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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 벤처기업 성공 신화의 주역, 사람 중심의 융합 서비스 개발 주창론자

지구빵집 2013. 2. 2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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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사진)는 벤처기업 성공 신화의 주역이면서, 사람 중심의 융합 서비스 개발 주창론자로 박근혜 정부의 미래 먹거리 개발을 담당할 미래창조과학부의 역할에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내정자는 중학생이던 지난 75년 미국으로 이민 간 뒤 미국 해군에 입대해 7년 동안 원자력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으며, 1992년 벤처기업 '유리 시스템즈 (Yurie Sytems)'를 창업해 1998년 루슨트테크놀로지스(현 알카텔 루슨트)에 10억 달러(한화 약 1조원) 이상에 매각해 벤처 신화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다. 


이후 김 내정자는 루슨트 광대역 캐리어 네트워크 부문 사장을 거쳐 2000년 광 네트워킹 부문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1년에는 워싱턴 위저즈 미국 프로농구팀(NBA)의 공동구단주가 되기도 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005년 4월부터는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벨연구소 사장으로 임명돼 연구소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벨연구소는 1925년 알렉산더 그래함 벨의 이름을 따 설립됐으며, 지금까지 1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이다. 김 내정자가 벨연구소 사장을 맡을 당시 경영난을 겪던 벨연구소는 김 사장의 지휘아래 안정을 되찾았고, 김 내정자는 지난 2011년부터 알카텔 루슨트의 최고전략책임자(CSO)를 겸임하고 있다.


40년 가까운 미국 생활을 했지만 김 내정자는 한국어에도 능통해 한국인과 만나면 일상적인 대화는 한국어로 소통한다. 


<약력>△1960년 서울 출생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전자공학과 △메릴랜드대학교 대학원 공학박사 △메릴랜드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유리시스템즈 설립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광전송네트워크부문 사장 △알카텔 루슨트 벨연구소 사장 △알카텔 루슨트 최고전략책임자(CSO) 겸임



박근혜 정부의 핵심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김종훈 알카텔-루슨트 최고전략책임자(CSO)가 내정되면서 그가 쌓아온 성공 스토리가 새삼 주목 받고 있다.


김 내정자는 가난을 극복하고 글로벌 IT 업계 최고 자리에 오르면서 이미 업계에서는 살아있는 벤처신화, 아메리칸 드림의 주역으로 꼽혀왔다. 과학기술 및 ICT(정보통신) 산업 현장에서 기대감을 갖는 이유다.


하지만 사실상 40년 가까이 외국인으로 살아온 김 내정자가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총괄하고 기술보안·정보보호 업무를 맡는 부처 수장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김 내정자는 장관으로 임명될 경우 알카텔-루슨트 경영진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인선 과정에서 잡음을 줄이기 위해 최근 한국 국적도 미리 취득했다. 


김 내정자와 함께 일해 온 한 한국인 직원은 "한국어도 잘 구사하지만 영어를 쓰는 것을 훨씬 편안해 하는 게 사실"이라며 "한국 초청 강연 때 영어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아침 9시 이전에 승부를 봐라"


1960년 서울 출생으로 중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김 내정자는 가난을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가 성공비결로 꼽는 것 중 하나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것. 남들은 9시부터 5시까지 일을 하지만, 9시전에 무엇이라도 하나를 성취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메릴랜드의 빈민촌에 정착한 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언어장벽과 가난. 하지만 근면성실함이 몸에 밴 그는 시간을 쪼개 쓰면서 이를 극복해나갔다. 밤에는 편의점에서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일하며 학비를 벌고 야근이 끝나면 바로 학교로 갔다. 동양인으로서 학교에서는 외톨이었지만 공부, 특히 수학과 과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모자란 잠은 수업 후 2시간가량 자는 게 전부였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으로 학창시절을 보내며 고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한 그는 명문 존스홉킨스대학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 그의 부지런함과 집중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일화 하나. 그가 논문을 한참 쓰다가 배가 고파 시계를 보니 2시였다. 그래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서관을 나와 보니 새벽 2시였다는 것.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을 줄 알고 나갔는데 깜깜했다"며 "12시간을 도서관에 앉아 집중하며 논문을 쓰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대학졸업후에는 7년간 해군장교로 복무하며 사업가의 꿈을 위해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석사학위 후에는 메릴랜드대에서 보통 4~6년 걸리는 공학박사 학위를 최단기인 2년에 마쳐 지금도 이곳에서는 전설로 통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아메리칸 드림 아이콘으로


32세가 된 1992년 김 내정자는 벤처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기업의 잇단 스카웃 제의를 뒤로하고 나홀로 길을 택한 것. 회사이름은 큰 딸 이름(유리)을 따 유리시스템즈로 짓고, 5년 내 10억달러 가치가 있는 회사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직원 한명으로 시작한 유리시스템즈가 창업 당시 주목한 분야는 ATM 통신기술 장비. 걸프전 당시 데이터 송수신이 제대로 안돼 적군의 전투기를 놓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서로 다른 통신 네트워크(무선 구리선 광케이블) 사이에서도 데이터가 제대로 전달되게 하는 신기술이다. 


