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러너스

마라톤의 사계(四季) - 겨울

지구빵집 2019. 1. 9. 10:30
반응형

 

 

달리기가 주는 무심함에 반해 미친놈처럼 달린 지 2년이 지난다. 무엇엔가 들인 시간은 어떻게든 모두 돌려받는다는 말처럼 달리기를 통해 선물을 천천히 하나씩 돌려받았다. 소질 없는 평범한 일반적인 러너의 성장기를 쓰고 있다. 어떻게 매번 달리면 기록이 되고, 거리는 얼마나 빨리 좁혀지는지, 무슨 이유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꾸준히 성장하는 러너로 지내왔는지 생각하면 놀랍다. 내가 이룬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하는 생각에 자주 멈칫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달리는 일이 아름답다면 무엇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달리기를 겨울에 시작했으니 겨울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예의다. 봄, 여름, 가을로 이어지는 사계절의 여정이 순조롭게 끝나길 바란다. 모든 것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고, 그와 함께 주로에 있거나, 함께 훈련할 때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웃고, 즐겁고 행복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마라톤의 사계

 

마라톤의 사계(四季) - 겨울

마라톤의 사계(四季) - 봄

마라톤의 사계(四季) - 여름

마라톤의 사계(四季) - 가을

 

 

 

마라톤의 사계(四季) - 겨울

 

네 개의 계절이 정확히 두 번 지나가는 시간을 달렸다. 달리는 모든 계절이 아름다웠다. 마라톤은 사계절을 모두 담고 있다. 러너는 모든 날씨와 계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여러가지 아름다운 낱말들을 보았다. 공백, 침묵, 러너의 숏컷, 싱글렛, 인터벌, 템포런, 울트라마라톤, 포니테일, 페이스메이커, 트레일런, 우중주(雨中走), 꽃길, 탱크탑, 기모바지, 러너스하이, 러너스블루. 꾸준히 달리다 보면 그 의미와 유래를 알게 된다. 겨울이 지나가는 막바지에 지구가 공전하듯 운동장의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겨울은 공기층이 겹쳐 단단하다. 그만큼 쉽게 깨진다. 추운날이다. 누구나 겨울에 운동이나 훈련을 나갈 때면 잠자리에서부터 치열하게 몸과 마음을 설득해야 한다. 귀찮고 추우니 따뜻한 방안에 있어야 한다는 마음과 춥더라도 운동을 나가야 한다는 몸이 경쟁한다. 모자, 장갑, 바람막이, 여분의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완전무장으로 길을 나선다. 모든 부위를 추위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특히 머리, 손, 발의 보온에 신경써야 한다. 겨울에는 다른 계절보다 준비운동과 스트레칭, 워밍업을 충분히 해야 한다. 가능하면 천천히 오래 달린 후에 속도를 내야 한다. 찬바람과 눈을 헤치고 영동 1교 다리 아래 모이면 몸은 굳어있다. 서두르면 부상을 당하기 쉽다. 맑고 투명한 겨울날은 얇고 딱딱한 공기층을 와장창 깨뜨리며 달린다. 얼마나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지 순간순간 앞에 막아선 공기층에 금가는 소릴 듣는다. 달리는 중에 말을 하면 입이 시렵다. 가능하면 코로 숨을 쉬어야 한다. 차가운 공기가 직접 폐로 들어가면 좋지 않으니 버프와 목도리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다.  

 

주말 아침 정기모임에 운이 좋다면 눈 내리는 거리를 달린다. 무언가에 매혹된다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눈내리는 도시는 매혹적이다. 도시에서의 날씨가 매혹적인 이유는 농촌에서와 달리 하늘이나 날씨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고 해석해야 할 심연을 갖지 않아 매혹적이다. 과정이나 설명이 필요없이 모든 의미들을 횡단해 결론에 이르자마자 빈손으로 되돌아오는 매혹적인 사람과 같다. 

 

눈 오는 거리를 달리는 일은 굉장히 매혹적인 일이다. 도심의 거리를 질주하기 위해 풍경이 보이는 양재천을 달린다. 풍경은 아주 단순하다. 붉은색 주로, 검은색의 자전거 도로, 반짝이는 양재천의 물길과 뚝방 풍경이 전부다. 눈내리는 길을 달리는 일은 재미있다. 비오는 날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눈이 많이 내릴 수록 달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눈은 머리와 팔과 앞으로 나가는 무릅과 발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다. 비누방울이 터질때는 폭하고 꺼지면서 물의 장력으로 물방울이 튀면서 없어진다. 눈은 그렇지 않다. 온도가 적당히 낮고 바람만 불지 않으면 눈은 달리는 몸에 부딪히며 퍽 하고 산산히 부서진다. 펑펑 내리는 눈 속을 달리는 러너 주위에는 몸과 부딪혀 부서지는 눈으로 가득하다. 만약 하얀모자와 하얀 장갑, 하얀 옷과 하얀 신발을 신고 뛰는 사람을 본다면 마치 눈 쌓인 벌판을 하얀 곰이 뛰어가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바닥은 약간 녹거나 부서지지 않은 눈이 쌓인다. 어딜 보나 시야는 가까운 거리로 한정된다. 눈은 순간적으로 열기와 땀으로 가득한 얼굴에 부딪혀 녹는다. 척척한 느낌이 들고, 끈적끈적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러너는 이 지점에서 눈 오는 날 뛰는 것보다 비 오는 날 뛰는게 더 좋다는 사람과 갈린다. 

