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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 모셔온 이야기, 피가 끓었던 시절

지구빵집 2022. 5. 1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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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21살 나이로 새파랗게 젊을 때,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데 대학생과 빈민, 농민에게만 시대가 암울할 때 거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친 운동이 지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자는 여자 앞에서 지나온 삶이 별로 거지 같아서 가끔 맥 빠진 소리로 가슴 바닥에 잔뜩 분노와 후회를 깔고 말한다.

 

"치열하면 무엇해? 치열하게 살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어."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용케 살아남아 그 시절을 건너왔잖아." 여자가 말했다.

 

"모르겠어. 잘 한 건지.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아마 다른 길을 걸었을 거야. 모두 다 다른 길을..." 남자가 말했다.

 

"억울하구나. 서러운 것, 분노나 증오, 억울한 것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건데, 그래도 받아들여, 네 삶이야, 온전히 네 책임이라고. 너나 나나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가 않아. 분노를 자꾸 키우는 거 같아." 여자가 말했다.

 

보통은 80년대를 거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는 사람이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기억에서 지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약을 하자면 이 남자가 운동을 안 했다면 대단한 자리에서 아주 영향력 있는 사람이 돼있을 거라고 말하곤 한다. 운동하는 시절이 지나고 남자는 한 번도 다시 이념이니 신념이니 민주화니 시대니 하는 말이 난무하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일에 전념을 하고 학원강사나 책을 쓰는 사람, 혹은 정치인으로 성장한 사람이 많았다. 삶은 어떤 곳에서든 물처럼 흐르는 속성이 있어서 변절이니 배신이니 하는 말들은 폭력적이고 그런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라고 자백하는 것과 같다. 

 

 

87년 10월에 학교 대동제, 지금 말하자면 축제 기간에 백기완 선생님 강연회를 기획하고 섭외를 끝냈다. 학생회에서는 홍부 부장이 진행하기로 하고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6.29 선언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았았고 대통령 선거가 12월에 있었고,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출마가 확실시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내일 연설회가 열리는 날이라서 선생님을 모셔오는 일은 힘들게 보였다. 이미 서울로 출발해 아침에 선생님을 모셔오기로 한 홍보부장과 연락도 취하지 않고 밤에 별동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사자 홍부 부장이 축산과 학생들 중에서 힘을 쓰는 대원들을 몽둥이로 6명을 추리고, 나와 부회장 정도로 새벽 12시에 출발을 하기로 했다.

 

당시 선생님은 은평구 진관외동 기자촌이라는 곳에 살았다. 은평구는 근대 문학의 요람이라 할 만큼 정지용 선생을 비롯한 이호철, 최인훈 선생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정치인이자 작가이기도 한 백기완 선생도 기자촌에 거주하고 계셨다. 기자촌은 특히 세계사적 유래가 없는 언론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마을이다. 또 통일 한국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상징성과 함께 동아시아의 문학 중심지로서 분단문학의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이데올로기로 나누어진 남과 북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지역이다. 은평구 뉴타운 사업을 진행하면서 기자촌이라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마을은 사라졌다.

 

비장한 각오로 대원들이 올라탄 봉고차는 서울로 내달렸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설 때 누군가 깨운다.

 

"다 왔어!"

 

단잠을 깨우는데 여기가 어둡다. 새벽 3시에 도착해서 좁은 골목길, 기와집이 연달아 있고, 휴지조각이 나뒹굴고, 가로등이 하나 켜 있는 집 대문으로 비밀스럽게 들어갔다. 물론 몽둥이로 무장한 학생들은 가만히 차 안에 대기했다.

 

선생님을 만나서 이미 학교 학생으로부터 내일 아침 모시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가택 연금 상태인 선생님이 내일 아침 학교에 오시는 게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서 모시러 왔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옷을 갈아입고 함께 길을 나선다. 집 앞에 바로 옆에 가로등이 환하고, 새벽 3시라 고요하다. 집안에 머문 시간은 30분 남짓인데 봉고차에 선생님을 태우러 돌아왔다. 차 문을 여니 경비 복장을 하는 연세가 지긋한 아저씨와 야구 방망이를 든 학생들이 함께 앉아 있다. 동네 경비 아저씨가 동네 순찰을 돌다 학생들을 만났는데 혹시 경비 아저씨가 경찰에 신고할까 봐 차에 억류해두었다고 한다. 나쁜 짓은 가리지 않고 하는 게 우리 특기다. 나중에 한남동 경부선 톨게이트 진입 전에 공손히 사과하고 경비 아저씨를 내려주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죄송한 마음이다. 

 

무사히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로 들어와 총학생회 사무실에 모였다. 대동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선생님은 시국 연설을 하셨다. 서울로 올라간 홍보부장은 전화를 하더니 노발 대발이다. 집에 갔더니 안 계시고 누군가 새벽에 모시고 갔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무사히 행사를 치렀지만 결국 대통령 선거는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역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모두를 뒤로하고 흐르고 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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