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제4회 세계 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소설
(세계문학상은 세계일보가 2005년 기준으로 국내 최고 고료인 1억 원을 내걸고 만든 문학상이다.)
'이 도시엔 왜 이렇게 잘난 노처녀들이 많은 거냐. 잘난 노총각들은 씨가 말랐고.'
'그 잘난 노총각들은 우리 같은 노처녀들이랑은 안 놀거든.'
은영이 소파에 누워 요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요즘 노처녀들이 어디 노처녀 같애? 나이 오십이 다 된 우리 편집장만 해도 보기엔 딱 30대 초반이야.'
'모르는 소리! 남자들은 자기 여자가 어려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거지.'
과연 수컷들의 진실이란 자기 유전자를 전 지구적으로 퍼트려줄 젊은 난자들에게 향해 있는 것일까. 늙은 난자들의 교묘한 화장술이나 성형술을 알아보는 유전자 코드가 고릿적부터 핏속에 새겨져 있는 걸까. 이것이 자연이 정한 냉혹한 유전자의 법칙이란 말인가.
'괜찮다 싶으면 꼭 유부남 아니면 게이더라! 무슨 놈의 바닥이 이런지 몰라.'
'섹스는 고사하고 난 웰빙 기사 쓰면서 컵라면 먹는 이중생활이나 좀 청산했으면 좋겠다.' p.46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나는 기부를 한다.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기부금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도 있다. 이미 나사가 1천 개도 더 빠졌을 거란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하지만 별 수 없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 내겐 이 두 가지 욕망이 모두 다 중요하다. 그래서 남들 놀 때 눈에 불을 켜고 일하고, 일해서 번 돈으로 열정적으로 쇼핑한다. 영화광이 히치콕의 희귀 DVD를 사 모으고, 애서가가 절판된 펭귄북스 시리즈에 열광하듯 그렇게 말이다. p.205
룸메이트인 은영은 벚꽃을 보다가 말했다. "쇼크사군!" p.13
원래 세상 모든 보스들은 '난 뒤끝 없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이 말은 '나는 대단히 뒤끝이 많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회화가 덜 된 어린애들은 윗선들이 하는 말을 해석해 내는 능력이 없다.
회사도 가르쳐주지 않는 냉혹한 조직의 생리란 보스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논리, 이성, 상식, 성과, 인간성 같은 아름다운 말? 이런 건 보스의 한마디면 끝장난다. p.17
어차피 우린 편견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구성해 나간다. 20대엔 새로운 편견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30대부터는 그 사소한 편견들을 점점 확신하고 강화해 간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친구와 선배들이 조언도 지겨울 만큼 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거다. 세상엔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편견들이 있을 뿐. 그걸 인정하고 나자 사는 게 조금 편해졌다. p.39
세상엔 회사가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만 있는 게 아니다. 부하들의 비밀이란 것도 있는 법이다. p.101
일과 휴식의 경계 없이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다 보면 가끔은 정신을 놓을 만큼 재미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십은 사람들에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나이 서른에 먹는 불량품처럼 유해하지만 달콤하다. 소문의 진실여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문이란 단지 우리들의 행복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인생엔 신문에서처럼 '바로잡습니다'코너가 존재하지 않는다. p.146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이다. 살아 있음을 증명받기 위해, 비극에 기대는 안간힘. 이것이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는 서울이라는 허술한 도시에서 견디고 있는 사람들의 비애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p.165
이마 나사가 1천 개도 더 빠졌을 거란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하지만 별 수 없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 내겐 이 두 가지 욕망이 모두 다 중요하다. p.205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며 산다. 이게 옮은 일일까.
