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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고 지칠 때 심리학을 권합니다. 박경은 지음

지구빵집 2022. 1. 3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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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떤 결정을 하든 자신을 비난하지도 자책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기 결정을 스스로 존중해야 한다. 자기 비난만 멈춰도 인생이 달라진다. 선을 넘으면 관계는 깨진다. 우리는 흔히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의 의미를 깨진 관계를 보면서 깨달았다. 이는 그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감사함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감사함은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순수한 마음까지 알아주는 진실한 마음이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심리학을 권합니다

 

우리는 누구와 가까워 지거나 친해지면 상대방을 편히 대하게 된다. 하지만 그 편안함에는 기본적인 존중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 없이 편하게만 대하면 그 관계는 오래지 않아 깨진다. '편하다'라는 말은 각자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모두 감정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두 번 또는 서너 번은 '그래 편하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 선을 넘으면 감상이 상하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 선을 넘어도 이해하고 받아줘 관계가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러 번 반복되다 보면 결국 그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사람의 성향이기에 정해진 답은 없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A라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과잉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밴 B라는 사람이 있다. b가 a의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a는 가면을 절대 벗지 않았다. 기회가 많았는데도 a는 b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b는 끊임없이 관계의 끊음을 통보했지만 a는 자기 식으로만 해석했다. '너는 그래도 나하고는 관계를 끊지 못할 거야, 넌 착한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한 것이 a의 오산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a가 연락을 해 오면 b는 a의 전화를 받아야 할까? b가 a의 연락을 받았고, a 가 b에게 사과한다고 해서 그들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그들의 선택 문제이지만 이미 깨진 관계는 깨진 것이다. 깨진 유리를 원상태로 복구할 수는 없다.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친구로 있을 때 잘했으면 좋았잖아."

"누가 잘 하래?"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해 주면 되잖아. 지금까지 너 편할 대로 했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이렇게 각자 마음의 소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때마다 늘 기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늘 힘들고 괴로운 것도 아니다. 희로애락이 함께 있으니 서로 소통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면서 자꾸 자책하고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늘 고민한다면 그 만남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탐색해 봐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하든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기 결정을 스스로 존중해야 한다. 이런 경험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려워하기 전에 내면의 단단함을 볼 수 있다.

 

인간관계는 왜 깨질까?

 

인간관계가 깨지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나만 옳다고 주장하면 그 순간 관계는 깨진다. 가뭄에 짝짝 갈라진 땅처럼 동시다발로 깨진다. 마치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처럼 깨져 버린다. 물론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또 상대방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때 관계는 깨진다. 둘째 기질과 성향에 따라 교묘하게 말을 포장 하는 사람도 있고, 약한 척 다른 사람의 동정을 받아 자기편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고, 대놓고 자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다양한 모임 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간다. 물론 전혀 모임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모임에 들어갔다가 탈퇴하고 모임이라는 형태를 싫어하게 된 사람도 있다. 모임을 대하는 모습이 왜 다 다를까? 개인적 관계에서는 양심이 작동하지만 집단에서는 양심이 자동하지 않고 집단의 색깔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집단에서는 리더의 색깔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니 내가 옳다고 주장하다 모임에서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집단에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 그대로 머무는 경우도 많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집단에 잘 적응하는 사람인가? 만약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적응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그대로 인정할 수도 있고, 꼭 적응해야 하나 반문하며 자기 삶을 굳건히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는 대인기피증, 대인공포증,  사람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더 깊이 탐색해 보면 자기 소외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거나, 자기 욕구가 좌절되거나, 자기 뜻이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되어 오해를 받은 경험으로 인한 상처들이 인간관계의 불편함을 가져온다. 스스로 느끼는 소외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자기 문제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억울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상황을 피하지 말고 냉철하게 현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보는 눈을 꾸준히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고 익숙지 않을 것이다.

 

콩나물시루를 생각해보자. 시루에 물을 붓자마자 그대로 물이 빠진다. 그런데도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일을 매일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은 생각보다 많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생각을 만들어 내는 주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을 만들어 낸 주인이 아니라,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그릇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불쾌한 감정은 좋은 감정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꿈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거나 불쾌하다고 해서 없애거나 하는 식으로 그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 그릇 크기에 따라 관계 형성에도 차이가 있다. 개인의 의식 차이뿐만 아니라 의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심리적 이유로도 인간관계는 깨진다.

 

우리는 좋은 일만 있을 때는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놀라울 정도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깨달음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감사하는 마음과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 안에는 신성이 있고 놀라운 능력, 잠재력 있다. 그중에는 치유할 수 있는 능력,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 등 증명할 수 없는 능력이 많다. 우리는 아프면서 성장한다. 내적 성장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을까? 그것은 아니지만 비록 현실에서는 아프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인간관계가 깨지는 이유 중 하나가 성격이 서로 다른 것이다. 자기 성격이 직접적 원인이 될 수도 있고 간접적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표현을 잘하는 사람과 잘 못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 구조에서 서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 다만 인간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혼자서 너무 애쓰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성향대로 다른 사람을 대해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깨질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깨지고, 깨지지 않을 것은 그냥 두어도 깨지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적인 세계보다는 영적인 세계가 더 우세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 순간 자기 처지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의 그릇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늘 나는 무엇 때문에 힘들었나? 힘들어지는 자신의 보호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거리두기를 하고 적당히 거절하는 것이다.

