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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러너스

2025 서울마라톤 완주, 다시 처음 마음으로 시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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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비가 자욱하고 꽃은 다시 피는 계절

봄 바람이 외로운 러너들을 감싼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회에서 지키는 세 가지 원칙은 즐기고, 걷지 않고, 완주하기라고 했다. 남자는 그 원칙을 바꾼다. "편안하게 달리고, 포기하지 말고, 받아들인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거리는 일류 선수든, 처음으로 완주하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힘들다. 특히 35km 지점을 넘어서면 누구나 '나는 누구일까? 여기는 또 어디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누구도 이런 혼돈의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아주 오랫동안 빵을 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연주를 했다고 해도, 다시 일을 하는 순간에는 이전에 했던 일보다 더 어렵다. 물론 경주에 나가 달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를 알았다.

 

"처음 만든 책이 어린이책이었는데, 어쩌면 그 책은 나 자신을 위해, 내가 가지려고 만든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백 권을 넘었으니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오십여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여전히 어렵다. 아니 휠 씬 더 어려운지도 모른다. 어제보다는 오늘 조금이라도 더 잘하고 싶으니까 말이다." 

 

대회가 있는 날은 집을 나서기 전에 늘 면도를 한다. 습관이다. 아마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달리라면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달릴 것이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제법 바람이 분다. 피부는 가는 빗줄기를 느끼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약간 쌀쌀하지만 긴팔과 긴 타이즈를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손발이 차서 장갑은 신어야 한다. 삶은 모든 게 놀라움의 연속이라 예측할 수 없다. 기대하지 않고 사는 게 편하다. 

 

B조 배번을 받았지만 동료의 완주를 돕기 위해 페이스메이커를 하기로 했다. 가장 늦게 출발하는 F조에 대기한다. 10km 코스 신청자 2만 명은 8시에 잠실 종합운동장 동문을 출발한다. 가락시장역에서 반환점을 돌아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마라톤은 언제나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다. 심지어 피니시라인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국엔 우리 인생처럼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마라톤이 매혹적인 이유다.

 

42,195km 풀코스 신청자는 2만 명이 넘는다. 광화문 광장을 출발해 청계천과 종로 일대를 돌아 군자역, 어린이 대공원, 서울 숲을 거쳐 잠실 대교를 건너 같은 피니시 라인으로 들어온다. 출발점에는 모두가 다른 목표와 다른 마음을 가진 러너들이 출발시간을 기다린다. 맨 앞에 엘리트 선수(해외 초청러너와 국내 선수들), 명예의 전당(3시간 이내 완주자인 S그룹) 러너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여유 있게 몸을 푼다. 그 뒤로 A부터 G그룹까지 3천 명씩 그룹을 지어 촘촘하게 대기한다. F그룹과 구분이 되지 않는 G그룹엔 외국에서 마라톤을 즐기러 참가하는 러너들이 전부다. 미국, 중국, 베트남 선수들이 많다. 이름을 보고 적당히 출신 국가를 예측한다.

 

남자는 한참 동안 길을 잃었다. 하나의 문이 열리면 다른 문이 닫힌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닫아야 하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항해하는데 필요한 바람은 충분했지만 키가 고장 났는지 도대체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날들이 지났다. 삶이 가끔 웅덩이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 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달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그래도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삶이 주는 놀라움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한다. 무얼 해도 삶은 주옥같다.

 

8시에 엘리트와 마스터 선수가 출발하고 F조는 8시 20분에 출발했다. 동료의 페이스메이커를 해주기로 했다.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 전체 거리를 함께 달려주는 사람이다. 함께 출발하고 모든 거리를 함께 달린다. 페이스를 정확히 맞추어야 하고, 힘들어도 걷지 않도록 보살피고, 정말 걷고 싶다면 걷기도 하고, 중간에 잠시 쉬며 스트레칭을 함께 하고, 마지막 피니시 라인을 밟을 때까지 옆에서 달리는 일을 한다. 선배에게서 배운 것들은 다시 후배 러너에게 자신의 경험을 더해 전수한다. 

 

광화문을 출발해 잠실 종합 운동장 동문까지 달리는 주로다. 우비를 입고 힘차게 달려 나간다. 광화문 넓은 도로에서 출발해 도심 한가운데를 달리는 기분은 마치 무어라도 된듯한 기분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마라톤 응원 문화가 활발하지 않아서 교통을 통제하는 여러 곳에서 옥신각신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풀코스 지원자가 2만 명이 되니 ㄹ자 코스를 두 번 달리는 청계천 변을 지나 20km 지점까지는 천천히 간다. 동료보다 조금 앞서 쫓아오도록 달리지만 여전히 뒤 저친다. 옆에 두고 달리다가 어느새 내가 앞서 가고 있었다. 

 

하프를 넘어서면 아주 길고 일직선인 코스가 군자역까지 이어진다. 어린이 대공원을 왼쪽에 끼고 중랑천을 따라 내려가 서울 숲까지 가서 잠실 대교 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잠실 대교 직전인 37km 지점에 오면 롯데 월드 타워가 보인다. 이제부터는 남은 거리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를 생각하며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달린다. 바로 잠실 대교 오르막이 시작한다. 대교를 달리는 기분은 삼삼하다. 시원한 강바람과 동호회와 크루들의 응원이 소란스럽다. 여기서부터 진짜 힘들면 응원 부대들이 주는 콜라, 막걸리, 맥주, 물을 무제한 마실 수 있다. 생각보다 그런 것에 욕심은 사라지고 오로지 피니시 라인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 이제 다 왔다는 생각에 지나온 길이 아쉽게 느껴진다.

 

지금 남자가 사는 지루한 삶도 역시 지나고 나면 굉장히 아쉬울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삶에 회한이 없는 사람은 없다. 잠실 대교를 건너 조금만 내려가면 잠실 역 사거리에서 종합 운동장으로 달린다. 운동장 직전에서 꺾어 동문으로 가면 피니시라인이 왕국의 입구처럼 있다.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 살면서 참 많이 달렸다." 

 

무엇에 묶여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게 지나간 과거였든, 남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업에 짓눌린 감정이든 상관없었다. 터널 안에서 나가는 길은 계속 걷는 것뿐이다. 지식의 저주란 올챙이 적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남자가 그랬다. 처음 달리기를 했던 그 감정들, 생애 처음으로 풀코스를 완주했던 그 위대한 순간들을 모두 잊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려면 그때의 느낌과 막막함, 힘든 여정을 나중에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을 모두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문을 열었다면 이미 열려있던 어떤 문은 닫혀야 한다. 힘껏 문을 연 그 힘으로, 닫아야 할 문을 쾅하고 닫아야 한다. 그 힘이 분노나 욕망이나 꿈꾸고 갖고 싶은 것이든 어쨌든 힘이다.

 

아직은 더 달릴 힘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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