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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감옥

지구빵집 2011. 4. 1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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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유시민을 말한다
 386의 누나로서 말하노니 “익숙한 것은 곧 감옥이다”

유시춘 / 작가

       

 

         

4월은 잔인한 달인가.

 

전후의 초토를 ‘황무지’에 비유한 모더니스트 T.S Eliot의,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는 4월은 정녕 잔인하다.

 

‘인생은 빈 술잔, 주단을 깔지 않는 층계. 사월은 천치와도 같이 중얼거리며 온다’는 영국 여성 시인의 사월송이 다가든다.

 

봄의 ‘신생’을 찬탄하는 노래보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을 읊은 그것이 더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유명한 '春來不似春'도 그러하다.

 

이미 많은 독자께서 알고 계시다시피 필자는 유시민의 누나이다.

 

78년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집을 떠난 이후 줄곧 유시민은 나와 같이 살거나 내 근처에서 살았다. 92년 독일 유학을 떠나면서 그들 세 식구는 일산사는 나에게 주민등록을 올려놓았다. 그것이 2003년 고양시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의 계기가 되었다.

 

무명의 운동권 학생이 제도권에 데뷔한 단초가 되었을 ‘항소이유서’의 기억을 더듬으면 유시민과 나는 혈육으로는 오누이의 사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진한 동지애가 있었지 싶다.

 

85년 5월, 항소심 법정에서 만난 이돈명 변호사께서 내게 지나가는 말씀으로 ‘시민이 항소이유서 읽어봤소?’ 하시기에 이튿날 사무실로 가서 어눌하게 그걸 좀 보고싶다고 말씀드렸다. 줄 그어진 구식 편지지 30여장에 쓴 꽤 두툼한 분량이었다.

 

혼자서 다 읽어보니 명색 작가인 나로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글이었다. 26세의 청년이 영어된 처지에서 참고문헌 한 줄 없이 써내려간 글이라기엔 믿기지 않게 정돈된 구성의 미문이었다.

 

곰곰 생각하다가 나는 친지 몇 사람이라도 함께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그걸 들고 을지로 3가로 갔다. 골목에 촘촘히 박혀있는 청타인쇄소 한 곳으로 들어가 현장에서 급행으로 빼준다는 조건으로 급행료를 얹어주고 500부를 인쇄했다. 당시는 그것도 엮기에 따라서는 범죄로 구성될 법 했기에 나는 줄행랑을 치며 골목을 빠져나오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느라 그만 그 원본을 인쇄소에 두고 나왔다.

 

민추협 사무실, 법원 기자실, 서울대 총학생회 등 몇 곳에 갖다놓은 ‘항소이유서’는 그렇게 전국으로 삽시에 퍼졌다. 놀라지 마시라. 다음달 어느 아침에 눈을 떴더니 월간조선 광고문안에 그 항소이유서가 버젓이 떠있는 게 아닌가. 물론 군데군데 삭제한 글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그래도 민주화를 상품으로 팔아먹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던 때였다.

 

그 직후에 나는 민가협의 모태가 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결성을 주도하고, 사회 보고, 여러 대학교를 출몰하면서 대학생들을 선동한 죄로 재직하고 있던 고등학교에서 강제 해직을 당했다. 하기는 치안본부, 안기부 등에서 현직 교사인 나를 그때까지 두고 본 것이 오히려 자비로운 일이었다.

 

 

유시민으로 인해 가슴이 베어지는 아픔이 많이 있었다.

 

80년 5월 18일 새벽, 계엄군이 서울대를 덮친 시각 이후 온갖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누군가는 권총을 이마에 들이댄 군인에 의해 유시민이 끌려갔다고 했고 혹자는 이미 죽었다고도 했다. 생사를 모르고 지낸 그해 5월의 보름간은 정말 하늘과 땅이 맞붙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84년 복학 이후, 폭력과격 학생의 대명사처럼 되어 관제언론에 의해 난도질당할 때가 그랬다. 그렇게 온유한 성격의 천래적 페미니스트가 마치 악당처럼 매도당하는 데도 속수무책인 것이 서럽고 슬펐다.

 

하루 걸리는 먼 길인 마산교도소로 면회 가서 ‘금치’라는 교도소 측의 말만 듣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돌아서 나오던 날의 그 아득한 절망과 슬픔을 어찌 표현하겠는가.

