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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서재

언젠가는 모든 것을 쓸 것이다.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 말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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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지 않는 것들> 《교실의 시》 ... 언젠가는 모든 것을 쓸 것이다.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 말이 너무 많다.

 

인간의 성장이란 참 이상하다. 그저 사랑받고 싶고, 기쁘고 싶고, 즐겁고 싶을 뿐이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호르몬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점점 심각하고 우울하고 우스꽝스러운 인간이 되어버린다. 중학생 시절이란 그렇게 갑자기 성장하게 되어버린 웃기고 슬픈 나날들이다. (불행하게도) 두뇌가 발달해버리는 바람에, 내가 ‘나’라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가는 그 시절, 내가 ‘나’라서 자꾸 겪게 되는 그 무수한 시행착오들.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누구든 당장 땅속 깊숙이 머리를 박고 싶어지리라. _황인찬, 「교실 미수」14~15쪽.

 

어른은 그저 나이를 먹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른의 얼굴은 나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의 얼굴은 상상해보게 한다. 그의 삶을. 그의 삶을 토대로 한 나의 삶을. 우리의 과거를. 우리가 한 교실에 있었더라면. 우리가 함께 죽음을 넘었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 어른은 타인의 얼굴에서 시간을, 시간에 힘입어온 기쁨과 슬픔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_김현, 「누군가 창문에 입김을 불어 쓴 글씨」70쪽.

 

제일 좋아하는 것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예고편. 예고편이 너무 좋아서 영화는 보지 않았다. 나중에 극장에 걸리면 보려고 참았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이 너랑 같은 헤드폰 쓰고 있어. 불법 다운로드로 미리 본 친구가 알려줬다. 나는 극장에서 볼 거야. 그런 시를 쓸 거야. 그런 시? 릴리 슈슈 같은 시. 넌 보지도 않았잖아. 들판에 고등학생이 서서 음악 듣는 시를 쓸 거야. (…) 계속 쓸 거야. 들판에서 음악 듣는 고딩 얘기를. 서울에서 창원까지 걸어가다 본 도로들을, 지각하고 언덕 밑에서 만난 골목을, 평생 그런 것들만 묘사하다 죽을 거야. 의미 있는 것들. 무슨 의미인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들. 담을 타고 몰래 들어간 한밤중의 초등학교 운동장, 거기 누워서 생각한 것들. 무슨 생각을 했더라. 나도 모르지. 기억나지 않는 생각들. 사실은 하지도 않은 생각들. 내가 이런 걸 봤다고 아무리 자랑해도, 잘난 척이 아닌 것들. 누구의 부러움도 사지 않고, 누구의 판단도 사지 않고,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구나. __김승일, 「내가 쓰지 않는 것들」132~133쪽.

 

나는 다 큰 사람이 되었는데도 나를 의탁할 수 있는 ‘어른’을 간절히 원했다. 서른이라니, 갑자기 노숙한 느낌이 들어 착잡하면서도 어려운 기로에 설 때면 누가 길을 알려주고 힌트를 던져주기를 바랐다. 다만 바깥에서 들어오는 조언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있었을 따름이다. 바깥으로 열린 귀는 늘 지나치게 얇거나 두껍다. 말은 귓바퀴에서 겉돌거나 한쪽 귀로 들어와 한쪽 귀로 빠져나간다. 바깥이 아닌 바깥, 타자가 아닌 타자, 내가 아닌 내가 어딘가에 있다면. 있을 수 있다면. 그 생각이 허파에 산소를 꽉 채웠다. 청소년기를 돌아보려고 궁리한 설정이었지만, 사실 도플갱어에 대한 판타지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향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15년 후의 시선이 현재의 나를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기를. 동시에 현재의 내가 15년 후의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_신해욱, 「도플갱어의 도플갱어」188쪽.

 

소녀는 자라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 30년이 흘렀고 자연히 내게서 그 소녀의 얼굴이 사라지고 더불어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하고 바뀌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영혼은 나를 떠나지 못했다. 내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와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아이들을 나는 느낄 수 있다. 느끼고 싶지 않지만 느낌이란 것도 참아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 아이들이 스스로를 밀어 떨어뜨리는 절벽 옆에 나는 얼마나 바보처럼 서 있느냐. 이따금 파수꾼의 긴장이 참을 수 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_김행숙, 「내 이름은 빨강」198~199쪽.

 

한때 아이였거나 계속 아이인 사람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수인으로, 약자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존재로 살아간다. 집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학교를 갔다 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책의 시인들처럼 혼자 연기하는 골목이나 죽어라 담배를 피울 옥상이나 돌로 쳐 죽일 두꺼비나 챙겨오지 않은 체육복이나 사투리를 쓰지 않고도 말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견디면서 지금-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기적이거나 악몽이다. 물론 지금-여기의 악몽은 그때의 악몽과 다르지 않기에, 대신에 그때의 악몽 속 자신을 바라보는 지금-여기의 자신의 무력함, 한낱 시인밖에 못 된 자신의 취약함과 맞닥뜨리지만, 시라는 겨우 덮을 만한 방법, 부끄러움이나 자의식이나 위장이나 거짓말 같은 말을 획득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상처를 안 보이게 하고 부끄러움을 안 들키는 방법은 배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 ‘뒤’는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 시가, 가난한 말이, 나아가는 대신에 돌아가는 말이 따라간다. _양효실, 「그때-거기라는 지금-여기, 아니 지금-여기라는 그때-거기」210~211쪽  

 

 

 

<내가 쓰지 않는 것들> 《교실의 시》 ... 언젠가는 모든 것을 쓸 것이다.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 말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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