 

살면서 인간관계에서 배운 것들

 

30대까지는 그냥 사람이 좋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믿고 따를 정도였다. 삶을 맞이하는 마음이 어설펐고, 사람을 새롭게 맞이하는 마음이 늘 청명할 정도로 기쁘고 즐거웠다. 40대가 되니 세상에 달라졌다. 세상이 그 사이에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방향이 바뀌었다. 사람이면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 편한 사람이 최고라는 걸 경험했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놓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력이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만 풍족하면 되는 줄 알았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때때로 비참한 마음이 들게 한 것도 돈, 인맥, 명예, 권력이었다. 부모님에게서 '사람은 성실히 해야 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세상을 성실하게 열심히 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젠장, 성실하게 살아도, 진실하게 살아도 세상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네?'라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만날 수 있다. 이제 50대를 살다 보니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빠져 있었다. 힘들고 불합리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것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긍정 의지를 놓쳤다는 것이다. 끝까지 믿고 따라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쉬웠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너지고 주저앉아도 잊지 말아야 했던 것은 소박한 내 마음이었다. 현재 처한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그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려는 긍정적인 재해석 능력이 약했던 것이다. 세상은 그리 비관적이지만 은 않다. 다들 사회가 썩었다고 말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면 불편할 때가 있다. 분노가 많은 사람, 불평이 많은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진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지식이 많고 학문의 조예가 깊더라도 삶의 멘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균형 잡히지 않은 그들의 모순된 삶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잠시 탐색을 멈췄다. 그 대신 무엇을 보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 탐색한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스스로 묻고 답한다. 내가 분노와 욕심을 보지 않고 애쓴 삶을 더 봤더라면, 타인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상황에 따른 불편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가? 결국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에 대한 답은 나의 솔직하지 않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불편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척하는 가식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보게 했을까? 그것은 선입견이었다. 선입견으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타인을 보면서 내 얼굴을 본다.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내 안에 그 무엇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했는지를 생각한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과 타인은 전혀 무관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결국 자기 괴로움의 주범이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생각과 감정을 그냥 놓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사람마다의 순수한 마음을 귀하게 여기고, 마음 하나 함께 하는 것을 소중히 하고, 너 때문이 아닌 나 때문으로 마음의 빚을 지려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을 배웠다. 그 깨달음과 배움으로 이제는 조금 성숙해져서, 혼자 있을 때는 내 마음의 흐름을 살피고,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내 입에서 나오는 언어를 살피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일방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먼저 제시하면 어린 시절의 두려움, 불안전한 애착, 통합 부족, 결핍, 취약함, 열등감, 낮은 자존감 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양가감정이 심할 경우에도 그럴 수 있다. 양가감정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상대되는 감정을 동시에 가지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 질문 자체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는 경우에도 내 잘못입니까?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일방적인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서로 생각이 다른 관점에서 일방적일 뿐이고, 피해를 보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타당하다,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억울함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과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있고, 자기의 욕구를 배제했기 때문에 양가감정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동창 모임이란 말만 나와 더 급격히 우울해지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은 동창생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기 때문이다. 이름을 여러 번 바꾸고 전화번호도 자주 변경한 것이 그 원인이다. 그전까지는 몇몇 친구와 연락이 가능했다. 어떤 사람은 졸업한 학교에 전화하면 동기들 연락처를 알려 준다고 귀띔했지만 그는 연락하기를 아예 포기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선택한 일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비슷한 사례는 아주 많다. 자기가 포기한 것은 그대로 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자신 안의 결핍 때문이다.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하는 자신의 성향, 취약함이 늘 자신을 힘들게 한다. 또 현재 자기 처지가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원인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아무 원인도 없이 갑작스럽게 곤경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깊이 탐색해 보면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판도라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자신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본 적이 있는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는가? 또는 그것이 진실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진실은 너무 눈이 부셔서 감히 쳐다볼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판도라 상자는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둘 때 아름다운 존재로 남을지도 모른다. 가령 친자식이 아닐 거라는 의심이 들어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정말 친자식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어찌할 것인가? 차라리 친자식이 라고 믿는 것이 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까? 무슨 일이든 자신이 놓인 상태에 따라 달리 해석하게 마련이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 또는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결국 자신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본 결과이니 그 책임도 열어 본 사람의 몫이다. 그 몫을 감당하지 못해 세상을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 어느새 뇌에서는 그를 믿을 만한 사람, 사랑에도 될 사람으로 인지하게 된다.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 뇌에서는 못 믿을 사람으로 인지하게 된다. 이는 생각일까, 마음일까, 진실일까, 거짓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자신이 결국 자신을 힘들게 한다. 또한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자신의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모임에서 탈퇴하고, 교육에 불성실하게 참여하고, 약속을 취소하고, 건강은 물론 가족의 행복도 포기하게 만든다.