 

이것이 또한 어찌 우리 오누이만의 설움이겠는가. 당시 군사정권에 저항한 숱한 양심들이 함께 겪은 고난의 행군이다. 그래도 말과 글을 다루는 우리 오누이는 행복하다.

 

우리 ‘민주화운동지혈사’는 그야말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묵묵하게 헌신한 이들의 선혈과, 꽂도 십자가도 없는 무명용사들의 희생으로 온전히 쓰여져야 한다.

 

 

목련이 처음으로 기린처럼 담위로 봉오리를 쏘옥 내민 사월 아침에 나는 가슴이 몹시 시리고 아프다.

 

우리당 전대가 끝났건만 그 후폭풍은 아직도 인터넷 바다를 떠나지 않는다.

 

유시민을 조직적으로 비난한 386 의원들의 행태를 두고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어 선거기간 중에 입은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사뭇 염려스럽다. 이번 유시민 때리기에 가담했던 386 의원들을 생각하면 진정 마음이 쓰리고 저민다. 80년대 몇년 동안 나는 유시민의 누나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누나였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민가협 총무로서 수없이 캠퍼스의 담장을 몰래 월장했고 수배자들을 밀회하면서 연락책 노릇을 했으며 많은 날들을 교도소 정문을 마주하고 맨 바닥에 주저앉아 바람 실린 마른 빵을 뜯어먹었다.

 

그들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수만장의 유인물을 쓰고 제작하고 뿌렸다. 그들은 내 사랑이었고, 나아가 정녕코 우리 사회의 ‘희망의 거처’였다. 그들이 추구하는 대의는 의심 없이 불의한 권력에 항거하는 ‘정의’였으며, 그들의 갇힌 ‘부자유’는 우리들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볼모였다. 만인을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부자유는 나의 자유의 값을 반추하게 했다.

 

‘만인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때 나는 자유’ 임을 그들은 부자유함으로 증명했다. 단언컨대 우리의 민주주의와 역사는 이들 젊은 사자들에게 빚진 바 크다.

 

이제 그들의 대표성을 지니고 함께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이들이 과거에 군사독재가 애용하던 말을 살짝 바꾸어 그들의 선배에게 날렸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가. 논객들의 지적과 분석이 있었으니 생략하기로 하자. 나의 아우를 향해 날린 독화살이 무척 가슴 아프지만 나는 아직도 386 의원들을 향한 내 사랑과 믿음을 쉬이 내려놓을 수 없다.

 

그들에게 내 진정을 전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87년 5월 23일 오후 2시를 기억할 것이다. 민통련이 광주항쟁 7주년을 기해 민주영령추모주간을 선포하고 그 집회를 종로 3가 탑골공원에서 개최하려던 시각이었다. 종로 3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행인들로 붐볐다.

 

2시 정각. 행인들 사이에서 호각이 울렸고 인파에 섞여 있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도로 위로 쏟아졌다. 도로 위에서 구호소리가 퍼졌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호헌철폐 독재타도’.

 

삼천여명이 도로를 점령함과 동시에 함성은 더욱 우렁차게 이어졌다. 로마병정 차림의 전경들이 막아서면서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가장자리와 앞줄부터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광주출정가’가 터져나오면서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옆사람과 팔깍지를 굳게 끼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서로 사슬처럼 팔을 굳세게 낀 채 도로 위에 드러누워서 연행에 저항했다.

 

86년 11월에 건대사건으로 운동의 주력부대 1,200여명이 모두 구속되는 대탄압이 있었던 터라 연행이 곧 구속을 의미했으므로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인간사슬을 끊어내려는 전경들이 방패로 학생들의 몸을 내려찍기 시작할 때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나섰다. 시민들은 전경을 제지하며 외쳤다. 학생들이 돌을 들었느냐. 화염병을 던졌느냐. 얘들은 맨 주먹인데 왜 먼저 때리느냐. 전경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연행되려던 학생들은 더욱 팔을 단단히 조였다.

 

오, 그 때 잿빛 허공으로부터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비에 젖었다. 학생들을 빨갱이로 오인해 신고하던 시민들이 온전히 자기 편이 되어 지켜주는 감격 앞에서 그들은 울었다. 눈물은 흐르자 마자 빗물과 범벅이 되었다. 한번 흠뻑 젖은 육신들은 이후로 내내 그렇게 사슬을 만든 채 광주영령을 추모했다.

