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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 자기가치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지구빵집 2021. 11. 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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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 자기가치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해리 클리버 / 역자 : 김경종(밥풀)

 

Anarchist Studies 2(1994): pp. 1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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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가 크로포트킨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에 주최한 <피터 알렉세이비치 크로포트킨 회의>를 위해 작성, 제출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 회의는 1992년 12월 8일부터 14일 사이에 모스크바, 성 페테르스부르크, 디미트로프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런 회의로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땅에서는 최초로 열린 것입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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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기층대중의 광범위한 저항으로 초래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서구 자본주의의 계속되는 위기는 온갖 유파의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현 사회의 이행 문제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재검토 대상에는 초기 혁명가들이 과거 사회격변 시기에 겪었던 경험은 물론 그들의 사상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행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의 재창조 문제에 대한 유사한 접근방법으로 마땅히 새로운 관심과 비교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아나코-코뮤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통에는 새로운 사회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물질성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한 피터 크로포트킨의 분석과, 노동계급 '자기가치화' - 새로운 존재방식과 사회관계 형태를 정초하기 위한 이질적인 자율주의적 노력 - 의 현재적 과정 내부에서 미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자율주의적'(autonomous)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이 포함된다. 이 논문은 이들 두가지 접근방법을 검토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을 건설하는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비교, 대조한다. 현재적 위기에 이들 접근방법을 적용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현 지구적 위기 - 동구 국가사회주의의 몰락과 서구 자본주의의 스테그네이션, 남부의 새로운 저발전 - 의 한복판에서, 지난날의 혁명적 사상과 경험에 대한 재검토는, 현재 속에서 창조적 답변을 내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905년에서 1917년에 이르는 러시아 혁명 시기의 피터 크로포트킨이, 그의 동료와 러시아 인민이 다양한 정치변화의 경로에 놓여 있는 가능성 [1]과 위험에 대하여 사고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방법으로,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뮨의 교훈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고고학(archaeology)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은 그가 1921년에 사망할 당시 몰두하고 있었던 기획 - 10월 혁명의 격랑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을 의도로 윤리학사를 연구했었던 것과 동일한 류의 고고학적 기획이다.

 

이 글에서는 혁명적 변혁과 사회의 진화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사상 중 하나의 특정측면 - 탈자본주의 사회의 출현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 - 만을 집중조명할 것이다. 나는 그의 접근방법이 오늘날 엄청난 중요성을 가질 뿐 아니라, 서구의 소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사했던 방법과도 가깝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이 존재한다면, 물론 나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소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작업은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는데, 이들이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자신들의 영감을 찾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크로포트킨과 자본주의의 이행

 

현 사회질서를 넘어서거나 혹은 "이행"한다고 하는 일반적 개념과 관련해서는 서로 다른 수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크로포트킨은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투쟁의 수많은 실천적 쟁점과 관련된 논쟁에 활발하게 개입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사회의 본성과 사회진화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좀더 일반적인 이해로부터 자신의 판단 근거를 구하고자 하였다. "상호부조"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동물사회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각 개체들이 자기 종의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여 만인 대 만인의 전쟁처럼 경쟁하기 보다는 서로 돕는 고유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아나코-코뮤니즘 정치학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크로포트킨은, 이처럼 인간사회의 지속적이고도 발전하고 있는 측면에 대한 분석 위에 자신의 정치학을 정초함으로써, 자신을 새로운 사회 창조에 관한 모든 유토피아적 접근과 차별지운다. 한편, 그는 "근대 사회주의자"라고 불린 일부 선구자들의 노력에 분명히 우호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중앙집중주의자들의 "쟈코뱅식 유토피아"에는 적대적이었다.[2] 그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려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매우 뚜렷이 하였다. 1887년에 "아나키스트의 방법으로 말하자면, 유토피아 사상가들의 방법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아나키스트는 인간사회를 과거나 현재 모두 있는 그 상태대로 연구하고... 인간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경향, 그리고 증가하는 지적, 경제적 욕구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며, 이상 속에서 진화의 방향을 지적할 뿐이다."라고 썼다.[3] 이런 연유로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1892)를 유토피아라기 보다는 "제안"(proposition)이라고 규정지은 우드코크의 주장은 함량 미달이다. 그 책에서 크로포트킨은, 탈자본주의 사회의 요소를 구성하는 현사회의 구체적 발전들에 관한 연구의 결과물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류의 사회가 출현할런지도 모를 방법"을 소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미래가 이미 현재 속에서 어떻게 출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4]

