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러너스

9월 달리기, 빠르게 달릴수록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지구빵집 2020. 9. 21. 20:52
반응형

 

 

9월 달리기, 빠르게 달릴수록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아침부터 불어오는 바람 냄새와 피부에 닿는 온도가 다르다. 맑은 기분과 함께 근거 없이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마음으로 괜히 미소가 핀다. 일단 폭염이 물러가서 좋고, 코로나도 일주일 힘껏 참으면 성과를 거둘 것도 같다. 개강이다. 여러모로 좋긴 좋다. 태풍 마이삭이 오고 있지만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준비를 단단히 하면 태풍은 힘없어 보이고 큰 피해 없이 지나가고 방비를 허술하게 하면 큰 태풍으로 기록되고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사는 모습이 다 그렇다. 

 

달리기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이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달리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사 달리기가 걷는 일로 변할 지라도. 지옥 같은 날이 계속되고,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지라도 달리기는 나를 지키는 유일한 일이다. 지금은 그렇다.

 

9. 3. 목. 11번 왕복. 고수의 배려로 선배는 10번 목표를 채우고, 바람은 시원. 가을인가? 언덕을 오를 때 일부러 팔을 앞 뒤로 크게 흔들어 팔 치기로 올라가는 훈련을 했더니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근육에 통증이 심하다.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하면 역효과가 난다. 과천 동호회 회원은 '10년을 달리니 이제야 어깨에 힘이 빠지네요."라고 말했다. 항상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이 짧은 생에서 무언가 많이 변하고, 엄청나게 이루고,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무리다. 

 

9. 5. 토. 아들하고 술 마시고 훈련에 나가지 못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참고 지내야 한다. 책임을 져야 한다. 예의 없는 인간을 대하는 방법은 아직까지 참는 방법이 유일하다. 이 또한 지나간다고, 모든 상황은 변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남자가 늘 성장하고 아름답게 진화한 것은 바로 '변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스스로가 좋아지면 또 상황은 변하고, 스스로 좋아지지 않으면 상황은 또 변한다. 블로그고 머고 단순하게 살고 이루고 싶은 것들을 이루며 살자. 아직 남자가 말한 모든 것은 유효하다.

 

9. 8. 화. 태풍 하이선(Haishen, 海神)의 뜻은 바다의 신이며 중국이 제출한 이름이다. 어제 밤늦게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오늘 아침엔 쾌청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척 맞아떨어지니 좋았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꼭 좋지만은 않다. 저녁 언덕 훈련을 하는 데 바람이 시원하다. 벌써? 갑자기 짜증이 난다. 습도가 거의 없는 마른바람이 피부를 스치며 지나간다. '훈련하기 좋은 날이 돌아왔네. 너무 좋지 않니?' 명휘 선배가 말했다.

 

아니지, 이건 아니다. 벌써 가을이라니. 아니 벌써 여름이 가다니? 도대체 내 여름은 누가 훔쳐갔지? 연두 빛 잎사귀에서 초록 초록한 날이 가면 검은 초록으로 변할 거라던 여름은? 관문 체육 운동장 400미터 트랙을 80회전 달리고 계곡으로 놀러 가서 막걸리며, 홍어며,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발에 물 담그고 하늘 보며 노는 날은? 해 질 녘에 호젓한 청계산 중턱에 자리 펴고 술 마시고 노래하다가 그것마저 지겨우면 명상하고 새벽에 등산하는 비박은? 서울 대공원 동물원 입구부터 동물원 끝까지 왕복 7km를 미친 듯이 6번 왕복하는 공원사랑 혹서기 마라톤은? 매주 언덕 훈련을 한 계절 하고 나면 여름 언덕 훈련 끝났다며 가을 춘천마라톤, 중앙마라톤 잘해보자며 쫑파티를 전주식당에서 열었던, 러너들에게 힘들기로 악명 높은 금강을 따라 달리는 공주 백제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나면 진짜 바람이 달라졌는데 도대체 영문도 모르고 여름이 지났다는 사실에 남자는 슬펐다. 

 

9. 10. 목. 심신증은 슬픔과 같은 심리적 고통 등이 여러 가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겉으로 보이는 슬픔이나 우울증은 보이지 않아도 심신증 증상이 많이 보이는 사람 역시 미묘하고 잠재의식적인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보인다. 누군가와 이별하는 경우 얼음송곳에 심장을 찔리는 듯한 고통을 겪는 데 이러한 고통은 같은 송곳에 심장이 실제로 찔리는 고통과 같다고 우리의 뇌는 여긴다.

마라톤처럼 아주 먼 거리를 달리다 보면 다리와 근육, 심장이 주는 힘든 고통으로 그만 달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우리 정신이 약해져 포기하고 싶어서 뇌에 명령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결국 포기하고 나서 밀려드는 막심한 후회와 강한 자기 연민의 감정을 보면 뇌는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심리적인 고통을 더 진짜라고 여기는 게 분명하다. 만약에 올바른 판단이고 실제로 무리하는 경우라서 포기했다면 우리는 칭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말이다. 공기는 아주 매끄럽게 피부를 스치며 지나간다. 운동하기에는 최상의 날씨다. 이러려고 그렇게 먼 거리를 뛴 건지. 산산조각 난 세상을 계속 달려야 하는 건지.

