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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 천하대전 한신의 일생.

지구빵집 2022. 6. 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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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의 일생 ] 

 

한신(韓信: ?~BC196)은 진말(秦末) 한초(漢初)의 뛰어난 장수이자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설하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한초삼걸(漢初三杰: 소하, 장량, 한신 세 사람을 일컬음)"의 한 사람이다. 그는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공부하면서 병법을 익혔다. 한신은 얼마나 집이 가난하였든지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이웃집에 가서 찬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회수(淮水)에서 낚시질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가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한 노파가 한신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그에게 밥을 갖다 주었다. 마침 오랫동안 배를 곯았던 한신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으며 노파의 은혜에 감격하여, "내 반드시 후한 대가로 은혜에 보답하겠소."라고 하였다. 한신의 말을 들은 노파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대장부가 스스로 벌어먹지 못하니 왕손(王孫)을 가엾게 여겨 밥을 드렸을 뿐인데, 내가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후에 한신이 유방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고 초왕(楚王)에 봉해졌을 때, 그는 불현 듯 옛날 자기에게 밥을 주었던 그 노파가 생각나서 그녀에게 술과 안주를 보낸 다음 다시 황금 1천 냥으로 보답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일반천금(一飯千金: 조그마한 은혜에 후하게 보답하다는 뜻)"의 고사이다.

 

여하튼 한신은 어린시절에 너무도 빈천하여 늘 주변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한 번은 또 불량배들이 모여서 한신에게 치욕을 안겨주려고 하였다. 어떤 백정이 한신에게 말했다.

 

"네 놈이 비록 몸집은 크다지만 칼을 차고 다니기 좋아는 걸 보니 간이 매우 작은 놈이로구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그 칼로 나를 찔러봐라. 그러나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

 

한신은 그 백정을 한참 노려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치욕을 참으면서 그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이 그를 겁쟁이라고 조롱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신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의 고사이다.

 

BC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을 거점으로 중국 최초의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이때 한신은 항량(項梁)과 항우(項羽)가 이끄는 서초군(西楚軍)에 가담하였다. 항량이 전사한 후 항우가 그 뒤를 이었지만 한신은 그에게 중용되지 못하고 낭중(郞中)이라는 낮은 직책의 이름 없는 병사에 불과했다. 그는 항우에게 여러 차례 전략을 건의하였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초나라 진영을 떠나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로 투신하였다. 그러나 유방에게서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평범한 병사 생활을 하던 한신은 어느 날 군법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은 13명의 동료들이 모두 처형되고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머리를 들고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婴)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한왕(漢王)은 천하를 차지할 생각이 없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유능한 장수들을 다 죽이려 합니까?"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긴 하후영은 그를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 판단하고 그를 석방한 후 유방에게 천거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여전히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치속도위(治粟都尉)라는 낮은 관직에 임명하여 창고관리를 맡겼다.

 