 

이처럼 경향들에 촛점을 맞추는 그의 접근방법은 정치학(윤리학 포함)의 근거 를 "이미 발전하고 있는 것"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 두기 위하여 칸트의 순수 합리적인 "의무"를 폐기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5] 푸리에나 오웬도 팔랑헤스타로부터 협동체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조직되어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꼼꼼히 기술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레닌과 볼셰비키도 노동이 조직화되어야 하는 방식(테일러주의와 경쟁)과 사회의 의 사결정 과정이 조정되어야 하는 방법(당 지도부와 중앙 계획을 통한 내리먹힘 식)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6]

 

크로포트킨은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에 현재 속의 구체적 동향에 관한 연 구를 심화시킬 즈음, 사회의 실질적 작동에 대한 검토를 통해 농촌이 살아남 을 수 있었던 것뿐 아니라 급속한 산업화 과정 역시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 이 늘상 주장하는 "경쟁"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커나가는 협동과 그 위력 때문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산업화 과정에 있어, 예전과 마찬가지로 밀접한 상호교류가 확실히 상호투쟁보다 훨씬 더 이득이 된다"고 썼다.[7] 그리고 만약 상호부조의 발전과 확장이 인류 진보의 핵심으로 자리잡는다면, 정치학과 윤리학 모두가 이러한 인식에 의거하는 것 만이 논리적일 것이다. 아나키스트의 임무는 이러한 발전의 걸림돌을 공격하 고 상호부조가 확대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8]

 

계속된 연구에서, 크로포트킨은 이들 두가지 모순된 경향, 협동과 경쟁의 체현 물을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상대적으로 이 연구는 쉬운 편이었다. 예를 들 어, 농촌 코뮨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나 재형성되고 있는 현상은 지리적, 문화 적으로 비교적 고립된 곳에서 나타났으며, 이들 공동체의 제도와 행위는 직접 연구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인민주의자들이 수행한 바 있었다. 길닦기와 도랑 치우기, 산림을 돌보고 수확을 거들기, 우유 및 일용품 생산, 집짓기, 신부의 혼수 준비 등 서로 다른 수많은 지역의 농민들이 노동과 생활 속에서 어떻게 협동해 왔는가를 예증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9]

 

그러나, 그가 연구했던 사회적 현상이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의 발흥 및 세계 시장에 의해 재주조되면 될수록, 그의 분석은 더욱 어려워지고 미묘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현지 작업장과 지역산업으로부터 경제의 지구적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층위에서, 모든 것을 철저히 분할하려는 자본주의적 경향과 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작동하는 협동과 상호부조의 징후적 힘을 찾아내 규명 해야만 했다. 그가 연구에 쏟은 노력은 인상적인데, 그였기에 가능했던 것이 다. 그는 사회의 모든 층위에 사회적 협동이 존재함을 깨닫고 논증하기 위하 여 수사학과 경쟁의 실제성을 극복하였다. 경제학자들이 정태적 비교이익을 강조한 반면, 크로포트킨은 산업들 사이에서 증가하는 복잡성과 상호의존성 (협력) - 지식과 경험의 멈출 수 없는 국제적 순환과 밀접히 결부된 발전을 향한 동태적 반경향을 증명하였다. 경제학자들(그리고 최근의 노동 사회학자 들)이 생산전문화의 효력과 생산성을 찬양한 반면, 크로포트킨은 바로 그 생산 성이 경쟁이 아니라, 단지 형식적으로 분할된 노동자들의 상호연계된 노력 위 에 어떻게 기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산업의 도시화와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농업 생산간의 관계 에 주의를 기울렸을 때, 단지 전자만을 공격하고 후자를 애석해 한다거나 과 거의 전원적 이미지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었던 것은 아니다. 대신에 생태적으 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러한 절름발이 전문화가 이미 극복되고 있었던 환경 들, 실례로 파리 외곽의 야채밭처럼 도시의 쓰레기가 땅과 다시 합쳐져 모두 에게 이득이 되고 있는 곳을 찾아나섰다.[10] "공장들 이 촌락으로 이주하려는 현저한 경향"과 소규모 생산단위들이 대규모 생산단 위보다 더욱 효율적인 경향을 규명하고자 하였을 때, 희망사항에 빠져있거나 단지 예언만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11] 이러한 성격의 크로포트킨 저작은 경험적 관찰에 기반하고 있으며, 자료값과 일치하 는 분석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과학적"이었다.

