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걷는 일이 매력적이라는 사실. 걷는 사람, 하정우

지구빵집 2020. 9. 29.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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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일이 걷는 일이라면 걸어야 한다.  

 

달리기가 독특하고 비범한 육체적 움직이듯이 걷기도 마찬가지다. 하정우는 할 수 있는 일이 걷기밖에 없었던 시절부터 걸었다. 역시 걷는 일은 아무리 바빠도 그를 유지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떻든, 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걷는 사람 하정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뜸 "시간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지."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열심히 일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시간이 나면 매일 3만 보를 걷고 가끔 10만 보씩 걸을까? 진짜 늘 운동하고 습관처럼 자신을 돌보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말 시간을 내서 하는 일과 시간이 나서 하는 일은 다르다. 오히려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걷지 않는다. 

 

핏빗(헬쓰 스마트 워치)을 사고 나도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대공원 호수 둘레 4.26km를 53분에 5,590걸음을 걸었다. 3만 보면 대충 따져도 5시간을 걸어야 한다. 정확히 50분 걷고 10분 쉬는 방식을 적용해도 아마 시간은 걷는 빠르기와 보폭이 달라지니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한 시간을 걸어보니 "나는 언제나 3만 보를 걷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같은 경우 등산을 4시간 힘들게 했으니 3만 보는 충분히 걸었을 것이다. 걷는 일은 생각하는 일과 밀접하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기도 한다. 달리기와 무엇이 어떻게 다르고 운동은 어떤 면에서 동일한지 알아보고 싶다.

 

배우로, 영화감독과 제작자, 더군다나 화가라는 하정우는 천리길을 걷고, 걷기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와이에 가서도 유럽에 여행을 가서도 걷는 일이 전부인 사람이다. 늘 생활 속에서 걷는 사람,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을 더 집중하며 그다음 걷는 과정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삶은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지막엔 아무것도 없지만 걷는 일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이유가 없는 법이다. 그가 걷는 일이 전부라면 나에게는 달리는 일이 전부다. 같은 이유로, 같은 의지로 걷고 달리며 결국 같은 것을 얻는다.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p.67

 

나의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

 

나는 남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유머는 삶에서 그냥 공기처럼 저절로 흘러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부족하면 이런 유머가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일상에서 유머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촬영 현장에서도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웃기는 일을 좋아한다. 남을 웃기면서 나도 웃는다. 내 유머가 사람들을 웃게 할 때, 나는 내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된다.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 ‘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책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안다고 믿었던 서로의 마음속을 더 깊이 채굴하는 것과도 같았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쩐지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서로의 일과 삶에 대한 응원의 마음이 차올랐다. p.206

 

나는 일할 때 막연한 느낌이나 주관에 치우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계속 점검한다. 누군가와 생각이 다를 때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나의 기분이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

오디션은 삼 분 안에 결정되는 잔혹한 경쟁이지만, 보석은 그 짧은 시간에도 스스로 빛을 발한다고 믿었다. 내 몸에 기운과 에너지를 늘 충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밤이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강을 따라 걸으면서 하루 일과를 정리했다. 그때 평균적으로 하루에 여섯 시간씩은 걸어 다녔던 것 같다. 걸으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배우란 분명 선택받는 직업이지만, 그 선택받을 수 있는 무대까지 걸어가는 것은 내 두 다리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2015년 내가 주연과 감독을 맡은 [허삼관]이 개봉했을 때, 나는 한창 [암살]의 주요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허삼관]은 기이할 정도로 관객이 들지 않고 있었다. 부랴부랴 이유를 찾다가, 나 자신을 질책하다가, 눈떠보면 [암살] 촬영 시간이 닥쳐와 있었다. 촬영장에 가는 것조차 너무나 힘이 들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분명 나를 위로하려 할 테니까. 어떤 사람은 별일 아닌 척 담담하게 나를 토닥일 테고, 또 누군가는 까맣게 타는 내 속마음을 눈치채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조심스러워할 것이다. 그 모두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나는 더 불편했다.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털어놓아야 하는 건지, 사람들의 위로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촬영장에서 유쾌하게 농담을 건네고 사람들을 웃기던 하정우는 사라져 버리고,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어둡고 우울한 남자만 거기 남아 있었다. 아침에 촬영장으로 향하는 출근길, 나는 한 시간씩 기도했다. 제발 내가 맡은 연기만은 무사히 소화하게 해 달라고. 「왜 자꾸만 나를 잃어버리지?」 p.35-36

 

사실 배우로서든 감독으로서든 새 영화를 시작할 때 나는 늘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나를 주저앉히거나 새로운 시도를 아예 못하도록 막지는 않는다. 또한 성공과 실패란 단순히 흥행의 그래프만으로는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허삼관]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나의 실패작’은 아니다. 내가 [허삼관]을 연출하면서 받은 선물들은 물질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누군가 내게 “하정우 씨, 배우만 하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예전에는 상처 받았지만, 앞으로는 상처 받지 않으려 한다. 그건 내가 배우로서는 대중들에게 꽤 친숙하고 그럭저럭 잘해왔다는 뜻 아닌가. 감독 하정우는 배우 하정우에게 빚졌지만, 언젠가는 감독 하정우가 배우 하정우에게 그 빚을 갚을 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배우 하정우는 지금까지 많은 행운과 사랑을 누렸고 순탄한 길을 걸어온 편이지만, 스무 살에 연극무대에 오른 이후 서른 무렵 10년 만에 간신히 빛을 본 사람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영화감독 하정우는 이제 데뷔한 지 고작 몇 년밖에 안 된 신출내기다. 감독으로서의 성공과 실패를 운운하기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왜 사랑받지 못했을까? p.229-231쪽 

 

[신과 함께? 죄와 벌]은 알고 보니 김용화 감독이 실제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극에 담은 것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신과 함께] 1편을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진혼곡’이라 표현했다. 언뜻 일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수적인 요인처럼 보이지만, 내겐 그것이 이 영화를 선택하는 무엇보다 확실하고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나는 이 영화가 잘될 수 있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때로 이 확실한 예감은 영화에 관계된 누군가의 ‘절실함’에서 나온다. 나는 그의 절실함에 공감했고, 그의 동행이 되어주고 싶었다. 내게는 ‘어떻게 시나리오를 고르는가?’라는 질문보다 ‘어떤 사람들과 일하길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이 더 맞는 것 같다. 배우가 받아보는 단계에서 사실 완벽하게 짜인 시나리오는 거의 없다. 시나리오는 언제나 배우와 스태프가 모두 구성된 후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하며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한 절반 정도는 바꿀 생각을 하고 들어가는 거다. 나는 현재 시나리오의 반을 더 낫게 바꾸어나갈 열린 생각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 나와 절실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하길 좋아한다. _「내가 동행을 선택하는 법」, p.239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 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걷는 자를 위한 기도, p.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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