 

 9. 12일. 토. 비가 내려 주저하다가 영미 선배가 온다고 해서 달리러 갔다. 우중주가 한 두 번은 좋지만 그다음부터 신발이 젓는 게 싫어서 싫어졌다. 다행히 비는 그쳐서 몇 안 되는 동료들과 언덕 코스를 길게 달렸다. 어제 마신 술이 서늘한 바람과 달리면서 나누는 대화에 날아가 버렸다. 숙고하거나 반추하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는 요즘 들어 달리는 일에 회의를 품기도 한다. 그게 달리는 일 자체에 대한 게 아니라 달리게 된 과정과 달린 이유와 달리면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회복하는 길은 없다.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다. 그냥 달릴 뿐이다. 언제나 한 말 보다 하지 못한 말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그래야 한다. 말은 아껴야 한다. 아주 지독하게 말이다. 남자는 인내하는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을 잘하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9. 14. 화. 오후부터 관문 운동장 폐쇄가 풀렸다고 한다. 그래도 운동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녁 6시 30분부터 언덕 훈련을 시작한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끝까지 루틴을 수행하는 일이 전부다. 루틴! 남자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많은 내적인 요인으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매일 다른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간혹 그런 습관이 사라지더라도 말이다.

 

9. 17. 목. 언덕 훈련. 스스로 정한 11번에 훈련을 끝냈더라. 왜? 다른 사람은 네가 멈추고도 두 번을 더 달렸는데 왜 그러니? 네 기분과 네가 정한 규칙과 네 판단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다. 무조건 합리화하는 게 바로 사람이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거나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이 들면 다른 사람의 기준에 조건 없이 따르는 일이 더 정확할 수 있어. 일단 타협하지는 않잖아. 똑바로 해. 너는 운명의 한 부분, 삶을 이루는 데 있어서 약간 도움이 되는 일부분이라고 생각해.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9. 19. 토요정모. 오랜만에 보금자리에 모여서 관문 운동장까지 달렸다. 오랜만이라는 말로는 지난 시간을 하나도 설명할 수 없다. 마음이 현재에 있게 하라고 한다. 100권의 책을 읽기보다 화를 한 번 덜 내는 일이 오히려 가치 있다. 우리 뜻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운명은 타고나는 거라서 함부로 바꿀 수 없지만, 운명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

 

9. 22. 화. 과천 마라톤 팀과 함께 언덕 훈련을 했다. 성표 선배는 항상 배려하면서 훈련을 훈련답게 이끌어주신다. 나도 지지 않으려고 끝까지 꽁무니를 따라 뛰었다. 과천팀의 은유(은나라 은, 성할 은 殷, 넉넉할 유 裕)라는 분도 나왔다. 멋진 이름인데 잊고 있었다. 세상에 이름이 메타포(metaphor)라니. 가장 힘들게 달리고 나서 한 번 더 달리는 순간, 바로 그때가 실력이 느는 순간이다. 김연아처럼 모든 훈련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한 번 더 연습했다고 한다. 근데 더 이상 바랄 게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열심히 달려서 머 하려고 하는 건지, 아서라 부질없다.

 

우리가 하는 말은 앞으로 살아갈 남은 삶의 유도등이다. 습관이든 버릇이든 말은 결국 언젠가 다다를 자신을 표현하고 만들게 된다. 부정적이고 나약한 말을 계속하면 자신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말이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고, 자신을 규정짓고,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자신이 내뱉는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자신이다.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 나쁜 말, 경멸하는 말이나 부정하는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은 그런 말을 들어도 싼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도 폄훼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말을 듣는 게 당연한 사람이란 뜻이다. 왜 당신이 그런 좋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하는(물론 당신이 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나?

 

당신이 아름다운 말과 긍정적이고 유쾌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한다면 당신은 정확히 똑같은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더불어 당신의 주위에는 좋은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증거다. 무조건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배려하는 말을 해야 하는 이유다.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배려하고 즐기고 사랑해도 된다.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면 그는 너에게 더 큰 모욕을 줄 날을 기다릴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갖고 있는 성품이나 버릇으로 모욕을 받더라도 네가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네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가 너의 진심을 외면하고, 순수한 마음을 더럽히고, 너의 생각에 어둠의 커튼을 쳐 남들이 당신을 어둠으로 보게 만들었다고 하자. 당신이 할 일은 항변하거나 대항해 싸우거나 관계를 끊는 것으로 사건을 정리하려 할 것이다. 가장 빠른 방법이면서 일시적으로 효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네가 대항하는 일은 다시 더 큰 모욕을 상대에게 주는 일이라서 결국엔 다시 되돌려 받게 된다. 관계 맺는 사람의 사소한 농담이나 행동들, 그가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행위들에 대해 반감을 품거나 의도적으로 모욕하지 말아라. 누군가 너를 모욕할지라도 너는 선의로 대해야 한다. 그게 네가 존중할 만한 사람이란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 당신을 모욕했다면 결코 오래 가진 않는다. 관계는 결코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