 

크로포트킨 연구의 이러한 측면 중에서 나의 현재적 관심은 그의 관찰과 기여 의 정확성 보다는 작업 방법에 있다. 누군가 했던 것처럼, 그가 규명했던 경향 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지배적이었으며, 어느 것이 사라졌거나 압도당했는가를 연구하는 것은 유용하다.[12] 그러나, 그의 작업은 미 래에 대한 정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와 자본주의 체제로 부터 벗어나는 대안적 경로를 제공하는 현재 속의 경향들을 발견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가 글을 쓴 이후에도 계속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그가 주목했던 대안들 중 일부는 흡수되어 더이상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일부는 살아남았다. 불가항력적으로 또다른 대안도 출현 하였다. 우리의 과제는 그 대안들을 인식하고 검토하는 것이며, 이 과제가 적 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대안들의 발전을 지지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이행문제

 

중대하게도,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칭하는 자들의 활동으로 이 해한다 - 는 20세기 내내 위기 상태에 처해 있었다. 크로포트킨이 매우 명료 하게 보았던 것처럼, 처음에는 사민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이후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흥기함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배이데 올로기가 되었다.[13] 서유럽에서 권력을 다투는 사민 주의자들이건 소련에서 집권하고 있는 레닌-스탈린주의자들이건, 마르크스주 의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노동자의 자기해방투쟁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적 투쟁 의 이론적 분석으로부터 집중화된 권력과 사회주의적 축적에 대한 이론적 정 당화로 전화되었다. 이것이 전세계에서 다양한 분장을 하고 있는 "정통 마르 크스주의"의 참모습이다.

 

소련 내에서는 즉각적인 관심사였지만,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단지 이론적 중요성만을 가졌던 주요 쟁점은 자본주의가 이행될 수 있는 과정에 관한 것이 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이 문제를 "이행"의 문제라고 정식화 하였으며, 그 해결책은 "사회주의"였다. 모든 사회가 경유해야만 하는 선형적이며 목적론적 인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공산주의를 낳게 될 이행과정(사회 주의라 불리움)을 통해 대체되어야만 했다. 서구 사민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 에 대한 소소한 수정을 통해 그러한 이행을 추구하였다. 소련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통제하는 국가와 중앙계획을 통해 신속히 이행을 달 성하려 계획하였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경우 모두에서 "사회주의 적" 축적은 자본주의적 축적과 별반 다를게 없었으며, 대다수 인민의 생활은 기업이나 국가의 감시 하에서 쳇바퀴 같은 끝없는 노동에 계속 종속되어 갔 다. 정말이지 인민들은 서방 뿐 아니라 소련에서도 투쟁을 통해서만 얼마간의 개량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속아 넘어갔던 사람들 조차도, 단지 권력과 착취를 더욱 합리화시켜주는 것일 뿐이라고 인식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위기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물이라 간주하여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 이러한 과정 외부에 이에 반하는 다양한 혁명적 경향들이 존재하였는데, 이 경향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고취하고자 여전히 마르크스의 작업에 의존하였으며, 마르크스 이론의 사민주 의적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해석을 모두 거부하였다. 이들 중 가장 흥 미로운 경향은, 이 글의 의도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반자본주의 투쟁에 있어 인민의 자기행동성과 창조성을 우선시할 것을 주장했던 경향이다.[14] 이러한 경향들의 공간 내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에 대한 정합적인 비판이 발전해 갔으며, 이 비판에는 "이행" 개념에 대한 거 부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사고와 상당히 유사한, 자본주의 이행문제에 대한 재개념화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자본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나 당과 같은 "공식적"(official) 계급조 직에 대하여 노동계급 자기행동성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 일반노선 및 이와 관련된 정치학을 지시하기 위하여 자율주의적(autonomist)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행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의 자 율성에 대한 강조로 탈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는 유일한 경로는 인민의 이름으 로 국가를 통제하는 당이 관리하는 사회주의적 이행질서를 통해 가능하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거부하게 되었다. 대조적으로, 새로운 사회 건설 과정은 혁명과정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당이나 국가가 아닌] 인민 자신의 과 업이거나, 혹은 시작부터 그 운명이 결정지워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출현하였는데, 그 중 가장 먼저 출현 한 정치적 경향 중의 하나는 "평의회 공산주의"였으며, 독일의 "노동자 평의 회", 러시아의 소비에트를 인민에 의해 건설된 새로운 조직형태로 사고하였다.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접수(노동조합의 접수 역시 마찬가지)를 혁명의 파산이자 지배와 착취로의 반동이 개시된 것으 로 간주하였다.[15]