이런 삶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p.284
나는 웃었다. 상관을 향해 무조건 미소 짓는 병. 굳이 병명을 붙인다면 '후천성 스마을 증후군'쯤이 될까. 사회화된 인간의 정치적 행동은 이유 없는 슬픈 웃음 속에도 내포되어 있다. p.54
남자와 여자 사이엔 분명한 역학관계가 존재한다. 그것이 연애든, 비즈니스든 언제나 갑과 을이 생기게 마련이다. 타고난 싸움꾼인 남자들은 룰을 정하고 승자와 패자가 확실히 갈리는 게임을 즐긴다. 타고난 협상가인 여자들을 그 룰을 수정하고 서로 관계 맺길 즐긴다. 비즈니스에서 여자들이 종종 남자들에게 패배하는 것은 룰을 무시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수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p.74
어차피 우린 편견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구성해 간다. 20대엔 새로운 편견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30대부터는 그 사소한 편견들을 점점 확신하고 강화해 간다. 세상엔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편견들이 있을 뿐. p.39
내가 그녀를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에겐 분명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선 이런 여자가 눈부시게 빛날 수밖에 없다. p.57
자신만의 방식과 원칙을 고수한 탓에 누구도 그의 권력에 흠을 낼 수 없었다. 학연도 인맥도 없었다. 그는 그냥 자유로운 단독자였다. 그래서 냉혹할 수 있었던 것이다. p.64
남자와 여자 사이엔 분명한 역학관계가 존재한다. 그것이 연애든, 비즈니스든 언제나 갑과 을이 생기게 마련이다. 타고난 싸움꾼인 남자들은 룰을 정하고 승자와 패자가 확실히 갈리는 게임을 즐긴다. 타고난 협상가인 여자들은 그 룰을 수정하고 서로 관계 맺기를 즐긴다. 비즈니스에서 여자들이 종종 남자들에게 패배하는 것은 룰을 무시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수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p.74
소문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진화한다. 일단 소문이 나면 이미지가 변형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미지는 실제보다 훨씬 강하다. p.152
게이들의 직감은 유독 예리해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편견과 핍박에 단련된 만큼 스스로의 감각을 더 세련되고 날카롭게 키우는데 전력투구한 결과 온몸에 후천적 센서가 부착된 것이다. p.188
요리사는 잘 훈련된 킬러들 p.229
밤바람 한 시간이나 하루가 아닌 한 달씩 뭉텅이로 사라지던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병원에선 천천히 흘러갔다. 시간이 침대 위에, 창가옆에 자꾸만 쌓여있는 것 같았다. 책을 읽었다. 문장이 아닌 내 삶에 단단히 밑줄을 그으며, 몇 가지 단어 위엔 방점을 찍었다. 내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p.246
밤바람 누군가 깊숙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읽는다는 건,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한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되어 간다는 증거 p.329
패션지 기자들 사이에서 이슈화되었던 의 기사가 있다. '오늘의 스타벅스 커피 한잔은 내일의 빚(Today’s Coffee Is Tomorrow’s Debt)' 일주일에 5일씩 스타벅스 커피를 30년간 마시게 되면, 은행에 잔고 대신 엄청난 빚이 쌓일 거란 얘기다. 만약 커피 대신 그 돈을 저금한다면 우리 돈으로 5천5백만 원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다. 복리로 계산해서 그렇다. 여기에 더 불행한 사실이 숨어있다. 이 금액은 커피 값을 미국 현지 가격인 3달러로 계산한 수치라는 것이다. 사실 한국은 스위스 같은 곳을 제외하면 스타벅스 커피가 가장 비싼 나라 중에 하나이다. 게다가 입맛이 고급인 이 바닥 인간들은 평범한 까페라떼 같은 걸로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p.00
음식이란 기묘한 것이다. 재채기같이 속일 수도, 속여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음식이 가지고 있는 진짜 온도다. 수프나 국처럼 위안을 주는 음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만약 그것이 수프가 아닌 스테이크였다면, 영혼까지 위로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것이 차가운 샐러드나 냉채였다면 말이다. 마치 돌멩이를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처럼 음식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술을 부린다.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직접 음식을 만들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은 우리가 어릴 적 체득한 음식의 힘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p.250
그의 마음속에도 상처받은 아이가 있소, 그렇게 늘 웅크린 채 혼자 울고 있었던 거다. 작은 벌레처럼 온몸을 말고 어둠 속에 떨고 있었을 그 아이가 가여워 나는 그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누군가를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가여워할 줄 아는 연민일지 모른다. p.333
- 벚꽃의 망울이 팝콘처럼 부풀어 톡톡 터지기 시작했다. p.13
어차피 우린 편견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구성해 나간다. 20대엔 새로운 편견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30대부터는 그 사소한 편견들을 점점 확신하고 강화해 간다. p.39
참고: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백영옥의 말과 글, 글을 참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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