 

9월 24일. 목. 과천한량 모임이 대공원역 7번 출구 앞에 있는 대공원 포도밭 식당에서 있어, 일찍 나와 언덕 4회 달리기를 하고 철수했다. 오늘 길에 다른 러너가 한 분 두 분 오신다. 모두가 나름대로 지켜가는 과정을 묵묵히 견딜 뿐이라고 생각한다. 

 

9월 26일 토요정모. 맑고 푸른 날이 마냥 계속된다. 이유도 없다. 양재천 물은 맑고 조용히 흘러가고 노랗고 주황인 여름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코스모스가 길 가에 핀다. 억새꽃과 갈대꽃은 영동 1교에서 과천 관문 체육공원까지 달리는 길 내내 피어있다. 억새인지 갈대인지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어디서 봤느냐'다. 냇가나 습지에서 봤다면 갈대, 산이나 뭍에서 봤다면 억새일 가능성이 높다. 갈대는 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 반면, 억새는 건조하고 척박한 곳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양재천 변에는 억새도 많이 보여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있는 곳, 누구랑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정모와 행사가 겹쳐서 술을 꽤 거나하게 드셨다. 말과 태도를 늘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해라.

 

9월 27일 일요일 산행. 아침 6시 명희 선배 만나 의왕 IT밸리 건너편에 주차하고 종호와 지옥훈련을 시작했다. 유람하듯 시간도 오래 걸리는 등산을 생각했는데 이건 아니지. 고개는 걸어 올라가고 내리막이나 평평한 능선에서는 달린다. 과천 매봉을 거쳐  오르기 시작해서 이수봉을 올라 국사봉을 거쳐 하우현 성당 방향으로 하산한다. 정확히 10분씩 두번을 쉬고 4시간 동안 15km 산길을 오르고 달렸다. 전날 15km 달리고 술을 많이 마셔서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다. 달리면서부터는 등반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내려와서 한 참을 걸어서 해장국집에 도착, 차가 있는 IT 밸리까지 와서 커피 마시고 헤어졌다.

 

너무 달렸다. 토요일 술에 잠은 적게 자고 산행까지 피곤해서 저녁 6시부터 뻗어버렸다. 몸을 혹사시키면 정신도 황폐해진단다. 둘은 분리된 게 아니고 하나니까 말이다. 9월은 하루 빠지고 모든 훈련을 참석했다. 달리는 일에 대해 생각중이다. 생각해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하는 거다.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일정한 루틴을 어기거나 빠뜨리지 않고 하는 것, 그곳에 진리가 숨어있다. 용케 발견하는 일은 또 행운이다. 능력이 출중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아주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일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씩은 운이 있는 사람이고 싶다. 지금 보니 꼭 그렇게 살아온 것도 같다. 사실 언젠가 죽는 다는 사실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기에 감사할 일이다. 아직까지는 운이 좋았다.

 

9월 29일. 화요일. 혼자 언덕에 나가서 산행으로 지친 몸을 풀었다. 가볍게 언덕 조깅을 5회 달렸다.

 

9월 30일. 수요일 연휴 첫날 번개 달리기 훈련을 관문체육공원에서 열었다. 오랜만에 트랙을 달리니 기분이 상쾌했다. 이렇게 9월을 보낸다. 무엇보다 슬픈 이유는 달리는 이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14번을 한달에 달리다니 자주, 그리고 많이 달렸다.

 

 

9. 1. 12km. 대공원 언덕 B코스 12번 왕복. 
9. 3. 11km. 대공원 언덕 B코스 11번 왕복.
9. 5. 토요일 대공원 훈련 빠짐.
9. 8. 10km. 대공원 언덕 훈련 10번 왕복 6분 15초/km 
9. 10. 12km. 대공원 언덕훈련 12회 6분 17/km
9. 12. 10km. 대공원 동물병원 언덕 A코스 5회전.
9. 15. 11km 대공원 언덕훈련 11번 왕복. 

9. 17. 11km 대공원 언덕훈련 11번 왕복
9. 19. 13km 관문운동장 왕복, 운동장 1바퀴. 
9. 22. 12km 대공원 언덕 12회전
9. 24. 4km. 대공원 언덕 4회전

9. 26. 15km 관문까지 왕복하고 운동장 1바퀴, 영동 1교에서 낙오자 데리러 2km.
9. 27. 15km 산행.
9. 29. 5km 조깅
9. 30. 13km 번개훈련

 

 

배롱나무 꽃 지고 있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