 

수년동안 노동계급의 자율성을 강조하다보니 계급투쟁의 양면적 성격을 밝혔 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재해석하여, 촛점을 자본(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선점) 으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동으로 다수의 새로운 인 식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적어도 노동계급 자체가 자본의 범주 - 모든 사람 들이 피해가거나 탈출하고자 투쟁해 왔던 조건을 표시하는 범주 - 는 아니라 고 인식하게 되었다.[16]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노동자(전통적인 공장 임금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임금이 없는 농민, 주부, 학생에 이르기까지)로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사람들의 투 쟁은 이러한 종속화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대안적 존재방식을 건설하려는 노력 에 이르기까지 양측면에 걸쳐있다는 것이다.[17] 자율 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방금 말한 이같은 현상에 대한 관찰과 연구로부터, 자 본주의적 지배와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작동하는 상호부조의 경향을 발견하고 자 노력하였던 크로포트킨의 연구와 동일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론틀은 얼 마간 다를지라도, 작업의 성격은 동일하였다.

 

물론, 이론틀의 차이점이 크로포트킨은 마르크스의 계급분석을 피해갔다는 점 에서 발견될 수 있다.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게 된 역사적 기원과 같은 자본주의 분석의 여러 측면이 상당부분 중복되긴 하지만, 마르크스와는 매우 달리 크로포트킨이 일관되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인간본성과 사회에 관한 이론이었다. 그가 상호투쟁 및 상호부조의 "법칙"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및 소외되지 않은 협동에 관한 이론과 유사한 점이 거의 없다. 크로포트킨이 명확하게 밝힌 것처럼, 그에게 상호투쟁 및 상호부조의 법 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고유한 경향들인 반면, 마르크스에게 있어 계급투쟁은 역사상 계급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무계급사회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소외와 협동에 관한 독자적 분 석에서 서로 밀접하게 가까워진다. 양자는 자본가가 노동을 분할하고 노동자 들끼리 싸우게 만듦으로써 개인들이 비참해지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안타까워 한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생산성 수준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협동의 근본 적 힘을 인식하고 분석하였다. 더구나, 상호부조의 경향이 드러나는 방식에 관 한 크로포트킨의 주장과, 노동자가 자본의 착취에 대응하여 자기조직을 확장 시켜나간다는 마르크스의 주장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특히 {그룬트리세}(1857)와 {자본론}(1867- )에서 노동계 급의 주체성 보다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관하여 더욱 상세한 역사적 분석을 제 공하였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들 텍스트로부터,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에 관한 연구에 필적하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을 도출해내고 체계적 분 석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10여년 이상이 걸렸을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었다. 이 작업은 자본주의적 발전유형이 어떻게 노동계급의 부정성(변화를 차 단 혹은 강제)에 의해 결정되는가에 관한 연구에서부터 노동자 투쟁의 긍정적 내용(자본이 억압하거나 흡수하려는 것)에 대한 연구까지를 망라한다.

