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바다 - 공지영,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간직할 수 있다면, 이미 영원을 사는 거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영원은 영원히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는다.(p.17) 4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된 여자의 첫사랑 조차도 영원을 살지 못한 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첫사랑과의 해후는 여자와 남자에게 남김없이 폐허가 된다.
성당 수련회로 용유도 섬으로 놀러 간 여자는 물에 대한 공포심으로 해변가 언덕 먼발치에서 남자를 바라본다.
여자가 오랜 세월을 간직하고 있던 이별에 관한 의문을 푸는 여정은 화해였다. 어쩌면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고 삶의 절정을 먼바다에서 함께 떠올린 남자와 화해했다. 집요하게 남자와의 만남을 방해한 남자의 어머니와 여동생과 화해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여자의 여동생과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담았다.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누구나 가슴속에 묻고 사는 질문이 한 가지 있다. '삶은 왜 이렇게 엉망인가?' 하는 질문을 화해로 풀지 못하는 사람은 삶의 아름다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책을 읽은 남자는 50대가 돼서야 자신과 화해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딸과 화해하고, 남자는 아들과 화해한다. 화해하는 일은 당사자의 가슴이 더욱 넓어져 딸과 아들의 우주를 이해하는 과정이든가, 아니면 냉정하고 차갑게 마음을 거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먼바다에서 여자는 40년 이란 세월 동안 스스로를 얽어 맨 족쇄를 깨고 자유를 얻는다. 여자도 제법 알법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행복하지 않다. 꼭 불행한 것도 아니다. 신부가 되고 싶었던 남자는 여자로 인해 신부가 되기를 포기하고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아직은 어렸던 여자는 대답을 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남자는 떠나고, 남자의 어머니와 동생은 여자를 배신한다. 남자는 미국으로 떠나고 성당의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남자는 죽지 않기 위해 장거리를, 몇십 키로를 사이클을 탄다.
첫사랑이란 갖지 못한, 이루지 못한 말할 수 없는 아쉬움과 회한이다. 그 앞에선 누구나 아주 가냘프고 힘없는 비를 흠뻑 맞아 날지 못하는 새가 된다. 그게 짝사랑이든, 헤어진 사랑이든 마찬가지다. 여자도 잊었고, 남자도 알지 못하는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억들을 조금은 즐겁게 끄집어 낸다. 여자에게 남자와 헤어진 이유는 사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일이다. 남자도 애써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중간에 가끔씩 나오는 낭만적인 시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주인공의 세미나와 여행과 맞물려 편안한 책 읽기를 제공한다.
저자 공지영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마음속에 아련한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끄집어 내 곰삭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먼바다를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으로 읽길 권한다.
먼 바다라고는 해도 물이 그리 깊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해바다는 연두에 가까운 에메랄드빛이었다. 바다 수면 위로 햇살들이 반짝이며 쏟아져내리고 있어서 어쩌면 투명하게도 보였다. 대기는 습해서 무더웠지만 일단 바다에 잠기고 나면 물속은 멧비둘기 품처럼 훈훈해서 헤엄치기 좋은 날씨이긴 했다. 그와 친구들의 머리는 넓고 잔잔한 바다 위에 고무공처럼 떠 있었다. 웃음소리가 간간히 수면 위로 반사되어 해변으로 울렸다. 그녀는 그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 구부러진 소나무들이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숲에 혼자 서 있었다. p.10
그때 인생은 그녀에게 운명의 다트를 던지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애써 기억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어린 시절 친구네 집 풍경들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들은 그녀에게 수동태로 머물고 있었다. 오히려 가끔은 그녀가 그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애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그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수동태가 옳았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래도록 그녀는 생각했었다. 그와 내가 살아 있는 한 한 번쯤은 그와 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러면 나는 묻게 될까? 그날 그게 무슨 뜻이었어요? 하고. p.19
그때였다. 로비에 가득 찬 사람들의 노랗고 갈색이고 검은 다양한 머리칼과 어깨 그리고 상반신 들 사이로, 마치 거센 푹풍우 속에서 언뜻 보이던 별처럼 누군가의 시선이 빛나고 있었고 그녀가 시선을 들자 두 눈은 정확히 마주쳤다. 아무 설명도 없이 그녀는 그것이 그라는 것을 알았다. 아주 약하게 감전된 것 같은 통증이 뒤통수를 지나 등뼈를 타고 쭉 내려갔고 얼마간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던가 보았다. 주시하고 있었지만 40년이라는 그 세월이 그를 머뭇거리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p.61
그는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날 너랑 나랑 둘이 먼 바다로 나갔었잖아.” 휘익하고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를 들어 올린 바람처럼 그것은 힘이 제법 셌다. “무슨 먼바다요? 저는 깊은 물에서 헤엄 못 쳐요.” 그가 잠시 바람이 빠지는 듯 웃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니 더 이상은 설명하기 싫다는 듯 단호하고 가볍게 말했다. “나갔어. 나랑 둘이.” 문득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더 우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몽유도. 죽음의 기록으로 가득 찬 이 지하공간에서 그는 왜 갑자기 그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호명하는 것일까. p.185
달이 있었던가, 별이 떴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와 그녀 말고 누가 더 거기에 있었는지 그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들지 않았고 그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파도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어둠이 내려 이제 사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그가 말한 대로 우주가 열려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주는 행복으로 꽉 차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그런 충만을 맛본 적은 다시는 없었다. 첫사랑.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날들. p.228
“이모, 발끝으로 춤을 추는 건 힘든 게 아니야. 제일 힘든 건 무대에서 다른 아이들이 춤출 때 뒤에서 멈춰 서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 발레 선생님이 그랬어. 그 멈춰 서 있는 것도 춤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멈춰 서 있는 것도 춤이라면 멈추어 있던 통증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던 것, 어쩌면 숙성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도 그리움도 그랬다. 숙성된 그리움과 아픔이 이제 뚜껑을 열고 나와 그녀의 주인 행세를 하는 듯했다. p.246
추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지만 이 소설은 당연히 허구이다.(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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