유리시스템즈는 끈질긴 개발노력 끝에 1998년 ATM 통신장비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한 대당 가격이 10만달러까지 치솟으면서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린 것.


98년 김 내정자는 유리시스템즈를 세계 최고 통신장비 회사인 루슨트테크놀로지(현재의 알카텔-루슨트)에 10억달러(당시 한화 1조3000억원)에 매각하며 포브스 선정 미국 400대 부자에 올랐다. 당시 그의 재산 7200억원이다.


매각 당시 직원들에게도 주식의 40%를 나눠주며 직원 중에는 20명가량의 백만장자가 나왔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다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훌륭한 팀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게 김 내정자의 생각이었다. 


1998년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1면 박스기사를 통해 "세븐일레븐에서 야간근무를 했던 고학생의 기업가 정신이 마침내 실현됐다"는 내용으로 그의 성공적인 아메리칸 드림을 소개했다.


◇'美의 자존심' 벨연구소 사장까지


김 내정자는 회사를 매각했지만 루슨트는 그를 다시 스카우트했다. 루슨트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다. 김 내정자는 루슨트에서 광대역 네트워크 부문사장 등을 맡으며 글로벌 경영인으로 성과를 냈고 메릴랜드대에서 교수로도 재직했다. 


이미 엄청난 부와 명예를 축적한 그에게 다시한번 도전과 성공의 기회가 찾아온다. 루슨트가 위기에 처한 벨연구소 사장직을 제의한 것. 


벨연구소는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1925년 설립된 민간연구소로, 전기통신 및 기초과학기술을 연구한다.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미국의 자존심'으로 꼽힌다. 루슨트는 김 내정자의 혁신, 도전정신을 높이 샀고 그를 영입해 시장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연구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김 내정자는 몇 차례 고사했다. 벨연구소 역사상 사장 제의를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자격이 부족하다"는 게 거절 이유다.


결국 루슨트측의 삼고초려 끝에 2005년 김 내정자는 벨연구소 수장에 올랐다. 벨연구소 최초 외부인이자 최연소 수장이다. 김 내정자 부임 이후 연구소는 달라졌다. 기술을 통합하는 팀과 제품을 빨리 만들어 시장에 투입하는 벤처팀을 만드는 등 상용화 전략을 펴면서 김 내정자는 벨연구소를 위기에서 구한 최고의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김 내정자는 지난해 7월부터는 알카텔-루슨트 최고전략책임자직을 겸임해 회사 전략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한국서 자선사업", "이공계 출신에게 엄청난 기회올것"


김 내정자는 2002년에는 워싱턴 위저즈 프로농구 팀(NBA)의 공동 구단주가 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워싱턴 위저즈는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이 한때 지분을 갖고 공동구단주로 일해 왔던 곳이다.


김 내정자는 사업 뿐 아니라 운동에서도 도전정신이 남다르다. 철인 삼종경기에 도전한 적도 있고, 기록은 저조하지만 마라톤 완주도 해냈다.


한국과의 인연은 깊지 않지만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선사업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쳐왔다. 지난 2004년에는 스탠퍼드대에 한국학 석좌교수 기금으로 200만 달러(24억원)를 쾌척했다. 


메릴랜드대학교에 동양인의 기부로 만들어진 대학건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본인이 기부해 김종훈 엔지니어링 빌딩을 만들기도 했다.


외환위기 직후 도움을 주기 위해 조흥은행에 투자하려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정부 지원 한계와 예상 투자금이 과도해 계획을 접었다.


한국은 초청강연 등을 위해 일년에 한두번 찾는다. 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이공계 위기론과 관련 "일시적 현상"이라며 "앞으로 엔지니어 등 이공계 출신들에게 엄청난 기회가 올 것이고 아이들에게 이 점을 꼭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특히 기업들에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한국은 가장 앞서가는 사용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잘 활용하고 기술이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본다면 새로운 시장, 새로운 비즈니스 리더로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조언해왔다.




미래부 이끌 김종훈 누구인가


"과학·ICT 융합으로 미래산업 창출"