 

이런 분석이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에 대항하는 노동계급 의 '자기가치화' 개념이 접합하게 된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다. 자기가치화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벌어진 격렬한 계급투 쟁과 문화혁명 속에서 창출된 개념으로, 노동자의 자기행동성 뿐 아니라 단순 저항이나 부정을 넘어 새로운 존재방식을 창조해가는 투쟁의 측면을 더욱 전 문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이론적 수준에서, "자기가치화" 개념은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에서 행한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18] 마르크스는 노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산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 여 창조적이며 구성적인 사회적 힘인가를 밝힐 뿐 아니라, 노동의 자율성이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결정하는 발전을 추구하면서 자신 을 끊임없이 집단적 계급주체로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재구 성해 가는 과정을 폭로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가치화"는, 자본이 자신의 발전 을 위해 재통합하려 하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구성하 는 새로운 인간행위를 정초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탈주하는 자기결정하는 노 동에 관한 주장을 가리킨다. 우리는 자기가치화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마르크 스주의가 전통적으로 촛점을 맞춰온 노동 - 자본주의적 지배 속에서 강요된 노동의 중심성에 의해 정당화된다 - 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비노동행위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으며, 이러한 비노동 역시도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적 대안을 구성하는 자율주의적 기획의 일부가 되는 공간과 방법, 수위를 탐색할 수 있 다.[19]

 

보충설명을 하자면, 자기가치화 개념은 노동계급의 자결성을 단일한 것이 아 니라 이질적인 것으로 개념화하는 방식으로 개발되어 왔으며, 그 결과 자율주 의적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정치적 전통이 자율성을 단지 노동계급의 자율성만 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자율성 - 예를 들면 백인과는 다른 흑인 투쟁의 자 율성,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자율성 - 으로 인정하게 되는 이론적 접합을 제 공하였다.[20] 이론적으로, 이질성을 이처럼 존중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 행위 자체의 이질성을 인정한 것으로부터 근원을 찾 을 수 있다. 인간이 비인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노동의 이질성이 끝없는 노동의 강제 속에서 통일된 사회통제의 기 획에 종속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만이 가능하다.[21] 혁명적 주체의 발전 속에서 노동(그리고 비노동)의 이질성은 작업(그리고 비 작업)상태의 이질성이라는 형식을 띠며, 그 결과 각이한 집단의 사람들이 자신 들의 행동과, 성차, 인종, 종족 등의 사회적 관계를 서로 다른 수많은 방향으 로 재구성하려는 창조적 자율결정성 프로젝트의 다중성을 구축해 가는 형태를 취한다.

 

자본이 지배하고자 하는 이질적인 인민들의 모두 다른 행위와 같은 것에서 기 원하는 자기가치화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에는 정치학 전반에 걸 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탈자본주의의 유일성이라는 사회주의의 전통적 이행개념을 거부하고, 현재로부터 현 자기가치화 형태의 미래로의 가공 (elaboration)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재정의 하는 하는 것이다.[22] 이러한 거부가 함의하는 정치 학은 자본주의 지배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투쟁의 순환을 조직하는 연계 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며, 적의를 최소화하는 가운데 차이를 존중하는 새로운 차원의 공적 상호작용을 건설하려는 것이다.[23]

 

환언하면, 코뮤니즘은 크로포트킨의 관점과 매우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개 념화된다.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유토피아가 아니라, 커질수록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만을 요구하는 살아있는 현실. 이 재개념화는 또한 대부분의 정 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래전에 포기해버린 바 있는 마르크스의 개념 - "우 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독일 이데올로기}) - 과도 일치한다.[24]

 