 

끝내 연행된 1,200여명은 그날 자정 이전에 모두 훈방되었다. 경찰은 화염병도 짱돌도 지니지 않았던 그들을 처리할 법률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 날의 투쟁은 학생운동의 오래된 ‘화두’인 ‘대중노선’을 확인한 마침표였다. 전두환 정권 내내 학생들은 선도투쟁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고립무원의 싸움에는 언제나 선혈이 뚝뚝 흘렀다.

 

그러다가 5.3 인천사태와 ‘애학투’의 건대항쟁이 무참히 유린당하는 것을 기화로 ‘대중노선’을 절박하게 고민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독재타도를 위한 동력임을 5월 23일의 가두투쟁은 돈오돈수케 한 것이었다.

 

며칠 후 5월 27일. 마침내 반독재연합체인 ‘국민운동본부’가 창립되고 단일대오로 뭉친 전대협은 전두환과의 일전에 불퇴전의 결의를 다지게 된다.

 

물고기가 물에서 놀 듯이 민주화운동은 국민의 지지와 신뢰만이 절대적 환경임을 터득했다.

 그날 5월 23일 가두투쟁의 현장과 이후 6월항쟁을 내리달렸을 386 의원들은 아마도 이번에 유시민을 향해 돌아보지 아니하고 철없이 내뱉는 ‘한 사람의 열 걸음’을 질타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주문하기도 했다.

나는 집단 공격당한 유시민의 누나로서가 아니라 아직도 내 사랑인 386 의원들의 누나로서 말한다.  

역사의 장강은 부단히 뒷 물결이 앞 물결을 치고 흐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독재시대의 선도투쟁과 대중노선은 이제 흘러간 지난 역사가 되었다.  

노무현의 사람들과 참여정부의 작은 티끌까지 찾아내어 물어뜯고 있는 거대언론, 그 하이에나의 무한자유를 보라. 언론자유에 관한 한 87년 그 때와 지금은 석기시대와 산업사회의 거리만큼 아득하다.

 

그런데 그대들의 레토릭은 여전히 전대협 의장 시절, 고난보다 영광이 더욱 빛나던 시절에 묶여있지나 않은지.

 

그리고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비단옷은 자칫 영혼을 녹슬게 한다는 선인의 경구를 새기라.

 

80년대 한때 청년정신의 정화를 남김없이 분출했던 김민석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면서 허물어졌던지를.
  
김민석은 서울시장 출마를 앞두고 어느 언론사와의 긴 인터뷰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의원으로 ‘정균환’을 자랑했다. 그는 그때 정균환 등과 밀실에서 늘 어울렸으며 민주당 쇄신을 요구하는 정동영을 공격했다.

 

정균환은 그런 김민석의 발언을 참 생뚱맞게끔 링컨의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에 비유했다.

 

 

허무하고 또 허무하지 않느냐.

 

권력은 그렇게 ‘눈 위에 새긴 발자국’과 같은 것이다. 386 그대들이 추구한 꿈은 권력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 사회의 민주화’였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성취된 지금은 민주주의의 컨텐츠를 새롭게 구축하는 과제가 절대절명으로 놓여있다. 지금은 ‘한 사람의 열 걸음’도, ‘열 사람의 한 걸음’도 아닌, 바로 ‘열 사람의 열 걸음’이 요구되는 때이다.

 

소주 한 잔 하면서 형님 아우하며 인맥과 온정으로 권커니 잣커니 하는 짓은 가당치 않은 짓이다. 그런 적당주의 보신주의는 386의 코드가 아니다.

 

80년대 그때처럼 진정과 열의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가 무엇이며 386이라는 가치지향적 개념이 그대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자문한다면 명석한 그대들은 얼마든지 답을 찾을 수 있다.

 

혹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미 그대들에게 익숙해진 것이 있다면 그것과 결별하라.

 

익숙한 것,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감옥이다.

 

 

 

열린우리당 당의장과 상임중앙위원을 선출하기 위해 열렸던 2005년 '4.2 전당대회', 유시민 후보는 선거기간 내내 당 내 인사들로부터 엄청난 비토와 공격에 시달렸고 결국 4위의 성적으로 상임중앙위원에 당선됩니다.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인 2005년 4월 9일, 유시춘님이 데일리서프라이즈에 기고한 글입니다.        편집자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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