이때 한신은 승상 소하(蕭何)를 알게 되어 그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하는 한신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여러 차례 유방에게 천거하였지만, 유방은 여전히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한신은 더 이상 유방에게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방의 진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유방의 군대가 남정(南鄭)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도망가는 병사들이 늘어나자 한신도 그들과 함께 도주해 버렸다. 한신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소하는 밤새 말을 타고 쫓아가서 그를 설득하여 다시 데리고 돌아왔다. 그 후 소하는 다시 유방에게 한신을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뛰어난 인재라고 하면서 천거하였다. 그리고는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신은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는 뛰어난 장수입니다. 만약 왕께서 그저 한중(漢中)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그가 없어도 되겠지만, 만약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한신과 같은 사람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듣고 설득된 유방은 길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내고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직접 한신에게 천하 쟁패의 대계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한신은 초한전의 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다음, 항우와 다른 제후국들을 격파하여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유방은 크게 기뻐하면서 한신의 재능을 늦게 알아본 것을 후회하였다. 마침내 유방은 한신의 계획에 따라 휘하의 장수들에게 동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후 항우와 유방의 패권 다툼에 있어서 먼저 진(秦) 나라의 수도 함양을 차지하는 사람이 관중(關中)의 왕이 된다는 약속이 있었는데, 그 함양을 유방이 항우보다 먼저 한 발 앞서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에 입성한 항우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진나라의 아방궁을 불사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후 항우는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에 오르고, 유방에게는 원래의 약속을 어기고 파(巴)와 촉(蜀)·한중(漢中)을 제공하여 한왕(漢王)에 임명한 뒤에 남정(南鄭)에 도읍을 정하도록 하였다. 군사적으로 항우에 비해 훨씬 열세였던 유방은 어쩔 수 없이 파·촉 지역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때 유방은 수도 남정(南鄭)으로 가면서 그들이 지나온 '잔도(棧道)'를 끊어, 항우를 반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보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한(漢) 고조(高祖) 원년(BC 206) 가을, 한신은 유방이 한중(漢中)에 들어올 때 불질렀던 잔도(棧道)를 복구하여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도록 속인 다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몰래 남정(南鄭)의 옛길을 따라 진창(陳倉)으로 진격하여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일거에 관중(關中)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유방은 삼진(三秦)을 평정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 겉으로는 잔도를 만드는체 하면서, 몰래 진창으로 들어가 기습하다)"의 고사이다.

 

한 고조 2년(BC 205) 2월, 한신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으로 진격하여 낙양(洛陽)을 위협하자 원래 항우에게 소속되었던 한왕(韓王) 정창(鄭昌)과 은왕(殷王) 사마공(司馬邛) 등이 차례로 투항하였다. 그후 다시 제(齊)·조(趙)와 연합하여 초(楚)를 공격, 4월에 대군이 이미 초나라 수도 팽성(彭城)에 도달하였으나 항우에게 패하였다. 한신은 패잔병들을 모아서 형양(滎陽)에서 유방과 합류하여 다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초한 사이에는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유방군이 그전에 한번 패하였을 때 제나라와 조나라 등이 다시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연합하여 유방군의 형세가 매우 불리해졌다.

 

이렇게 불리해진 형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해 8월에 유방은 한신을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고 위(魏)·조(趙)·제(齊) 등을 치게 했다.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항우의 배후를 습격, 전장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위·조·제를 차례로 격파한 후 유방을 보좌하여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건설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신은 먼저 날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황하를 도하하여 위나라를 평정하고 위왕(魏王)을 사로잡았다. 형양의 전선이 급박해지자 유방은 다시 한신에게 있던 정예병들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때 한신은 적은 병력만으로 장이(張耳)와 연합하여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20만 대군을 자랑하는 막강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전력상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한신은 오히려 배수진을 쳐서 물러서지 않고 진격하여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얼마 후 한신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나라를 쳤다. 평원진(平原津) 어구에 이르러 유방이 이미 제나라의 투항을 받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전진을 멈췄다. 이때 한신의 참모 괴통(蒯通)이 그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이미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 접경까지 왔는데 어찌하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한신은 마침내 황하를 건너 일거에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제나라의 도읍 임치(臨淄)까지 내달았다. 깜짝 놀란 제나라 왕 전광(田光)은 도성을 버리고 고밀(高密)로 달려가서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초나라에서는 20만 대군을 파견하여 제나라를 지원했다. 이에 제·초 연합군과 한신의 군대가 고밀 경내의 유수 일대에서 대치하였다. 한신은 먼저 밤에 군사들을 보내어 유수 상류에 둑을 쌓아둔 다음,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제·초 연합군과 교전을 벌였다. 서로 싸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신이 일부러 패한 척하고 후퇴하자 제·초 연합군은 한신을 추격해왔다. 연합군이 강의 절반 쯤 추격해 왔을 때 한신이 상류에 막아두었던 둑을 터뜨리자 연합군은 거의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한신은 다시 군대를 돌려 연합군을 대파하고 제왕 전광을 사로잡고 제나라를 평정하였다.