 

해마다 전국에서 250여개의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 큰 대회가 춘천마라톤 대회라면 한해가 양쪽으로 겹쳐있는 겨울에는 시즌마감, 시즌오픈 마라톤이 있다. 보통 2월 말에 열리는 고구려 마라톤은 봄에 열리는 동아마라톤을 준비하기 위해 달리는 대회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첫 눈은 이미 내린지 오래다. 마지막 대회가 12월 중순 시즌마감 마라톤대회다. 잠실 운동장에서 암사대교까지 한강변을 달리는 대회다. 눈은 내리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비가 사정없이 쏟아진다. 운이 없다. 마라톤대회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열린다. 천재 지변이 발생해서 대회가 취소된다고 해도 참가비는 반환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12월에 찬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은 준비할 게 많다. 일회용 우의, 모자, 위생용 비닐장갑과 노란 고무줄 2개를 챙겨야 한다. 장갑이 비에 젖지 않게 비닐장갑을 끼고 고무줄로 묶는다.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동안 서서히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잠실 운동장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니 비가 그친다. 이런날은 그냥 달린다. 

 

한 해를 여는 첫 마라톤은 1월 중순 시즌 오픈 마라톤 대회다. 잠실 보조경기장 옆 토끼굴을 나가면 있는 청소년광장에서 열린다. 날씨가 영하 5도를 가리킨다. 겨울 아침 이른 시간은 추운지라 9시에 집결하여 10시에 출발한다. 도착하니 한산하다. 사람이 많지 않다. 배번, 핀, 옷 봉투 등 모든 물품을 현장에서 배부한다. 물품을 받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보관하는 시간을 늦춰 가능한 한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한다. 두 팔과 가슴, 두 다리를 쓰다듬는다. 부상에 조심하고 가슴 펴고 걷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약 4백 명에 가까운 러너가 힘찬 함성과 함께 하프, 10km, 5km 코스를 향해 출발한다. 한강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잠실대교, 잠실철교, 올림픽대교, 천호대교, 구리 암사대교를 넘어 고덕천교 부근까지 왕복하는 길이다. 달리는 길은 바로 한강 뚝방길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강과 육지를 구분하는 인접한 경계이면서 육지와 강의 시작점을 알려주는 경계를 달린다. 사실 경계란 없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허구로 뭉쳐 부수기 힘든 구분선이 바로 경계다. 지금 이 순간도 머리가 명령해서 달리는 게 아니라 몸이 달리니 달리는 것이다. 몸과 정신의 경계는 없다. 그 경계를 지우기 위해 부단히 달린다. 바람은 불지 않아도 공기는 매우 차갑다. 

 

출발 후 한참을 천천히 달린다. 몸이 충분히 예열되지 않았고, 추위에 갑자기 속도를 높이면 부상의 위험이 있다. 시즌 마감 마라톤 대회 때 달린 코스라서 금방 익숙해졌다. 빨리 달려 기록을 더 줄여보려는 욕심도 나겠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12월하고는 다르게 눈과 얼음으로 덮인 한강을 보면서 달린다. 얼핏 얼음 벌판 위에 하나의 세상이 생겼다. 함께 가고 싶었지만 위험한 세상, 언젠가는 가는데 지금은 갈 수 없는 세상이 잠깐 보였다. 세상이 눈 쌓인 벌판 아래로 사라지자 지금은 가질 수 없지만 갖고 싶은 것들이 다시 떠오르다 사라졌다.

 

하프를 뛰고 들어와 완주 기록증을 발급받고, 순두부와 김치국으로 속을 달랜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함께 달린 동료를 서로 바라본다. "감사합니다. 함께 달려서 잘 달렸어요." 인사를 한다. 그말은 사실이다. 옆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느냐 없는냐는 그가 달성한 결과에 영향을 많이 준다. 추운 겨울날, 마라톤을 시작하고 4번 째 달린 하프를 달렸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늘 하프나 풀코스는 기대감 못지않게 두려움도 준다. 달리는 동안 무심의 과정을 즐기고, 한 구간도 걷지 않고, 골인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은 날아갈 듯하다. 겨울이 주는 달리기의 환상적인 매력은 우연히 들른 꽃 집 이름이 '봄이 옵니다' 라는 글과 마주치는 기분이다.

 

당신이 지금 러너라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지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러너가 아니라면 당신은 더 행복한 사람이다. 달리기로 결심하고 시작하기만 하면 러너들이 누리는 행복을 금방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쉽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에 의존한다고 한다. 큰 행운보다 소소한 작은 행복감을 자주 누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러너들은 행복한 사람이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중력을 고려해야 한다. 몸무게, 특히 뱃살과 속도와 거리에 대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무엇보다 꾸준히 오랜 시간을 달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 자주 갖지 못하는 삶의 최상의 성취감과 자주 오는 작은 행복한 감정을 반드시 돌려받는다. -見河-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