딸 이름 딴 '유리시스템즈' 루슨트에 팔아 38세에 美 400대 부자

이민 초기 신문배달…美핵잠수함서 7년 복무

과학·IT 분야의 경험, 창조산업과 접목 기대


< 이민자 출신 첫 장관 > 박근혜 정부 미래창조과학부 초대 장관으로 지명받은 김종훈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 사장은 17일 밤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갖고 “막중한 임무를 맡았지만 도전적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 제공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을 설계할 새 정부 미래창조과학부의 첫 수장으로 김종훈 알카텔-루슨트 최고전략책임자(CSO·53)가 발탁됐다. 김 장관 후보자는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최고 민간 연구·개발(R&D) 기관인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미국 이민 1.5세대 한국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정부조직 개편 핵심 부처 장관직에 이민자 출신을 발탁했다는 점에서 ‘파격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후보자는 17일 밤 기자들과 만나 “새로운 일자리와 미래산업을 창출하는 것이 미래창조과학부의 업무이자, 나 자신의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며 “임무가 막중하지만 과학과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 생산적으로 융합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도전적 정신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같이 힘을 합쳐 국민들께 약속한 정책들을 실천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김 후보자는 중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가난을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갔다. 그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메릴랜드의 빈민촌. 이민은 역경의 나날이었다. 가난은 물론 언어장벽, 인종차별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신문배달과 편의점·주방보조 아르바이트 등 밤새 일해 학비를 벌었다. 일이 끝나면 학교로 달려갔다. 잠은 수업 후 2시간가량 자는 게 전부였다. 잠이 부족한 탓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죽기살기로 공부한 끝에 그는 미국 명문 존스홉킨스대 전자공학과에 진학, 기술경영학 석사학위까지 따냈다. 메릴랜드대에서는 보통 4~6년 걸리는 공학박사 학위 과정을 최단기인 2년에 해치웠다. 이 기록은 아직도 전설로 통한다. 몸에 밴 부지런함이 그의 무기였다. 논문 준비에 파묻혀 오전 2시를 오후 2시로 착각, 점심을 먹으려 했던 일화도 있다. 


1992년 32세였던 김종훈 후보자는 수많은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벤처회사를 설립했다. 이름은 유리시스템즈였다. 큰딸 이름(유리)을 땄다. 당시 그는 “5년 안에 10억달러 가치의 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꿈 같은 목표였다. 그러나 그는 꿈을 이뤄냈다. 미국 해군 핵잠수함 장교로 7년간 복무한 경험을 살려 ATM이라는 군사 통신장비를 개발했다. 서로 다른 통신 네트워크(무선·구리선·광케이블) 사이에서도 데이터가 제대로 전달되게 하는 신기술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군 전투기들이 위성 등 다른 네트워크에서 오는 데이터를 제대로 수신하지 못해 적군의 전투기를 놓친 경우가 있다는 데서 착안했다. 


1998년 이 장비 상용화에 성공한 그는 유리시스템즈를 세계적인 통신장비업체 루슨트테크놀로지스(현재의 알카텔-루슨트)에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10억달러(약 1조800억원)였다. 이 거래로 그는 38세의 나이에 미국 400대 부자가 됐다.



김종훈 장관 후보자(오른쪽)와 부인 신디 김이 2006년 미국 워싱턴DC의 한 미술품 전람회에서 찍은 사진. /출처:워싱턴라이프(washingtonlife.com)



○‘노벨상 산실’ 벨연구소 최연소 CEO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도 김 후보자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루슨트로 스카우트된 그는 광네트워크 부문 사장 등을 맡아 글로벌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박사 학위를 땄던 메릴랜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2005년 벤처 경영인과 교수를 거친 그는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제의를 받았다. 수년간 성과를 내지 못해 위기에 처한 벨연구소 사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벨연구소는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1925년 설립된 민간연구소다. 전기통신 부문과 기초과학기술을 주로 연구한다. 지금까지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3만개가 넘는 특허를 갖고 있다. 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까지만 해도 외부 출신이 벨연구소 사장직을 맡은 사례는 없었다. 벨연구소는 불굴의 의지와 혁신, 도전정신의 아이콘인 김 후보자를 영입해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김 후보자는 수차례 고사했다.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벨연구소는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3개월간 연구소 사장 자리를 공석으로 놔뒀다. 삼고초려 끝에 김 후보자는 외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최연소 나이에 벨연구소 사장을 맡았다. 그는 기대에 부응했다. 연구 실적을 상품화해 재빨리 시장에 내놓는 벤처팀을 만들어 성과를 냈다.


벨연구소에서 그는 직원보다 더 열심히 뛰는 일 중독자로 통한다. 연구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장실에 앉아 있기보다 직접 찾아가 토론을 즐긴다. 식사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은 빵과 음료로 때우기 일쑤다. 이런 지독한 열정으로 그는 벨연구소를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죽어가던 연구소를 살아 있는 연구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김 후보자는 팀 워크를 강조한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는 또 직원들에게 “과거를 돌아보지 마라”는 말도 자주 한다. 성공이든 실패든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새롭게 도전하라는 뜻이다. 그는 갑부지만 딸과 함께 비행기를 탈 때는 이코노미석을 탄다. 아이에게 편안함보다 역경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한국의 미래를 떠맡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뭔가를 하라.” 김 후보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공의 비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미래창조과학부의 사명과 비슷하다.


미래부 장관직은 그에게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김 후보자가 한국의 국회와 업계 풍토 등 국내 시스템 전반에 어두운 데다 국내 인맥이 넓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기술 이전 등에 관한 시스템이 부족하고 정책 추진 과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를 잘 설득해야 한다”며 “이런 이해가 부족해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초과학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아우르는 미래부를 역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벤처기업과 세계 최고 R&D 기관을 이끌어본 경력이 R&D 결과를 실제 산업에 접목해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얘기다. 교과부 출신 한 고위 공무원은 “미래부에 주어진 사명은 ICT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라며 “김 후보자가 혁신의 선구자로 불리는 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학문적으로 중요함.  기사출처: 전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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