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장편소설

지구빵집 2023. 4. 2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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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문장.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하는 경하는 ) 5월의 광주에 대한 소설을 썼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p.23 생각했던 그는 정작 소설을 끝내고도 한참 그 소설에서 놓이지 못하고 있다. 경하에겐 만주와 베트남 등에서 역사를 통과한 여성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남겨온 친구 인선이 있다. 고향인 제주 중산간에서 목수가 된 인선이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부상을 입고 자신을 찾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경하는 병원으로 찾아가 오랜만에 인선을 만나게 된다.

 

인선은 제주 집에 있는 앵무새 아마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한 쌍의 앵무새를 키웠는데 아미는 몇 달 전에 죽었다.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제주의 눈보라를 무릅쓰고 1948년의 제주,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거족 이야기,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락도 설명도 없이 놓인 풍경에 닿는다. 

 

제주 인선의 집을 눈보라와 어둠 속에서 찾아갔는데 이미 죽은 아마를 묻어준다. 그곳에서 인선의 작업을 하나씩 보게 된다. 제주 4.3의 기록, 이모와 엄마 남매들의 죽음, 정치에 희생당한 가족들과 다른 섬사람의 명예를 되살리기 위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록을 들춰낸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구성도 역시 영혼과 환각, 원인과 결과를 넘나드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좀 어렵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자살을 꿈꾸다가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가고, 한 마리 앵무새를 살리려 눈보라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집을 찾아간다. 갑자기 나타난 목공방의 인선을 만나 제주의 산으로, 파도치는 바다로, 인선이 작업하고 있던 검은 나무들을 찾아간다.

 

다음 소설은 사랑에 대해 쓴다고 했는데 이 소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보스턴 마라톤 참가를 위해 이 책과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을 가져갔는데 '작별하지 않는다'만 다 읽고 왔다. 호텔에서도 혼자 있으며, 차 타고 이동할 때에도, 13시간 비행 중에 처음 한두 시간 내리기 전 한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활자들과 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잘 간다.  

 

 

 

P. 15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P. 17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P. 23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P. 44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P. 44~45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P. 55

이상하지, 눈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인선이 말했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P. 57

총에 맞고, / 몽둥이에 맞고, /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 얼마나 아팠을까? /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P. 82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P. 87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P. 105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 109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P. 109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전까지 내가 닿아보았던 어떤 생명체도 그들만큼 가볍지 않았다.

 

P. 134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P. 135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

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P. 137~138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P. 186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P. 186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P. 197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인선의 목소리가 그 열기 사이로 번졌다.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P. 237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P. 291

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P. 311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 323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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