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나는 순수한 여자가 할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1954년 6월 7일 수학 천재이자 지구의 마지막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할아버지였으며, 동성애자였던 41살의 튜링은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치사량을 정확히 계산한 뒤 시안화칼륨(청산가리)을 사과에 주사합니다. 그 후 그는 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고, 그의 옆에는 한 입 베어 먹다 남겨진 사과 한 개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엔 “사회가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나는 순수한 여자가 할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앨런 튜링 (앨런 매시슨 튜링 Alan Mathison Turing, OBE, FRS, 1912년 6월 23일 ~ 1954년 6월 7일)
191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앨런 튜링이 20세기 전반기에 이룬 업적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적 비밀이었거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이었다. 1935년 20대 초반의 나이에 케임브리지대 펠로 연구원이 된 튜링은 이듬해 발표한 논문에서 현대 컴퓨터의 기원이 되는 '튜링 기계'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당시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전문가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암호인 에니그마를 깨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이 과정에서 '튜링 기계'를 모델로 하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콜로서스가 개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쟁 중의 모든 활동은 30여 년간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가장 유명한 튜링의 업적이라면 인공지능의 개념과 구현할 방법을 확립한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1950)이 손꼽힌다. 이 논문에서 그는 튜링 테스트와 머신 러닝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안하였고, 후대 컴퓨터 공학은 이를 토대로 오늘날 인공지능의 상당한 현실화에 이르렀다. 튜링은 이 논문에서 20세기 말이면 인공지능이라는 생각이 보편성을 얻으리라고 내다보았다.
1954년 6월 7일 튜링은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망했다. 자살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성소수자 정체성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사법적 처벌을 받던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의 아버지이자 전쟁 영웅으로서 광범위하고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 튜링은 그의 어깨 위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탄 거인이었다." 2009년 영국 정부의 공식사과와 2013년 여왕의 특별 사면 조치, 2019년 7월 영국 중앙은행은 2020년부터 50파운드 신권 지폐의 인물이 앨런 튜링임을 알리며 이같이 발표했다. 과학적 발견이 확대되면서 튜링의 업적은 계속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데, 일례로 그의 생물학 연구인 형태 발생 이론은 2000년대 들어 하나 둘 입증되고 있다. 거인의 어깨는 더 넓어질 것이다.
앨런 튜링, 지능에 관하여
앨런 튜링 (지은이),노승영 (옮긴이), 곽재식 (해제)에이치비프레스
"생각의 전체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신비롭지만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컴퓨터들은 1936년 당시, 20대 초반 앨런 튜링이 떠올린 그 범용 튜링 기계를 모방해 만든 단순하고 간단한 기계인 셈이다. 다만 그 처리 용량이 무척 크고 그 속도가 대단히 빠를 뿐이다. p.12
나는 '기계가 지능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탐구를 제안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 물음을 논증하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치부하는데, '기계처럼 행동한다', '순전히 기계적인 행동' 같은 상투적 문구가 이런 통념을 잘 보여준다. p.25
지능 기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또한 인간 모형을 최대한 흉내 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정교한 작업을 해내거나 (개입의 형태를 띤) 명령에 똑바로 반응하는 능력이 거의 없는 기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다음 알맞은 개입을 구사하고 교육을 모방함으로써 일정한 명령에 대해 일정한 반응을 어김없이 나타낼 수 있을 때까지 기계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교육 과정의 시작일 것이다. p.46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러려면 우선 '기계'와 '생각하다'의 의미를 정의해야 한다. 두 단어의 일반적 용법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방식은 위험하다. '기계'와 '생각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일반적 용법에서 찾으려 든다면,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의미와 답은 갤럽 여론 조사 같은 통계 조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결론이다. 나는 그런 정의를 만들어 내려 들기보다는 원래 질문을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더 명확한 다른 형식으로 바꾸고자 한다. p.67
순전히 지적인 분야에서는 언젠가 기계가 인간과 경쟁할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일까? 이것을 결정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체스 같은 매우 추상적인 활동에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자금이 허락하는 한 가장 좋은 감각 기관을 기계에 달아주고서 영어 듣고 말하기를 가르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아동을 가르칠 때와 같을 것이다. p.110
우리는 바로 앞만 내다볼 수 있을 뿐이지만, 그동안에도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p.111
역자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라고 생각한다. 번역가 노승영의 홈페이지에서 그동안 작업한 책들에 대한 정보와 정오표를 볼 수 있다.
역자후기: 인간의 뇌 또한 일종의 컴퓨터가 아닐까?
"때로는 과학책 번역가로 행세한다"는 노승영 번역가는, 사실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했고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개발한 적이 있는 매우 과학적인 번역가다. 이 책의 수록 논문을 선정하고 과학자이자 언어학자의 자세로 명확한 한국어 번역으로 바꿔 놓은 노승영은 다음과 같은 옮긴이의 글을 썼다. 이 책을 위한 적절하고 우아한 마무리이기도 하다.
튜링은 인공지능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계산 가능한 수](1936)를 발표하여 컴퓨터의 이론적 기반을 놓은 뒤에 컴퓨터가 인간의 뇌를 흉내 내는, 즉 지능을 가지는 문제에 천착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읽으면서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튜링의 논문에는 기계 학습, 신경망, 유전 알고리즘 등 인공지능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이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전에 심도 깊게 논의되고 있었다(1956년 다트머스 회의에서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튜링은 '기계 지능'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것은 인공지능과 정확히 같은 의미다.
[지능을 가진 기계](1948)는 연결주의 관점에서 신경망을 구현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며 최초의 인공지능 선언문이라고 할 만한 글이다. [계산 기계와 지능](1950)은 튜링 검사를 자세하게 설명한 글로 유명하며 철학적·논리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지능을 가진 기계라는 이단적 이론](1951)은 맨체스터에서 행한 강연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을 내놓는다. 당시에는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치부되었겠지만 인공지능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실감하고 있는 지금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디지털 컴퓨터가 생각할 수 있을까?](1951)는 BBC 라디오에서 강연한 원고로,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체스](1953)는 컴퓨터가 체스를 둘 수 있는 알고리즘을 제안하고 있는데, 튜링은 자신의 알고리즘을 실제로 구현할 방법이 없어서 오로지 머리와 손으로 모든 규칙을 구상하고 정리했다.
튜링은 기계의 지능을 이해하면 인간의 지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지능을 완벽하게 흉내 내는 기계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뇌 또한 일종의 컴퓨터가 아닐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도난당한 유품, 36년 만에 발견
영국 정보부가 동성애자란 이유로 탄압받았던 수학자 앨런 튜링에게 공식 사과하다
'개발자의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어공부 (0) | 2020.10.05 |
---|---|
걷는 일이 매력적이라는 사실. 걷는 사람, 하정우 (0) | 2020.09.29 |
긴즈버그의 말 (0) | 2020.09.21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22장 (0) | 2020.09.09 |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인 경험을 유발한다. (0) | 2020.09.01 |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박상형 에세이 (0) | 2020.08.18 |
죽을 때까지 치매 없이 사는 법 (0) | 2020.08.14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글 그림 - 김수현 (0) | 2020.08.06 |
더욱 좋은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