 

그 모든 것이 자기 문제, 즉, 자신의 결핍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만 비로소 더는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할까?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을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해결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수 없이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자기 돌보기를 해야 한다. 힘들어지는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건강한 거리 두기를 하고 적당히 거절하는 것이다. 덧붙여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그 책임을 차기 몫으로 즐겁게 인정하는 삶이 태도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상실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도 자신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공감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떤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자신 안에서 성숙하려면 폭넓은 사고와 긍정의 힘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과 나는 할 수 있어'라는 신념이 필요하다. 생각을 바꾸기가 왜 그리 힘들까? 우리는 흔히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일체유심조'와 같은 의미다. 다음은 인도 우화다. 생쥐 한 마리가 늘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생쥐를 불쌍히 여긴 천사가 생쥐를 고양이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생쥐는 매일 개만 보면 벌벌 떨었다. 천사가 이번에는 개로 변신시켰다. 그러자 개가 된 생쥐는 호랑이를 무서워하게 시작했다. 천사가 또 호의를 베풀어 호랑이로 만들어주었다. 호랑이까지 된 생쥐가 이번에는 사냥꾼을 두려워했다. 결구 천사는 다시 생쥐로 되돌렸다. 비로소 천사는 진실을 깨우쳤다. 내가 무엇을 해주든 생쥐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는 한 아무 도움이 안 되는구나. 마음이 생쥐면 생쥐로 살 수밖에 없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편의 물고기에 즐거움에 관해 토론한 내용이 나온다. 장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강 다리 위에서 노니는데, 장자가 '피라미가 나와서 노는 모습이 여유롭다.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라고 말하자, 혜자가 당신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라고 했다. 장자가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가?라고 다시 묻자, 혜자는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뜻을 모르듯이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 맞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자는 청하건대 근본을 따져 봅시다. 당신이 말하기를 당신 장자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 나에게 물은 것이오. 나는 그것을 호강에서 알았소.라고 했다.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가? 모른다. 분별할 수 있는 지식적 차원을 벗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털어 냄으로써 진정한 앎이 되는 거, 그것이 바로 모른다다. 이 대화에서는 자신의 논리에 스스로 묶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이유는 인위(人爲)의 즐거움이 아니라 무위(無爲)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빛 속에서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자 속에서 성장한다. 어떤 사람은 빛보다 그림자 속에서 성장하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은 어떠한 상황과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환경 경제 수준 등 현실적인 부분은 잘라지지 않지만 마음의 평안은 천만금의 가치가 된다는 뜻이다.

 

채움과 비움을 반복해야 그릇이 커진다.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에 지금 이 순간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어제 보다 오늘이 더 좋은 날임을 믿는다. 비움이 없는 채움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의미한다. 어제는 채움이 많았다면 오늘은 비움의 삶을 자유롭게 함을 깨닫는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내 손에 무언가를 늘 움켜쥐고 있다면 손의 기능은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조금씩 수몰되는 기능을 느끼지도 못한 채 더 움켜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사람 관계에서 오는 욕망이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다. 쌀을 한 줌 움켜쥔 뒤 어떻게 되는지 경험해보자. 쌀은 손에서 조금씩 빠져나간다. 그래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매 순간 소유와 존재를 생각한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최소의 것을 취한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견디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어느 날부터 필요 이상의 것을 저축한다.  또는 필요한 만큼만 했을 때는 더 하지 않으려 한다. 때론 자기 계발, 자기만족을 하기에 필요 이상의 것을 원하며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기심이 생긴다. 그 이기심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욕심 때문에 붉은 등이 생기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자리 잡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필요한 만큼만 소유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채워지면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데 채우기만 하면 비우는 방법을 모른다. 채우기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기 힘들다. 또 타인과 관계에서 나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눔은 다른 형태다. 일상생활에서 도 채움과 비움은 무한히 반복된다. 김장철에 김장김치를 넣으려면 남아있는 김장김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계절에 맞는 옷을 입으려면 제때 옷장을 정리해야 한다. 새 옷을 샀을 때는 입지 않은 옷을 정리해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마음속으로만 '잘 보여야지, 밉보이면 득 되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처음부터 대놓고 드러낸다. 다른 사람한테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지 않으냐 는 말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시욕이다. 과시욕은 비교의식을 만들어 낸다. 비교 의식은 결국 불행의 출입문이 된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화학비료를 사용해 보았다 이 비료를 사용한 땅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곡식을 수확했다. 감탄한 농부들이 마을의 한 어르신에게 가서 '어르신 백인들이 주고 간 이 가루를 썼더니 수확량이 2배나 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어르신은 '잘 되었네 친구들, 내년에는 농사를 반 만 지어도 될 테니 말일세.'라고 대답했다. 과연 그들은 내년에 농사를 반만 지었을까? 필요한 만큼의 의미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그러나 최소를 의미한다. 최소의 소유를 만족해 보니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추상적인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이것은 내게도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아등바등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자칫 도덕성, 양심, 인간애 등을 놓치게 된다. 비움이 없는 채움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욕심일 뿐 즐겁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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