크로포트킨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현재로부터 미래를 발견하려는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노력은 집단적 주체성에 관한 이론 뿐 아니라 실천 속의 실제 노동자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도 의존하여 왔다. 크로포트킨이 현재를 알 고자 과거를 연구했던 것처럼, 이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역시 마찬가 지였다. 그가 농업과 공업간의 상호관계와 내적 경향을 연구했던 것처럼,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렇게 하였다. 크로포트킨이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뮨으 로 거슬러 올라갔다면, 이들 연구자들은 1780년 런던 뉴게이트 감옥의 석방, 1791년 산도밍고의 노예반란, 1910년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투쟁, 1918년과 1919년의 독일 노동자 평의회, 1930년대 공장 대중노동자의 점거투 쟁, 1950년대 이탈리아 공장 노동자의 노조에 대한 반란, 1956년 헝가리의 노 동자 평의회, 1960년대의 학생운동과 여성운동, 1970-80년대 멕시코의 농민, 도시빈민투쟁 등과 같은 계급투쟁과 노동자 계급의 자기행동성의 계기들을 탐 구하였다.[25] 이러한 연구들은 자기행동성에 촛점을 맞춰 수행되었으며, 연구대상이 늘어갈수록 새로운 사회협력 형태에 연구가 집중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사례연구에서 보이듯이, 농촌지역 그리고 촌락 농민의 자기행동 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얼마간의 명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20세기 내내 계속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농민문화가 살아남아, 성장, 발전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농민문화가 고립으로 인해 분석하기 용이한 것으로 보였을 것 이다. 그러한 고립은 다만 상대적일 뿐이며, 농민문화의 자기행동성은 시골과 도시에서 서로 다른 집단간의 접속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제출되었다. 크로포트킨이 목격했던 류의 협동이 다수 남아있을 뿐 아니 라,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고립성을 넘어서는, 심지어 국경 너머로까지 공동체 의식을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정보와 투쟁의 순환수단을 제공해왔다. 멕시코에 서 그러한 네트워크는 "해먹"(hammocks)이라 불렸는데, 걸려든 사람을 곤경 에 빠뜨리기보다는 현지의 고유한 요구와 기획에 맞게 적응하였기 때문이 다.[26]

 

이 같은 농촌지역 연구, 특히 제3세계 농촌지역 연구와 유사한 것으로 도시 공업지역에서의 지배와 투쟁의 전개유형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마르크스 와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거의 배타적으로 공장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반면, 자 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자본주의적 지배의 팽창 을 추적하여 "사회적" 공장 - 예를 들어, 사적 생활(가정, 학교 등)의 자본주 의 재생산에로의 통합 - 의 출현을 개략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서구의 비 판이론과는 달리, 이러한 팽창은 노동의 의미와 사회적 협력 및 상호부조의 내용을 변화시키고 있는 갈등과 투쟁의 동일한 팽창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연구의 목표는 사라졌거나 출현하고 있는 협력의 유형들에 관한 발견 물, 특히 반복적으로 자본주의적 제도화의 구속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협력유 형들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현 시기의 위기 및 재구조화와 관련하여, 노동계급 자율성을 지지하는 이탈리 아와 프랑스의 어떤 이론가들은 현 자본주의 위기의 핵심에 대중노동자의 주 체성을 대체해 나가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노동계급 주체성이 있다고 제안하 였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통제를 파열시키고 종속화 기도에 계속해서 도전하 고 있는 새로운 주체성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이, 이같은 노 력과 뜻밖의 해방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새로운 주체성(실 제로는 주체의 이질성으로 관찰된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초창기의 시도 중 하 나는 새로운 "몰의 부족"(tribe of moles) - 고도로 유동적인 실직 및 임시노 동자, 정시제(part-time) 학생, 지하경제 참여자, 사회적 공장의 대중노동자 조 직의 붕괴와 위기를 강제하는, 사회생활의 일시적이며 끝없이 변화하는 자율 지대의 창조자들로 구성되는 느슨한 공동체 - 이라는 규정이다.[27] 또다른 시도로는 "사회화된 노동자"라는 규정이 있 는데, 자본주의적 통제의 망에 도전하는 어느 한 주체의 생의 모든 계기에 걸 친 자기행동성에 의해 사회적 공장의 위기가 어떻게 정확히 파생되었는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28] 이들 이론가들은, 사회화된 노동자들이 "컴퓨터와 정보사회"로 결합되어 있는 개인간 상호작용과 정보의 교환 내에서, 증가하는 "소통"(communication)의 집단적 전유(예를 들어, 장 악)를 확인했다고 믿는다.

