 무용담과 하프에서 그만둔 동료를 위로하며 즐거운 뒤풀이를 마칩니다.

 

 

도대체 우리 러너의 여름은 누가 훔쳐갔을까요? 연두빛 잎사귀에서 초록 초록한 날이 가면 검은 초록으로 변할 거라던 여름은? 관문 체육 운동장 400미터 트랙을 80회전 달리고 계곡으로 놀러 가서 막걸리며, 홍어며,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발에 물 담그고 하늘 보며 노는 날은? 해 질 녘에 호젓한 청계산 중턱에 자리 펴고 술 마시고 노래하다가 그것마저 지겨우면 명상하고 새벽에 등산하는 비박은? 서울 대공원 동물원 입구부터 동물원 끝까지 왕복 7km를 미친 듯이 6번 왕복하는 공원사랑 혹서기 마라톤은? 대공원 동물병원 언덕 훈련을 여름 끝났다며 가을 춘천마라톤, 중앙마라톤 잘해보자며 쫑파티를 전주식당에서 열었던, 러너들에게 힘들기로 악명 높은 금강을 따라 달리는 공주 백제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나면 진짜 바람이 달라졌는데 도대체 영문도 모르고 여름이 지난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합니다.

 

러너는 늘 해답을 찾고, 지나간 아름다운 날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찾을 겁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평범한 이웃 사람들의 지속적인 인내와 많은 의료진과 관계 기관의 헌신적인 노력이 우리가 잃어버린 계절과 소중한 일상을 찾기 위해 계속됩니다. 여름이 갔다면 다시 가을의 즐거운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늘 보여주는 일입니다.

 

 

여름에 대해 잘 쓴 글 '뮤지션 김사월이 말하는 여름은 매년 돌아오지만 뜨거운 계절이다.'

 

 

2019년 공주 백제 마라톤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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