 

BC 202년 유방이 휘하의 군대를 모두 이끌고 해하(垓下)에서 항우와 접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유방은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십면(十面)에 매복을 설치하고(유명한 비파음악 <십면매복(十面埋伏)>은 바로 이 고사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초나라 군대를 겹겹이 에워싼 다음,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초나라 군사들은 그 노랫소리를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산산이 흩어져 도망갔다. 그후 항우는 오강(烏江)까지 탈출하였다가 결국 자살하였으며, 이로써 유방은 4년간에 걸친 초한전을 승리로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공로를 세운 뒤에 말로가 순탄치 못했다. 한(漢) 고조(高祖) 11년(BC 196) 여태후(呂太后)와 소하(蕭何)의 계략으로 한신은 장락궁(長樂宮) 종실(鍾室)에서 피살되었다. 한신은 왜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역사학계에서는 한신이 죽게된 배경에 대해 그 설이 분분하다.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설은 한신이 반란을 꾀하여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한 고조 5년(BC 202), 제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자신의 공로를 믿고 유방에게 편지를 보내어 제왕(齊王)에 책봉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당시에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초나라 군에 포위를 당해 있었던 터이라 한신이 하루 빨리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서 지원해 주기를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다리던 한신의 지원군은 오지 않고 이러한 편지만 날아오자, 유방은 이 기회에 권력을 쟁취하려는 한신의 속셈을 알고 대단히 진노하였다.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한나라 군의 형세가 불리한 상태에서 당시로서는 왕위에 오르겠다는 한신을 제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그를 왕에 책봉하여 군심을 수습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유방에게 한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유방은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신을 제왕(齊王)에 책봉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에 유방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후 초한전이 끝나자 유방은 한신의 병권을 박탈하고 그를 다시 남쪽 변방의 초왕(楚王)에 봉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한신의 참모 괴통(蒯通)은 한신에게 자립하여 왕이 될 것을 권하면서 유방의 명령을 계속 듣다가는 언젠가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차마 유방을 배반할 수 없었던데다, 또 자신의 공로가 워낙 크기 때문에 유방이 자기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유방은 한신을 초왕에 봉한 뒤에도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방은 항우의 옛 부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과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다가 항우가 죽은 후에 한신에게 귀순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유방은 그를 체포하여 법대로 처리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때 한신은 초왕에 갓 부임하여 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유방의 의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한 고조 6년(BC 201)에는 또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한신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밀고하였다. 이로써 유방은 한신을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마침내 유방은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초나라의 운몽(雲夢)에 순행을 간다는 것을 구실로 한신을 사로잡고자 하였다. 유방은 일단 제후들에게 초나라 서쪽 경계의 진(陳)에서 회동하자는 통보를 하였다. 한신은 그 소식을 듣고 유방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니 자기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고, 유방을 만나자니 체포될 것이 두렵고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한신은 부하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12월에 유방이 진(陳)에 도착하였을 때 종리매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을 알현하러 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유방은 여전히 그를 체포해 버렸다. 유방은 낙양(洛陽)으로 돌아온 후 한신의 모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였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자 그를 다시 석방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여 장안(長安)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한신은 항상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밤낮으로 유방을 원망하면서 불만에 찬 나날을 보냈다.

 

그후 한신은 막강한 대군을 보유한 변방의 장수 진희(陳稀)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BC 196년 진희가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출전하지 않고 계획대로 내부에서 진희의 반란에 호응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가신들과 모의하여 밤에 병력을 동원하여 여태후와 태자를 습격하기로 하였으나 그만 여태후에게 비밀이 누설되고 말았다. 여태후는 소하와 긴밀히 의논하여 진희의 반란이 진압되었으니 모든 신하들에게 입궐하여 축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소식을 들은 한신은 의아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입궐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장락궁(長樂宮)에 들어서자마자 즉시 체포되어 종실(鍾室)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한신은 다시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통의 계책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아녀자의 속임수에 걸려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운명이란 말인가!"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과 ≪한서(漢書)≫「한팽영로오전(韓彭英盧吳傳」에서는 한신을 일러 개인의 득실을 따져서 분열을 조성하고 반란을 도모한 음모가이며, 그의 죽음은 반란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신 (회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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