 

그 분석은 다음과 같다. 대량생산의 시기(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모든 집단 적 상호소통 체계로의 일상적 참여를 극소수 숙련노동자(예, 기술자와 과학자) 로 제한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내외부의 근본적 분할(공장 안팎에서)로 특 징지어졌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이 모두 비난했던 그러한 분할이 었다.[29] 그러나, 계급투쟁의 동학은 이들 분할을 무 너뜨려 가고있는 노동의 시공간적 재구성을 점차로 강제해 갔다. 다른 한편, 갈수록 자동화는 단순 육체노동의 역할을 "서비스" 부문 뿐 아니라 제조업에 서도 극적으로 감소시켰다. 동시에, 지구적 협조와 지속적인 혁신에 대한 요구 는 정신노동의 역할 뿐 아니라, 정신노동의 집단적 성격마저도 확장시켰는데, 이로 인해, 정보흐름의 조작, 생산과정 상의 지적이며 정보력에 바탕한 의사결 정, 독자적 재량, 창조성 그리고 복잡한 사회협력망의 조율을 요구하는 수없이 많은 직업이 창출되었다.[30]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 이의 분할을 극복하려는 이러한 경향은, 지식의 독점화가 지식의 국제적 순환 으로 인해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크로포트킨이 분명 깊은 관 심을 가지고 지켜봤을 그러한 것이다.[31] 요점은, 사 회적 수준에서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명령이 증가하는 독립적 집 단 주체의 출현에 적응하는끔 구체화되며, 본질적으로 지적(따라서 "비물질 적")인 노동과 유희인 집단적 주체의 자기조직화는 자본의 구속력과 통제력을 반복적으로 넘어선다.[32]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와 베네토 지역의 여러 공업지대에서 발견된 패턴은 크로포트킨이 19세기에 깨달았던 촌락운동의 독특한 현대판이다. 크로포트킨 이 목격했던, 대규모 생산보다는 소규모 생산에서의 우월한 유연성이 1980년 대 "이탈리아의 기적"과 같은 급속한 성장의 핵심이었다.[33]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이 강조했던 것은 이와 같은 분산된 공장(fabbrica diffusa)의 건설이, 자본이 수용할 수 밖에 없 을 정도로 그렇게 강력했으며 자율적이었던, 다름아닌 노동자에 의해 어떤 방 법으로 추동, 진행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파리의 의류산업에서 보이는 유사한 진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는 고도로 독립적인 노동자들의 새로운 차원의 협 력적 자주관리가 드러났었다.[34]

 

더욱 폭넓게 보자면, 참으로 전세계의 제한된 지역에서나마, 하루가 다르게 컴 퓨터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대중이 직접 활용할 목적으로 전유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원래는 자본의 도움으로 기술발전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구축, 운영되었으나(알파넷), 오늘날의 네트워크(인터넷, 비트넷)는 대개 탈집중화되고 유연한 자신들의 조직에서 확고부동한 자율성을 간직하고 있는 모임들에 의해 구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재전유화 기도와 이 에 맞서, 다수 이용자 자신들이 창조했고 또 재창조해 나가곤 하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용의 자유를 옹호하고 "운동"에 대한 뜨거운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간의 항상적인 갈등의 영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자율성 및 이와 관련된 대립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가장 눈에 띄는 실례는 해커와 국가 사이 의 갈등으로, 해커들은 이들 네트워크에 족쇄를 채워 통제하려는 의도로 자본 이 구축한,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있는 벽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 한다.[35] 최근 그들의 행위를 분쇄하고 탄압할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부당한 국가행위로 말미암아 미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가 되 었다.[36]

 

많은 주의를 끌고 있지는 못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기관(학술, 기 업 혹은 국가)이 운영하고 있는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로, 그들은 테크놀로지를 단지 "공식적" 노동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과 친구 들)의 관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몇년간 두드러 졌던 점은 거의 전적으로 현 질서의 전복과, 순전히 욕구가 같다는 이유만으 로 비위계적이며 리좀적(rhizomatic) 방식으로 접속되고 있는 동호인들의 자율 적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네트워크들이라는, 확산되고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한 예로는, 평화넷, 에코넷, 유럽 대항네크워트와 같은 독립 네트워크 뿐 아니라, 비트넷 내의 진보적 경제학자 네트워크 (Pen-L), 활동가 메일링 리스트(the Activist Mailing List)와 같은 공식망 내 의 급진적 네트워크 또한 포함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네트워크들은 이질적인 상황과 제도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다. 진보적 경제학자 네트워크(PEN) 같은 곳에는 학자들이 우선적으로 참여할 것이며, 평화넷이나 유럽 대항네트 워크와 같은 곳에는 다양한 활동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 다. 미국(가장 앞서가는 지역)내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관련하여 주목해왔 던 점은,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더라면 고립되었을 사람과 운동을, 소통과 동 참에의 길로 급속히 연계시켜 왔던 방법이다. 사회적 존재를 (텔레비젼과 마 찬가지로) 스크린에 달라붙은 순전히 반동적인 단세포로 퇴락시키고 있는 것 으로 해석되어 왔던 아케이드형 컴퓨터 게임의 제1세대와 현저히 대조되는 것 으로, 모뎀과 커뮤니케이션망의 확산은 극적인 방식으로 상당한 규모의 집단 적 사회협력이 튼실하게 성장하는게 기여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얼마간의 이러한 협력은 자본주의적 지배에 대 한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 동시에, 사회적 재조직화에 대한 협력적 접근을 종 종 무화시키고자 하는 시도 또한 존재한다. 현재 보여줄 수 있는 한가지 좋은 사례로는 캐나다, 미국, 멕시코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그리고 미약하나마 GATT에도 반대하는)에 반대하는 수백여 단체들이 연합하여 컴퓨터 네트워크 를 국제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저항의 노력 내에서도, 소 통의 과정은 새로운 상호 공동 관심사에서부터 노동자 권리, 환경위협, 노동의 국제적 분업을 다루는 토론 및 협의를 포괄해 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미 약하나마 일찌기 북아메리카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대륙차원의 풀뿌리 연대를 구성한다.

 

함의

 

자본주의 이행문제에 대한 이들 두가지 접근이 가지는 공통요소는 현재 속에 서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이며, 사회협력과 존재방식에 관한 새로운 대안형태 가 구체화되고 있는 기존의 활동들을 규명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색 과 그에 따른 결론은 크로포트킨의 연구와 저작이 과거 생존 당시 그토록 호 소력있게 만들어 자극제가 되었으며, 여전히 그 신선함으로 영감을 불러일으 키고 있다. 그가 비록 운명론적이긴 하지만, 밝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낙천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미래로 열린 더 나은 길의 출발점을 발견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행하고 있는 최신의 작업에 많은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도 동일한 특성 때문이다. 그들은, 피폐화되고 실패했으며 거부된 정통 성을 대신하여 한층 활력있고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 실제 인민의 투쟁 속에 서 혁신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인민의 자기가치화에 대한 욕구의 일 부 요소와 이를 위한 프로젝트를 접합시킬 수 있었던 마르크스주의를 제안한 다.

 

두가지 경우에서 사용된 접근방법으로부터 함의를 이끌어내 보자. 오늘날, 위 기를 "해결"하려는 공식적이며 조합적인(corporate) 전략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길은 다른 곳 - 인민 자신의 자기행동성 - 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곳에 서만이 진실로 새로운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라야 그러한 해결 책을 밀고나갈 힘을 모을 수 있다. 1917년, 크로포트킨은 위기 속에서 위험을 보았다. 백군의 반동과 붉은 혁명으로 위장한 위험 - 의회주의 혹은 볼셰비즘. 1994년 우리는 민족국가의 정부 혹은 다국적 기업이던 국제통화기금(IMF)이 던 그 속에 있는 위험의 정체를 다시 규명하고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 1917년, 크로포트킨은 또한 이러한 위험에 대항할 힘을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 는지, 러시아 인민이 자기들의 해결책을 정초할 공간을 어디에서 창조해야 하 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노동자, 농민의 자기행동성. 1994년 그러한 힘이 존재 할 것만 같은, 힘을 규합할 수있는 곳을 찾기 위하여 다시 우리 주위를 둘러 볼 필요가 있다.

 

 

아나키스트 도서관 http://kr.theanarchistlibrary.org/special/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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